[이규화의 지리각각] 세계 억만장자들 여름캠프, 선밸리는 어떤 곳?
2026.07.08 15:57
앨런앤컴퍼니가 매해 7월 주최하는 '억만장자들 사교장'
테크, 금융,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수장들 넥타이 풀고 대화
인구 2000명 한적한 마을이 세계경제의 비즈니스 장 변신
록키산맥 해발고도 1800m, 선선한 날씨에 액티비티 성지
미국 북서부 아이다호주 작은 마을 선밸리(Sun Valley)의 프리드먼 메모리얼 공항은 해마다 7월이면 초호화 전용기들로 붐빈다. 계류장에는 포춘 부자 순위 상단에 이름을 올리는 빅테크 창업자나 수장, 거대 투자금융사 CEO, 미디어와 영화업계 '셀럽'이 선밸리 콘퍼런스 참석차 타고 온 항공기들이 즐비하다. 인구 2000명도 되지 않는 이 한적한 마을이 잠시 세계 비즈니스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7일 미 선밸리로 출국하면서 선밸리 콘퍼런스에 관심이 쏠린다. 이 회장은 2002년 이래 거의 매년 참석해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해왔다. 특히 올해는 인공지능(AI) 붐으로 AI칩 공급 부족이 심화하면서 메모리 세계 최대 공급기업인 삼성의 이 회장이 참석자들의 미팅 콜을 많이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앨런앤컴퍼니(Allen & Company)라는 비상장 투자회사가 지난 1983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이 콘퍼런스는 비공개가 원칙이다. 그래서 더 친밀한 대화가 오간다.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과 비교되지만 운영 방식은 현격히 다르다. 참석자들은 선밸리 로지라는 호텔을 중심으로 며칠간 이곳에 머무르며 운동화와 플리스 재킷 차림으로 산길을 걷고 산악자전거를 타며 카약을 즐긴다. 골프 코스에서는 경쟁 기업 수장들끼리 웃으며 담소를 나누고, 저녁 식탁에서는 수십조 원 규모의 인수합병(M&A) 아이디어가 제시된다. 세계 언론이 이 행사를 '억만장자들의 여름캠프'라고 부르는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하고많은 휴양지 가운데 왜 하필 선밸리일까. 왜 세계 최고 부자들이 40년 넘게 이곳을 찾는 걸까. 선밸리 콘퍼런스는 1983년 앨런앤드컴퍼니의 최고경영자였던 허버트 앨런 주니어(Herbert Allen Jr.)가 처음 시작했다. 당시 참가자는 35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앨런이 첫 행사 당시 참석자들을 일일이 설득해야 할 정도로 작은 모임이었다고 한다. 이후 행사는 실리콘밸리와 월가, 할리우드를 연결하는 미국 최고의 비공개 네트워크로 성장했다. 포춘은 "앨런은 고객들이 투자은행의 고객이 아니라 특별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느낌을 갖도록 독점성과 친밀감을 설계했다"고 평가했다.
왜 앨런은 이곳을 회합 장소로 택했을까. 미국에는 아스펜, 잭슨홀, 레이크 타호, 베일 등 이름난 휴양지가 부지기수다. 이유는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대신 휴대전화도 잘 터지지 않는 광활한 산맥과 계곡, 그리고 조용한 분위기가 있다. CEO들이 카메라 플래시나 취재진의 질문 없이 하루 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자연스럽게 신뢰를 쌓기에 이보다 좋은 장소가 없었던 것이다. 미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회의실이 아니라 아침 식사와 하이킹, 자전거 라이딩, 저녁 식사에서 중요한 대화가 이뤄지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선밸리는 록키산맥이 지나는 아이다호주의 중남부 블레인 카운티 해발 1800m 고원에 있다. 북쪽으로 해발 2789m에 달하는 볼드 마운틴(Bald Mountain)이 있고, 록키산맥의 지류인 스모키(Smoky) 산맥과 소투스(Sawtooth) 산맥이 에워싸고 있다. 겨울에는 세계적인 스키 리조트로 이름을 날리지만, 7월이 되면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고지대로 인해 평균 낮 기온은 섭씨 20도 후반, 아침과 저녁은 긴 소매가 필요할 정도로 선선하다.
습도가 낮아 햇볕은 따뜻하지만 그늘에서는 상쾌한 바람이 분다. 장마가 없는 미 북서부 특유의 맑은 하늘은 일주일 내내 야외활동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을 만든다. 이런 기후 덕분에 콘퍼런스도 보통 매년 7월 초순에 열린다. 참석자들은 오전 세션을 마친 뒤 오후에는 골프와 테니스, 플라이 낚시, 산악자전거, 하이킹, 승마, 카약, 래프팅 등을 함께 즐기며 관계를 다진다. 중요한 사업 이야기는 이때 많이 오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밸리는 미국 휴양 문화의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 1936년 철도재벌 에버렐 해리먼이 유럽의 생모리츠를 모델로 개발한 미국 최초의 스키 리조트다. 할리우드 황금기의 배우들이 겨울 휴가를 보내던 곳이었다.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이곳 선밸리 로지에서 대표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보스 포럼이 정부 대표단과 언론, 공식 의제 및 기자회견이 중심이라면, 선밸리는 일정과 토론 내용은 물론 참석자 명단조차 공개하지 않는 '비공개주의'로 운영된다.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골프장과 하이킹 코스에서의 대화가 회의실보다 더 중요하다"고 전한다. 최근 몇 년간 보안이 더욱 강화되면서 취재진 접근이 크게 제한되는 경향도 있다. 이 같은 철저한 비공개 문화가 오히려 기업인들에게는 자유로운 토론의 공간을 제공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선밸리는 굵직한 거래의 '산실'로도 유명하다. 1996년 월트디즈니의 캐피털시티 커뮤니케이션스(ABC 방송의 모회사) 인수, 2013년 컴캐스트의 NBC유니버설 인수 논의 등이 이곳에서 물꼬를 텄다. 2014년 당시 이재용 부회장과 팀 쿡의 만남 이후 삼성전자와 애플이 미국 외 지역에서 스마트폰 특허소송을 철회한 사례는 선밸리 비즈니스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그렇다고 선밸리가 억만장자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다. 이곳은 미국 중산층 가족들이 가장 사랑하는 휴가지 가운데 하나다. 여름에는 수백 ㎞에 이르는 트래킹 트레일을 따라 걷거나 자건거를 탈 수 있고, 빅우드강(Big Wood River)에서는 플라이 낚시를 즐길 수 있다. 소투스 국립휴양지의 호수에서는 카약과 패들보드도 인기다. 곳곳에 온천과 야생화 군락이 펼쳐지고 별빛이 쏟아지는 캠핑장이 널려있다. 겨울 스키 명소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현지 관광업계는 여름을 가장 휴양하기 좋은 시기로 꼽는다.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수장들의 캠프가 끝나면 선밸리는 다시 고요한 산악 휴양지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화려함을 과시하는 곳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사람과 사람이 마주 앉아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 선밸리는 억만장자들의 비밀 캠프이기 전에 누구에게나 산과 강, 맑은 공기, 그리고 느린 시간을 선물하는 미국 북서부의 오래된 여름 휴양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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