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헌 아르코 위원장 “반도체가 뿌린 씨앗 옆에 K컬처도 뿌리…문화생태계 함께 커야죠”
2026.07.08 17:41
메가프로젝트로 수도권 집중 해소 기대
문화 더해야 ‘사람 모이는’ 도시로 거듭
전남·광주 문화자산 묶어 AI 문화수도로
문화예술진흥기금, 고갈 넘어 소멸 직전
2005년 4900억이던 적립금 작년 411억
기초예술은 복지 아닌 국가의 전략 투자
복권기금법 고쳐 순수예술 지원 늘려야
예술적 상상력이 운 좋게 현실과 맞아떨어져 기발함이 빛나는 때가 있다. 미술인으로 출발해 예술인 복지와 문화 정책으로 두툼한 이력을 쌓아온 이범헌 제9대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아르코) 신임 위원장이 7일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서울경제신문과 인터뷰를 갖고 그 반짝임을 펼쳐놓았다. 이 위원장은 “아르코가 나주에 본부를 두고 있고 바로 옆에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있으며 아시아 문화 중심 도시 광주가 인근에 있다”며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발표한 ‘3대 메가 프로젝트’에 발맞춰 전남·광주 통합특별시가 세계적인 문화예술의 거점 도시로 자리매김할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다. 이어 “순수예술의 창작을 지원하는 아르코와 문화산업을 키우는 콘진원이 협력하며 시너지를 내고 이 지역 16개 기관의 문화 자산을 하나로 묶는다면 ‘AI 문화 수도’로 갈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4월 말 취임 이후 이제 겨우 두 달 반 남짓 지났지만 빠른 속도로 주요 업무와 현안을 파악한 그는 ‘일 잘하는 위원장’을 몸소 실천하는 중이다. 예술가적 역발상은 정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렸고 오랜 현장 경험은 새로운 과제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저력이 됐다. 나주에 본부를 둔 아르코의 현실과 문화예술 향유의 지역 균형을 국가적 프로젝트인 ‘3대 메가 프로젝트’와 연결한 것도 그 일환이다.
문화예술 분야의 지역 간 불균형 문제는 문화 자산이 제각각 흩어져 빛을 내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 위원장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과 세계적 수준의 광주비엔날레, 한국 남종화가 태동한 진도 운림산방과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등 훌륭한 자산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며 “이것을 하나의 로드맵으로 꿰어 전남·광주를 통째로 한 판이 되게 만들어야 시너지가 난다”고 말했다. 공공기관이 지방으로 내려가고도 제 역할을 못한 한계와 비판을 넘어서겠다는 강한 의지가 읽힌다.
실제 아르코가 나주로 이전한 지 12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지어진 것은 사무동뿐이며 다목적 공연장, 전시장 등의 문화시설은 전무한 형편이다. 이 위원장은 “아직은 구상 단계지만 나주시가 부지를 제공해 줄 수 있다면 다목적 공연장과 전시장, 창작 레지던시를 갖춘 오프라인 플랫폼을 지어 시민이 문턱 없이 드나드는 ‘문화 놀이터’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전남 문화 프로젝트 구상 못지않게 서울 대학로의 지속성을 위한 오랜 고민과 아이디어도 꺼냈다. 서울 대학로의 아르코극장, 대학로극장, 아르코미술관, 예술가의 집 등 제반 시설은 지역성의 서사 구조를 품고 함께 가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 위원장은 “근처에 윤석화 배우의 극장, 도올 김용옥 선생의 자택을 비롯해 근대미술가 권옥연·박고석 등의 옛집이 있는데 그런 예술가의 삶과 연결되는 스토리텔링이 지역 서사 구조를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골목과 길을 따라 예술의 이야기가 흐르면 그것이 모세혈관처럼 지역 전체에 양분과 활력을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기형적인 재원 구조도 발목을 잡는다. 2026년 문예기금 수입 6325억 원 가운데 자체 수입은 14.8%(936억 원)에 불과하고 복권기금·체육기금 등 정부 전입금 의존도가 66.5%(4209억 원)에 달한다. 특히 복권기금 의존도는 2010년 6.6%에서 2019년 22.5%, 올해 44.4%(2809억 원)로 급증했다. 이 위원장은 “복권기금은 지출 목적이 ‘소외계층 문화 향유’로 법적으로 한정돼 있어 정작 순수 창작 지원에는 유연하게 쓸 수 없는 구조적 모순이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창작 지원 예산은 지난 10여 년간 소폭 늘어 전체 규모에서는 오히려 뒷걸음질 쳤다.
결국 실마리는 국회에 있다. 1월 복권및복권기금법·공연법·저작권법 개정안 3건이 발의돼 소관 상임위 안건 상정까지 마친 상태다. 이 위원장은 “복권및복권기금법 개정으로 문화예술 창작 지원 항목을 명시하고 일정 비율을 법정 배분으로 전환하면 2027년 약 3139억 원의 재원 효과가 기대된다”며 “영국이 국립복권분배기금의 20%를 법정 배분하는 사례를 벤치마킹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여기에 공연법 개정으로 암표 등 부정판매 몰수·추징금, 저작권법 개정으로 미분배 보상금을 더한다면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고정 재원의 틀을 갖출 수 있다. 희망 사항이지만 반도체 산업에서 발생하는 초과 세수 일부를 문예 진흥 예산으로 편성할 수 있는 방안도 모색하는 중이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위원장은 공공 재원의 한계를 민간으로 보완하는 ‘투트랙’ 전략을 병행하겠다고 했다. 우리나라 문화예술 후원에서 민간 비율은 3% 미만으로, 선진국과 비교하면 극히 낮다. 그는 “공공 재원에만 의존하는 예술 생태계는 온실 속 화초와 같아 정책 환경이 바뀌는 순간 스스로 버틸 자생력을 잃는다”고 지적했다.
관건은 인식의 전환이다. 이 위원장은 “국민이 예술 후원자가 되는 여정은 단계적이다. 향유를 통해 예술을 만나고,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이 생기는 애호가 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후원으로 이어진다”며 “이 과정을 건너뛰고 일방적으로 기부를 요청하면 시혜적 요구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도로나 학교가 사회 인프라이듯 기초예술도 국가의 문화 인프라다. 기부는 그 인프라의 지분에 참여하는 투자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세제 혜택 확대도 과제로 꼽았다. 그는 “프랑스는 기업 기부금의 60%를 세액공제한 후 10년간 문화예술 후원 총액이 약 3배 늘었다”며 관계 부처 건의를 예고했다. 아르코는 올해 213억 8000만 원 규모의 후원 활성화 사업을 벌이고 한국메세나협회와 손잡아 후원이 필요한 예술 단체와 기업을 잇는 매칭 생태계를 넓힐 계획이다.
이 위원장은 한국 문화예술의 미래에 대해 “지금의 K컬처는 찬란하지만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 냉정한 진단”이라고 평했다. 화려한 콘텐츠 산업의 성취도 기초예술이라는 단단한 정체성이 받쳐줬기에 가능했다는 의미다. 그는 “인공지능(AI)이 콘텐츠를 대량생산하는 시대에 인간 고유의 감각과 사유에서 비롯된 기초예술의 가치는 더욱 희소해진다”며 “기초예술 지원은 취약계층에 대한 시혜적 복지가 아니라 글로벌 지식재산(IP)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가장 공격적인 국가 전략 투자”라고 규정했다.
그가 그리는 아르코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더라도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는 것이 아르코의 역할이고 그 씨앗이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예술가의 몫”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한국이 아웃바운드를 넘어 세계 예술가들이 오고 싶어 하는 ‘인바운드 문화 허브’가 되고 그 거점이 전남·광주가 되기를 그는 바랐다. 반도체가 심는 산업의 씨앗 옆에 문화의 뿌리를 함께 내리겠다는 구상이다. 이 위원장은 “3년의 임기 안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흔들리지 않을 토대만큼은 반드시 만들어 놓겠다”고 힘줘 말했다.
He is...
△1963년 충북 옥천군 △1981년 서울 선화예고 졸업 △1981년 홍익대 동양화과 입학 △1997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입학 △2005년 교육부 한국교육개발원 미술학사 졸업 △2008년 홍익대 미술대학원 동양화 전공 석사 졸업 △2017~2020년 제24대 (사)한국미술협회 이사장 △2019~2024년 서울시교육청 문화예술 특별보좌관 △2020~2024년 제28대 (사)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2026년~ 제9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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