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여성리더] 첫 여성 대통령 게이코 후지모리, ‘독재자의 딸’ 꼬리표
2026.07.08 06:00
‘일본계 부녀 대통령’ 기록 세워
7월 28일 공식 취임…5년 임기
1990년부터 2000년까지 10년간 페루를 철권 통치했던 '후지모리 가문'이 다시 권좌에 앉았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페루국가선거심판원(JNE)은 지난 3일(현지시간) 보수 우파 성향의 게이코 후지모리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고 공식 선언했다. 게이코는 페루를 10년간 통치하다 부패 혐의로 축출된 알베르토 후지모리(1938~2024) 전 대통령의 장녀다.
앞서 지난 6월 7일 치러진 대선 결선투표에서 게이코는 50.135%의 득표율로 49.865%를 얻은 좌파 성향의 로베르토 산체스를 꺾고 승리했다. 2011년과 2016년, 2021년 대선에서 연거푸 낙선했던 게이코는 4수 끝에 대권을 잡았다. 게이코는 오는 28일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하며, 임기는 5년이다.
게이코는 이번 대선에서 승리하며 '일본계 부녀 대통령 탄생'이라는 기록과 함께 선거를 통해 선출된 첫 번째 페루 여성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앞서 2022년 페드로 카스티요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디나 볼루아르테 부통령이 첫 여성 대통령으로 이름을 올린 적 있지만, 선거를 통해 여성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당선이 확정되자 게이코는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유권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책임감과 겸손, 그리고 깊은 사명감을 갖고 대통령직을 수행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정권 인수 과정의 하루하루를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소통하며 새 정부 출범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1994년부터 어머니 대신해 영부인 역할 대행
게이코는 1975년 알베르토와 일본계인 수산나 히구치(1950~2021) 사이에서 4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1994년 수산나가 영부인직을 박탈당하자 게이코(당시 19세)는 어머니를 대신해 영부인 역할을 수행하며 정치권에 등장했다. 당시 남편을 독재자라고 비판한 수산나는 비밀 정보요원들에 의해 고문을 당했으며, 알베르토의 친척들이 부정부패를 저질렀다고 폭로해 페루에 파장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1995년 공식 이혼했으며 수산나는 이후 야당에 입당해 2000년부터 2006년까지 국회의원을 지냈다.
젊은 시절부터 어머니를 대신해 영부인 역할을 대행했다는 점과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정치에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게이코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닮은 부분이 많다. 이 때문에 게이코는 국내에서도 '페루의 박근혜'로 언급돼 왔다.
게이코의 정치 이력은 아버지인 알베르토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알베르토는 1938년 일본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1934년 일본 구마모토현에서 페루로 이민을 떠났으며, 알베르토의 아버지는 페루에서 재봉사로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알베르토는 국립농업대학에서 농업공학을 전공했으며,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밀워키 캠퍼스에서 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페루로 귀국해 모교에서 총장을 지냈으며, 1989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비록 1980년대 후반 국영TV에서 농업과 관련된 프로그램의 진행자를 맡기도 했지만 알베르토는 정치 경험이 전무한 무명의 후보에 가까웠다. 당시 페루의 유권자들은 그를 두고 '엘 치노'(El Chino·중국인)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중국인을 뜻하는 스페인어 '치노'는 동양인을 비하할 때 사용되기도 하지만, 알베르토는 이를 애칭으로 받아들이며 역으로 자신이 일본계 혈통이라는 사실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는 자신이 사무라이의 후손이라고 강조하며 일본도를 들거나 가라테 도복과 기모노를 입는 등 의도적으로 '일본인스러운 모습'을 연출했다. 또 '정직·기술·노동'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일본의 투자와 기술 유치를 약속했다. 이에 대해 타임지는 "일본계가 근면하고 정직한 집단이라는 페루 사회의 고정관념을 이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독재자의 딸' 꼬리표 뗄까
아울러 알베르토는 선거 운동 중 '당신과 같은 대통령'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는 트랙터를 몰며 아웃사이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했으며, 페루의 전통의상인 판초를 두른 채 전국을 누비며 평범한 사람을 위해 싸우겠다고 약속했다. 이 같은 전략은 백인이 주류인 엘리트 정치인들에게 염증을 느끼던 원주민과 메스티소(백인과 원주민의 혼혈) 유권자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그는 유력 후보였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201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꺾고 1990년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재임 시절에는 마오주의 무장세력인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을 소탕하고, 초인플레이션을 퇴치하는 데 성공했다.
정국 안정과 경제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페루의 구세주'로 떠오른 알베르토는 1992년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고, 의회를 해산시키며 권위주의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그는 학살과 납치, 정치 공작, 언론 검열 등 인권 탄압을 자행했으며, 인구 증가 억제라는 명목 하에 '가족계획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25만명의 여성 원주민들을 상대로 강제 불임 수술을 시행했다. 2000년 3선에 성공했지만 같은 해 최측근인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 전 국가정보국 국장이 야당 의원을 매수하려는 영상이 공개되자 일본으로 도피한 뒤 팩스로 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했다. 알베르토는 2005년 칠레 방문 중 체포돼 가택연금에 처해졌으며 2007년 페루로 강제 송환됐다. 2009년에는 인권 유린과 부패 범죄 등의 혐의로 2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2024년 사망했다.
1993년 학업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게이코는 아버지가 체포된 해 페루로 귀국해 본격적으로 정계에 뛰어들었다. 그는 후지모리 향수에 젖어있던 아버지의 지지세력에 힘입어 200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역대 최다 득표수를 기록하며 당선됐다. 이후 민중권력당을 창당한 뒤 2011년 대선 출사표를 던졌다. 하지만 2011년, 2016년, 2021년 대선에서 모두 고배를 마셨다. 게이코는 알베르토 집권 시절의 경제 발전을 그리워하는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나, 인권 유린과 부정 부패라는 알베르토의 과오는 번번이 게이코의 발목을 잡았다.
게이코는 아버지에 대한 입장을 끊임없이 번복해 왔다. 그는 2011년 아버지 재임 기간 중 벌어진 일들에 대해 공식 사과하며 "이 같은 실수와 범죄는 두 번 다시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선거 전략의 일환으로 아버지와 거리두기에 나섰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도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으며 대통령으로 당선돼도 "아버지를 사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후 입장을 뒤집고 사면을 촉구하는 등 아버지의 명예회복에 힘써왔다. 게이코는 2021년 페루 아메리카 텔레비시온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이미 충분한 대가를 치렀다. 그래서 제 생각도 바뀌었다"고 말했다. 이번 선거에서도 '후지모리가 돌아오면 질서도 돌아온다'는 구호를 내세우며 아버지의 정치적 유산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정치적 양극화 우려↑…중남미 우파바람 거세져
선거 기간 중 게이코는 당선 후 범죄 문제에 강경 대응하겠다고 약속했다. 범죄 근절을 위해 엘살바도르 테러범수용센터(CECOT·세코트)와 유사한 초대형 교도소를 건설하겠다고 예고했다. 또 국경 지역에 군을 배치하는 한편 미등록 이주민을 추방하겠다는 공약도 내놓았다.
다만 초접전 끝에 가까스로 승리한 데다 후지모리 가문에 대한 반감도 여전한 만큼 게이코의 당선으로 페루 내에서 정치적 혼란이 거세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스페인어권 매체 엘파이스는 "이번 승리는 페루의 사회·정치적 분열을 더욱 심화시킬 가능성이 있다"며 "대통령들이 잇따라 임기를 채우지 못한 데다 게이코 역시 최근 수년간 의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정치적 양극화를 조장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게이코의 승리로 향후 중남미에서 '블루 타이드'(Blue Tide·우파 집권 물결)가 한층 거세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앞서 올해 3월 칠레에서는 '칠레 트럼프'로 불리는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 대통령이 취임했으며, 최근 콜롬비아 대선에서는 강경 우파 성향의 아벨라르도 데 라 에스프리에야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BBC는 "게이코의 당선은 콜롬비아에서 아벨라르도 데 라 에스프리에야의 당선과 함께 중남미 정치 지형이 우파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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