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강태완 이름으로 ‘다음 태완들’ 위해…꺾인 삶 세우는 응급 지지대
2026.07.07 05:02
체류자격만으로는 생존 불가능한
‘다음 태완들’ 위해 유족 등 추진
첫 수혜자로 세 청년 긴급 지원
장기 거주비자·건보제도 개선 등
이주배경청년 체류 여건 갖춰야고 강태완(2020년 7월~2024년 7월 한겨레 연재 ‘호준과 호이준 사이에서’ 주인공)씨가 세상을 떠난 지 1년8개월이 흘렀다. 만 5살(1998년)에 엄마를 따라 몽골에서 입국해 미등록 이주아동으로 살아온 그는 조건부 거주비자(인구감소 지역 5년 근무)를 얻은 지 5개월 만에 전북 김제의 특수장비차량 회사에서 산업재해(2024년 11월)로 목숨을 잃었다. 죽음(당시 32)의 중대재해 여부는 2주기가 다가오는 지금까지 여전히 고용노동부 수사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의 이름을 딴 ‘듬직한 강태완 기금’이 출범한다. 한국을 ‘내 나라’로 여기며 정착을 꿈꾸다 삶이 꺾인 ‘다음 태완들’의 곁에 세우는 ‘응급 지지대’다. 첫 수혜자는 세 청년이다. 이주배경청년 체류자격 부여 시한 연장을 이끌어낸 태완씨의 죽음 이후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 제도의 지체가 그들의 일상을 부러뜨리고 있다.
지난달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의사가 진단한 증상엔 영양실조와 빈혈도 있었다. 1년 넘도록 하루 한끼를 겨우 먹었다. ‘그래도 밥 굶는 사람은 없지 않냐’는 말이 ‘발전’의 수식어로 통용되는 대한민국에서 밥 사 먹을 돈이 없었다.
“저는 평범한 십대 여중생처럼 아이돌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콘서트를 가려면 티켓이 필요하고, 티켓을 얻으려면 티케팅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예매 사이트에 가입해야 하는데, 저는 가입할 수 있는 주민번호가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머릿속은 우울로 가득 찼습니다.”
법무부 장관에게 탄원서를 썼던 중학생(2017년 3학년) 때부터 우울은 마리나를 떠난 적이 없었다. 그즈음 약을 먹기 시작했다. 그의 우울증은 약의 힘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한국인의 정체성’을 인정받을 때만 나아질 수 있었다.
마리나는 ‘나나’이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그는 고 강태완의 5년 여정을 기록한 ‘호준과 호이준 사이에서’ 2편(2020년 8월8일)에 나나란 이름으로 소개됐다. 국내에서 이주노동 중 만난 몽골인 부모 사이에서 2002년 태어났다. 마리나(서울 출생)는 엄마아빠의 입이었다. 청각·언어장애를 가진 부모의 수어를 통역하느라 체류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초등학생 때 벌써 알았다.
“이곳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해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탄원서)
미등록 이주아동들이 수능을 치를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며 공부를 놓을 때도 마리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열심히 입시를 준비했고 봉사동아리 부장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2020년 5월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인권침해(‘장기체류 미등록 이주아동의 체류자격 부여제도 부존재에 따른 침해’) 결정을 이끌어낸 두명의 “피해자” 중 한명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2019년 12월 베트남 국적의 유미(가명·국내 출생으로 당시 고3)와 ‘단속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며 인권위에 진정했다. 태완이 법무부 정책(6개월 안에 나가면 미등록 체류 범칙금과 재입국 금지 면제)에 따라 출입국외국인청을 찾아가 몽골로 자진출국을 신고하기 반년 전이었다. 당시엔 ‘학습권 지원 차원’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강제출국이 유예됐으나 졸업과 동시에 단속 대상이 됐다. 인권위는 모든 절차를 활용해 체류자격 부여 방법을 마련하라고 법무부에 권고했다. 법무부 방안(2021년 4월 ‘조건부 구제대책’)은 인권위 권고 348일 뒤에 나왔다. 국내에서 태어나 15년 이상 살아온 경우에 한해 고등학교 졸업 뒤 임시체류자격(G-1)를 부여했다.
“우울증은 비자를 얻은 뒤 더 심해졌어요.”
병원에서 마리나는 말했다. 정부가 이주배경청년 체류 정책 개선을 검토하게 만들었던 그는 ‘체류만 허용하는 정책’으론 생존이 불가능하단 사실을 입증하는 증인이기도 했다.
법무부의 대책 마련(규정은 인권위 권고 90일 이내)이 늦어진 탓에 마리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던 2020년 대학 입시를 치르지 못했다. 졸업 뒤인 이듬해 4월 비자를 받고 2022학년도 입학시험에서 4년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2023년 8월 택배회사에서 상하차 일을 하던 부모가 한꺼번에 단속돼 추방당했다. 혼자 남은 마리나는 극심한 곤경에 빠졌다. 외국인에게 차별적이라고 지적돼온 제도적 문제들이 마리나에게 한꺼번에 쏟아졌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을 떠나본 적 없는 마리나의 신분은 외국인 유학생(D-2)이었다. 국내에서 유학생들은 생활비를 벌기 위한 휴학이 불가능했다. 휴학을 신청하면 비자가 소멸돼 15일 이내 출국해야 했다. 아르바이트도 쉽지 않았다. 허용되는 업종과 노동시간이 엄격히 제한됐다. 표준근로계약서·사업자등록증 등의 서류 지원과 출입국사무소 승인 절차까지 감수하며 유학생을 채용하는 고용주도 극히 드물었다. “알바 서류를 접수해도 연락 자체가 오지 않았”다.
“전재산이 1800원밖에 없어 3000원짜리 밥을 사먹지 못하고 굶는 날”이 이어졌다. 유학생 대출 상환금과 공과금, 통신요금을 연체한 마리나는 휴대폰이 끊긴 채 집안에 고립됐다. 건강보험료를 체납(외국인은 체납 바로 다음 달부터 건보 적용 중단)해 병원에도 가지 못했다. “우울증 약을 못 먹으니까 무기력이 심해져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성적을 유지하지 못해 장학금도 취소됐다.
‘듬직한 강태완 기금’이 출범 전 긴급 투입됐다. “마리나의 상황이 너무 심각해 운영위원회 논의를 거쳐 체납액부터 해결하고 생활비 지원을 시작”(김사강 이주와인권연구소 연구위원)했다.
“하루하루가 버거워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리지 못했던” 마리나는 태완을 사망 이후 알게 됐다. “현실에 지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다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팠”다. “아직 삼시세끼를 챙기진 못하지만 태완님 덕분에 두끼는 먹을 수 있게 됐고 입원 뒤론 가끔 과일도 사먹었”다.
강태완 기금은 한국에서 성장해 자립·정착하려 고군분투하는 ‘다음 태완들’을 지키기 위해 추진됐다. 태완의 죽음 이후 비어 있는 ‘다음 정책’의 공백을 메우는 응급조처이기도 했다. 사망 직후 유가족인 어머니와 죽음의 책임을 물으며 싸워온 이들이 설립 논의를 시작했다. 당시 추모 성금을 보내준 1537명의 시민이 ‘주춧돌 후원자’가 됐다. 대책위 활동비용과 장례비 등을 지출하고 남은 성금에 태완 사후 수여된 제6회 노회찬상 상금, 어머니 이은혜(몽골명 엥크자르갈)씨가 보탠 아들의 산재 보상금, 개인 후원금 등 1억2000여만원으로 첫발을 뗀다. 최소 1년 이상 지속 지원해 일상 회복과 유지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최근 마리나는 대학 시절(지난 2월 졸업) 스승이 연결해준 인턴 계약마저 취소되며 건강보험 직장가입자에서 지역가입자로 전환됐다. 외국인 지역가입자에겐 소득 상관없이 전년도 전체 가입자(직장+지역)의 평균보험료(소득·재산 파악이 힘들다는 논리로 2019년 도입 당시부터 비판 제기)가 날아왔다. 두달치 건보료 31만원(외국인에겐 선납제를 적용해 최초 납부 때 2개월분 부과)을 받아 든 마리나는 충격에 빠졌다. 그는 “체류자격이 없어 불안했던 중고등학교 때보다 체류자격을 얻고 사회에 나와 매 순간 벽에 부딪히며 더 절망”했다. 강태완 기금이 보내준 한달치 지원금을 통째로 송금한 뒤 병원으로 실려 갔다.
2024년 2월4일 방영된 한국방송(KBS) ‘전국노래자랑’(전북 정읍편)에서 진행자 김신영이 감탄하며 물었다. 한복 차림의 단짝 친구와 테크노 댄스를 추며 이정현의 ‘와’를 부른 아스라(당시 18)가 답했다.
“안양에서 태어났어요.”
관객들이 폭소를 터뜨렸고 김신영은 이해했다는 듯 말했다.
“아! 한국 사람이시구나.”
안양에서 출생해 정읍에 거주하는 한국어 원어민이 ‘한국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은 당연했다.
아스라의 여동생(당시 14)이 “정읍 여신”이라고 쓴 태블릿을 들고 무대 아래에서 언니를 응원했다. 태어났을 때 많이 아파 부모가 난민 신청과 불허 처분 취소 소송을 이어가며 치료했던 딸이었다. 남동생 아셈은 카메라로 누나의 인기상 수상 모습을 찍었다. 아스라는 마리나의 인권위 진정 뒤 나온 2021년 법무부 ‘구제대책’으로 체류자격을 얻었고, 당시 14살로 ‘15년 이상 국내 거주’ 조건을 채우지 못했던 아셈은 이듬해 발표된 ‘체류자격 부여 대상 확대 방안’(6살 미만 입국해 6년 또는 6살 넘어 입국해 7년 이상 거주)으로 비자(D-4·연수)를 받았다.
아셈(19)은 사망 6개월 전의 태완을 만난 적이 있었다. 남매의 체류자격 취득을 도와온 김사강이 아셈 가족과의 식사 자리(2024년 5월)에 그를 데려왔다. 지역특화형 거주비자(F-2-R)를 받고 특장차 회사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던 태완은 어릴 때부터 자동차를 좋아한 아셈에게 진로 조언을 했다. 태완의 죽음을 들었을 때 아셈은 “너무 놀라 뉴스를 찾아봤”다. “마주 앉아 밥 먹으며 대화했던 형이 (산재)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한국인 ‘정체성’과 외국인 ‘자격’
아셈은 올해 대학교 자동차공학 계열에 수시 전형으로 진학했다. “다쳐서 일을 쉬는 아버지의 짐을 덜고 싶어 장학금 받을 확률이 높은 외국인 전형에 지원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그 대학에선 국내 고등학교 졸업생에게 외국인 전형 자격을 주지 않았다. 끊임없이 외국인으로 규정돼온 아셈에게 ‘외국인 전형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 같았다. 유학비자 신청 땐 거꾸로였다. 수시로 합격한 아셈에게 출입국외국인청이 외국인 전형자에게 주어지는 표준입학허가서 제출을 요구했다. 허가서를 받으려면 통장에 1600만원 이상 예치(유학 능력 입증)돼 있다는 사실도 증명해야 했다. 아버지가 급하게 빌린 돈으로 금융 기록을 뗐지만 380만원에 달하는 등록금은 마련할 길이 없었다. 그 돈을 세상에 없는 ‘태완이 형’이 대신 내줬다.
입학 뒤 아셈은 10㎏이 빠졌다. “치킨집과 편의점 등 여러 군데서 알바 면접을 봤지만 모두 안 됐”다. “식당에선 피부색이 다르다고 거부당했고 일당 물류센터를 찾아갔을 땐 유학생 채용이 금지돼 있다는 말만 듣고 돌아왔”다. 무슨 일이든 해야 했지만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한학기가 지났다. 그 사이 아셈은 구직과 취업 걱정으로 말라갔다. “한국 기업이 군필을 선호한다기에 자원입대 방법까지 알아봤지만 외국인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낙담”했다. 강태완 기금이 주는 생활비로 버티면서도 “어떤 돈인지 아니까 마음 편히 쓰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대한 꺼내지 않으려고 했”다.
생전 태완은 만료(2025년 3월)를 앞둔 이주배경청년 체류자격 부여 정책의 제도화 촉구 캠페인(Let Us Dream!)에 참여했다. 그의 죽음과 캠페인은 성년이 된 ‘유령 아이들’의 호소를 사회 의제로 만들며 정부의 ‘교육권 보장 연장(3년) 및 취업·정주 방안’을 이끌어냈다. 법무부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아도 취업·정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각각의 여건에 맞게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했다”(지난해 3월20일)고 자평했으나 아르바이트 구직조차 힘든 현실은 어떤 길도 열어주지 못했다.
아이샤(21)는 출국 기한을 3개월씩 연장(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강제퇴거 유예)할 때마다 받던 통지서를 그렇게 불렀다. 2005년 키르기스스탄에서 태어난 그와 가족은 5년 뒤 러시아로 이주해 난민 인정을 받았다. 2017년 러시아 정부의 박해로 한국으로 재이주했다. 아셈에게 적용됐던 ‘체류자격 부여 대상 확대 방안’으로 2025년 1월에 연수비자(D-4)를 얻었다.
아이샤는 고등학교 때 웹·앱 개발에 재능을 보였다. 전국 기능대회 수상 성적(1학년 3등, 2학년 2등, 3학년 1등)을 인정받아 지난 2월 대학 소프트웨어학부에 합격했다. 외국인 전형에 응시하지 못한 아셈이 수시 합격 뒤 등록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었다면, 아이샤는 수시 전형으로 1년 전액 장학금을 받은 덕에 대학 진학이 가능했다. 유학비자 신청(지난 2월) 과정에선 아이샤도 표준입학허가서 제출과 잔고 증명을 요구받았다. “학교는 허가서를 받으려면 외국인 전형으로 다시 지원하라고 했”다. 수시 합격을 포기하면 장학금을 받지 못해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아이샤는 “속상하고 답답하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 눈물이 났”다. 학교와 출입국외국인청·실무자별로 기준과 처리 방식이 달라 당사자 혼자 대처하기란 불가능(김사강 도움으로 수습)했다.
현실의 걱정과 미래의 꿈이 한몸으로 붙어 있었다.
아이샤는 일용직으로 일하는 “부모님의 일자리”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부모님 고생을 덜어드리는 것”이 가장 큰 꿈이었다. 따로 부담하는 건보료는 가족도 찢어버린(외국인 지역가입자는 배우자와 미성년 가족만 세대주와 묶고 성년 세대원은 같이 살아도 별도 부과) 듯했다. 체납 건보료와 아이샤의 생활비를 강태완 기금이 지원했다. 아이샤는 태완의 죽음을 언니 무비나(23)한테 들었다. 무비나는 ‘렛 어스 드림’ 캠페인 영상에 태완과 함께 등장했다. 체류자격 신청 과정에서 무비나는 규정에도 없는 유전자 검사 결과 제출을 요구받았다.
마리나는 대학생이 되자마자 서둘러 운전면허증을 땄다. 신분증으로 외국인등록증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한국인임을 한번도 의심해본 적 없는” 그는 자신을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한국”과 매일 맞닥뜨렸다. “귀화를 위한 소득 조건(전년도 국민총소득의 2배=1억482만원)만 해도 말도 안 되게 높았”다. “우리 같은 아이들에겐 다른 경로의 국적 취득 기회가 부여돼야 한다”고 마리나는 생각했다.
김사강은 “정부가 이주배경청년들의 정주를 지원하겠다면 현실적으로 정주가 가능하도록 체류자격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난민(F-2-4), 동포(F-4), 결혼이민(F-6)처럼 유학이나 취업 같은 조건을 붙이지 않고도 체류할 수 있는 장기 거주비자 부여와 건강보험 제도 개선 등이 뒤따라야 생존 위기까지 몰리지 않고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다.”
듬직한 강태완 기금은 오는 23일 출범한다. 기금 누리집(kangtaewanfellowship.org)에서 후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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