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채의 인 / 문학 현장]비극 조롱과 책임 원칙
2026.07.06 19:52
민주주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핵심 기율은
구성원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 원칙이다
진정성도 용서도 화해도 통합도 모두
그 바탕 위에서 작동하는 가치일 뿐이다
배재고 야구선수들과 당국자들에게는
합당한 책임의 몫이 부여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며,
선수들 자신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1.
지난 6월29일 청룡기배 야구 경기에서 벌어진 배재고등학교 야구팀의 행동이 커다란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다. 광주제일고와의 경기 중 배재고 더그아웃에서 “가야지 가야지 스타벅스 가야지, 탱크데이”라는 응원 구호가 반복적으로 울려 퍼진 것이다. 이는 지난 5월18일, 광주의 비극이 있었던 날을 탱크데이로 정하고 기념 텀블러를 판매함으로써 경악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던 스타벅스의 판촉 행사를 인용, 반복한 것이다.
이로 인해 생겨난 일련의 사태가 만들어낸 충격들이 있다. 배재고 야구팀의 이런 행위 자체가 감각적 충격이었다. 카메라가 있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한 젊은 선수들이 파시즘 예찬 행동을 집단으로 하고 있는 모습은 그 자체가 이물스러웠다. 저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감각적 충격이 지나고 나자 인지적 분노가 몰려왔다.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코치진과 심판진이 선수들의 집단행동을 제대로 제지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심판진은 순간적으로 상황을 모를 수 있었다 해도, 더그아웃에 함께 있던 코치진은 대체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을까.
사태가 일파만파로 커지자 학교 당국이 내민 사과 성명과 행위도 납득하기 힘들었다. 인공지능(AI) 마크가 찍힌 성명서 같은 것은 차치하더라도, 아무리 사정이 급하다고 해도, 어떻게 지금 당장 광주제일고에 찾아가 직접 사과하겠다는 식의 의사표현을 할 수 있을까. 처벌을 두려워하는 술이 덜 깬 음주운전자가 응급실에 있는 피 흘리는 환자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이들은 광주제일고 학생들과 국민 사이에, 사과의 대상으로 광주·전남 지역 사람들을 끼워 넣었다. 광주·전남 지역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왜? 이 일에 합당한 것이 사과인지 사죄인지, 용서를 구할 대상은 누구인지, 뉘우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에 대한 성찰이 먼저 필요했다. 참회 없는 고백이 어떻게 진심일 수 있을까.
2.
배재고 야구 선수들의 행동을 비판하면서 지역 비하나 지역 혐오라고 보도하는 일부 언론의 프레임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중요한 것은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규정하는 일이다. 탱크데이 운운한 이들의 집단행동은 공공장소에서의 비극 조롱에 해당하며, 나아가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에 대한 도발이다.
스포츠 경기에서 자기 팀을 응원하기 위해 상대 팀을 야유하거나 조롱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지켜야 할 선은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격한 라이벌 관계라고 해도 인간으로서의 최저선을 넘어서는 곤란하다.
영국 축구단 리버풀 팀의 관중이 행정력의 과오로 97명이 압사당한 1989년의 힐즈버러 참사가 있었다. 이를 조롱한 라이벌 팀 관중은 운동장에서 영구 추방당하거나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 팀을 응원하기 위해 전범기를 동원하는 응원단 역시 국제 스포츠 사회의 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경기는 상대편이 있어야 성립한다.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은 경기를 위한 필수 사항이다. 공공연한 비극 조롱자는, 형사처벌은 면한다 해도 자기가 속한 곳에서 사람 대접은 받을 수가 없다.
배재고 학생들의 행위는 비극 조롱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스타벅스 탱크데이 행사가 감행한 5·18의 참사에 대한 조롱은, 인간 생명에 대한 모독일 뿐 아니라 우리 헌법에 명시된 민주주의 이념에 대한 폭거이기 때문이다. 5·18민주화운동이 지역 문제가 아닌 것은, 마산의 3·15의거가 마산 지역 문제가 아니고, 대구의 2·28의거가 대구 지역 문제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우리 헌법 전문에 명기되어 있는 4·19민주이념의 핵심을 이룬다. 마산에서 경찰의 총에 희생당한 16인의 열사들을 조롱하면 마산 지역 비하가 되나? 혐오나 비하는 자기보다 밑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반응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정신이 어떻게 비하와 혐오의 대상일 수 있나.
1960년 4월, 이승만 정권은 조직적 부정선거를 자행하고 이를 항의하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86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병원 입원자 명단 1800여명 가운데 600여명이 고등학생을 포함한 10대들이었다. 서울 사립학교의 대표자로서 배재고 학생들이 그 선봉에 있었다. 독재자를 예찬하고 민주주의의 대의를 공격한 배재고 선수들은, 배재학당 선배들의 순결한 정신과 당당한 기백을 알고 있었을까.
3.
공동생활을 하는 존재로서 인간이 지닌 윤리의 근본은 ‘입장 바꿔 생각하기’이다. 칸트가 말한 보편적 도덕 법칙도 바로 그것이고, 존 롤스가 말한 ‘무지의 베일’도 같은 원칙에 입각해 있다.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己所不欲勿施於人)’라는 것은 시간과 지역을 넘어서는 인간 사회의 준칙이다. ‘입장 바꿔 생각하기’가 되어야 정상적인 사람이다. 남의 집 문 앞에 있는 택배 상자에 손대지 않는 것은, 나도 집을 비운 채 택배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심정의 회로가 작동되지 않을 때 사회악이 생겨난다.
칸트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근본악의 원천을 셋으로 구분했다. 첫째는 나약함으로,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삿된 욕심 때문에 옳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의 차원이다. 둘째는 불순함이다. 겉으로는 옳은 일을 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자기 욕심을 채우는 표리부동의 차원이다. 셋째는 사악함이다. 옳지 않은 줄을 알면서도 내놓고 나쁜 짓을 하는 자포자기의 수준이다.
배재고 선수들의 행동은 어떤 차원인가. 운동선수들이라서 역사 지식이 없었다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다고 말하지 말자. 그것은 운동선수들에 대한 모독이다. 역사교육을 통해 이들을 교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계몽으로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만큼이나 단순하다. 이런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무지가 아니라 무지를 선택하는 마음이다. 고등학교 야구 선수들이 5·18의 의미를 몰랐다면, 무슨 뜻인지 모른 채로 율동을 하고 스타벅스 탱크데이를 외쳤다면, 그들은 ‘모르기’를 선택한 것이다. 무지를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그들 자신이 져야 한다.
4.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지른다. 그로 인해 값비싼 대가를 치르기도 하고 요행히 빠져나가기도 하며, 때로는 순간적인 선택과 실수에 뼈저린 후회를 한다. 어떤 경우든 진심으로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것은 그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그 어려운 일을 한 사람은 그만큼의 존중을 받을 것이다.
사죄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임이 강조되어야 한다. 진정한 사죄의 기본은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나오는 천하의 악당 돈조반니는 죽음에 직면하여 초월적 존재로부터 참회하기를 요구받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참회의 태도를 취하고 그 대가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천국행을 사양하는 일, 자기가 한 짓에 어울리는 곳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라고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참회에 해당한다.
민주주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핵심 기율은 구성원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 원칙이다. 진정성도 용서도, 화해도 통합도 모두 그 바탕 위에서 작동하는 가치일 뿐이다. 국가적 비극을 조롱한 배재고 야구 선수들과 당국자들에게는 자기 행동에 대한 합당한 책임의 몫이 부여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중이며, 공동체의 윤리적 기축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이 많은 선수들 자신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사면받은 정치인들이 자기 잘못의 대가를 제대로 치르지 않은 채로 좀비가 되어 돌아다니는 모습은 차마 끔찍하다. 앞날이 창창한 사람들이 벌써 좀비가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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