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기 훼손 영상, '생중계'는 처벌인데 '녹화본 게시'는 무죄인 이유
2026.07.05 14:00
보수 정당들 "일본인 애국심 높일 것" 기대
반대파 "표현의 자유 침해, 자유 국가 위기"
일본 군국주의 상징 '일장기'에 대한 거부감도
일장기에 '힘내라 일본'이라고 쓰면 괜찮고, '국기손괴죄 반대'라고 쓰면 처벌하나요?
고토 유이치 일본 중도개혁연합 의원
지난달 24일 일본 제1야당 중도개혁연합의 고토 유이치 의원의 국회 질의가 일본 사회에서 파장을 일으켰다. 여당인 자민당이 우파 야권과 함께 추진하는 '국기 훼손 처벌 법안', 약칭 '국기손괴죄' 신설을 비판하는 질의였다. 일본 대표팀을 응원하는 목적이든 정부를 비판하려는 의도든 국기를 더럽힌 건 마찬가지인데 차별을 두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다고 지적한 것이다. 게다가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이 한창인 요즘 일장기에 자국 대표팀을 응원하는 메시지를 쓸 경우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어 일본인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자국의 선전을 기원하고 애국심을 드러내려면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고 볼 수 있어서다.
그러나 자민당조차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했다. 하세가와 준지 의원은 "보통 사람을 기준으로 사회 통념에 비춰봐야 한다"며 "메시지 내용보다 행위가 이뤄진 당시 상황을 고려해 판단한다"고 답할 뿐이었다. 결국 여야 공방 끝에 응원 문구를 적는 건 처벌 대상으로 삼지 않기로 정리했다.
국기손괴죄 제정안은 자민당과 극우 성향 연립여당 일본유신회, 보수 야당인 국민민주당, 극우 정당 참정당 등 4개 정당이 공동 발의한 법안으로, '현저한 불쾌감이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방법으로 공공연하게 (국기를) 훼손·제거·오염시키는 행위를 할 경우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만 엔 이하의 벌금을 부과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법안 발의 정당이 표결 불참, 자민당도 일부는 반대
한국의 형법상 '국기훼손죄(국기·국장모독죄)'를 비롯해 국기 훼손 행위를 처벌하는 법이 존재하는 국가는 많다. 그러나 일본에선 별도의 처벌법이 없다. 타인이 소유한 국기를 훼손한 경우 '기물손괴죄'를 적용할 수 있지만 자신이 소유한 국기를 훼손했을 때는 죄를 물을 근거가 없다. 보수 정당들은 국기손괴죄 신설을 숙원 사업처럼 여겼다. 국민의 애국심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해서다. 여야가 공동 발의한 법안이라 국회 문턱은 무난하게 넘길 것으로 예상됐다. 중의원(하원) 내각위원회는 지난달 24일 법안 심의에 들어갔고, 이틀 뒤인 26일 해당 법안을 처리해 본회의로 넘겼다.
그러나 돌발 변수가 생겼다. 중의원에서 절대 다수당이 된 자민당이 여야 합의가 안 된 법안들을 힘으로 밀어붙이려 하자 야당들이 일제히 반발하며 국기손괴죄 법안 표결을 거부했다. 법안은 지난달 30일 열린 본회의에서 자민당과 일본유신회 의원들의 찬성으로 가결됐지만, 법안에 이름을 올린 국민민주당과 참정당이 불참하는 일이 벌어졌다. 민영 후지TV 계열 후지뉴스네트워크는 "법안 발의 정당들이 표결에 참여하지 않는 이례적인 상황이 발생했다"고 꼬집었다. 야당 반발에 참의원(상원) 통과 여부는 장담하기 어렵게 됐다.
자민당 안에서도 일부는 국기손괴죄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이와야 다케시 전 외무장관은 법안 표결 직전 본회의장을 떠나며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그는 "국기에 대한 존중은 자연스럽게 형성돼야지, 형벌로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도 우려를 나타냈다. 전직 총리가 정부 주요 정책·법안에 공개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낸 건 이례적이다. 기시다 전 총리는 지난달 26일 일본외신기자협회가 주최한 기자회견에서 국기손괴죄 논란에 대해 "(정부가) 계속해서 지지를 얻으려면 정치적 신념에 따라 추진해야 할 과제뿐만 아니라 국민의 생활과 밀접한 과제에도 정치적 자산을 배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논란이 큰 이념적 정책보다 민생 과제에 우선순위를 두라고 조언한 것이다.
"법안 너무 모호해" 죄형법정주의 위배 지적도
일본 사회는 정치권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국기손괴죄 반대 측이 가장 문제로 삼는 건 '표현의 자유 침해' 소지다. 국기 훼손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혐오감을 줄 수 있지만,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는 정치적 의사 표시를 봉쇄할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아사히신문은 사설을 통해 "정부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국기를 불태우는 행위는 홍콩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곳곳에서 이어져 왔다"며 "이를 형벌로 억누르려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와 사상·양심의 자유 측면에서 비춰 볼 때 정당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또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가 국가의 상징에 대한 훼손 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고 덧붙였다.
일본 문인들로 구성된 국제펜(PEN) 일본 본부인 일본펜클럽은 지난달 25일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여당이) 이견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을 실현하는 데만 필사적"이라며 "시민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강하게 제약할 가능성이 크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리노 나쓰오 회장은 "표현의 자유를 소중히 하지 않으면 이 나라가 바뀔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다"고 강조했다.
범죄와 형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해야 한다는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있다. 소노다 히사시 고난대 명예교수는 아사히에 어떠한 경우가 국기 훼손에 해당하는지 모호하다며 "사회적 정당성을 기준으로 판단하려 하지만 사람마다 해석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일본변호사연합회도 반대 성명을 발표하며 "헌법 19조가 보장하는 사상 및 양심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고, 죄형법정주의 원칙에도 위배된다"고 비판했다.
국기 훼손 녹화본 게시는 괜찮고 생중계는 처벌
논란이 커지다 보니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이런 경우도 처벌 대상이 되느냐'고 묻는 글이 쏟아졌다. 일본에는 아직 자체 급식을 하지 않는 학교가 있어 부모가 자녀의 도시락을 싸는데, 아이 도시락에 장식용 일장기를 꽂은 경우 처벌 대상이 되는지 물은 것이다. 밥·반찬과 섞여 일장기가 지저분해지고, 아이가 밥을 먹은 뒤 장식용 일장기를 아무 데나 버릴 수 있어서다. 정치권은 이에 대해선 처벌하지 않기로 했다.
정치권은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이 뜨거워지자 국기를 훼손하는 동영상을 촬영할 경우 공개 방식에 따라 처벌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예술 활동을 지나치게 위축시킬 수 있다는 지적에 나름의 보완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일장기 훼손 장면을 녹화해 추후 SNS 등에 게시하는 건 처벌하지 않지만, 훼손 행위를 생중계로 내보내면 처벌하기로 했다.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게임 안에서 국기 훼손 장면을 묘사하거나 생성형 인공지능(AI)으로 국기 훼손 영상을 제작할 경우 실제 국기를 훼손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해 처벌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갑론을박 끝에 처벌 대상은 크게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서 국기를 훼손하는 행위 △정부·지방자치단체 청사 앞에 게양된 국기를 훼손 △국기를 세게 밟거나 흙탕물 등을 묻혀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훼손 △악천후 시 도로 위에 국기를 놓아 빗물 등으로 심하게 더럽히는 행위 등으로 정리했다.
'국가 위신' 강조하며 국기손괴죄 주장한 다카이치
반대파들이 국기손괴죄를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일장기가 지닌 의미에 있다. 일장기가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과거 일본군은 침략 전쟁을 벌이고 식민지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늘 일장기를 내걸었다. 평화 활동가나 예술가들이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판하려 종종 일장기를 훼손하는 퍼포먼스를 하는 이유다.
마쓰미야 다카아키 리쓰메이칸대 특임교수는 아사히에 "일본은 침략 전쟁을 한 과거가 있어 아시아에서는 일장기를 그 상징으로 보고, 일본인 중에서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며 "일장기를 소중히 여길 수 없는 사람은 일반 국민이 아니냐"고 꼬집었다. 일본변호사연합회도 성명에서 "일본에서는 과거 일장기가 군국주의를 고취하는 수단 중 하나로 사용된 역사적 경위가 있다"며 "국기손괴죄 신설은 일본 헌법이 채택한 평화주의에 역행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국기손괴죄가 사상을 강요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법 제정을 주장해 온 대표적인 인물로, 일반 의원 시절이었던 2011년 자신의 홈페이지에 국기손괴죄가 필요하다는 칼럼을 게시했다. 그는 당시 국기를 통한 일체감과 국가의 위신 고양을 강조하며 "일본의 위신과 존엄을 상징하는 국기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보호하고 싶다"고 적었다. 자민당은 법안 논의 초반까지만 해도 법률을 통해 보호해야 할 가치로 '국가의 위신', '국민 통합'을 삼았다. 다만 논의를 진행하면서 "자칫 사상 통제로 비칠 수 있다"는 지적에 국가의 위신이라는 표현은 삭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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