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급병원 권유가 재검사 소견?”…고지의무 위반 기준 제시한 법원 [이인혁의 판례 읽기]
2026.07.05 06:04
보험은 아프기 전에 미리 가입해 놓아야 한다. 수술 등 이력이 있으면 보험료가 비쌀뿐더러 보험 가입 자체가 잘 안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보험사들이 최근 유병력자를 타깃으로 한 상품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유병자 보험에 가입했다고 해서 마냥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보험사들이 ‘고지의무’ 위반을 이유로 보험금 미지급을 결정하거나 가입 해지를 통보하는 일이 적지 않게 벌어지고 있다.
최근 유병자 보험 고지의무 관련 보험사와 가입자 사이 분쟁에서 의미 있는 판결이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동네 병원에서 단순히 상급병원 진료를 권유한 건 ‘재검사 소견’으로 볼 수 없다는 취지의 판결이다.
혈압 측정은 ‘검사’ 아니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2부(부장판사 최누림)는 유병자보험 가입자 A 씨가 B 보험사를 상대로 제기한 보험금 청구 소송에서 지난 3월 원고 승소 판결했다.
피고는 원고에게 보험금 2930만원을 지급해야 한다는 취지다. A 씨는 2020년 9월 B 보험사의 유병자 대상 간편심사보험에 가입했다. 2022년 4월 A 씨가 상세 불명의 급성 전층심근경색증 진단을 받으며 분쟁이 시작됐다.
A 씨는 병원에 입원해 관상동맥 중재술(스텐트 삽입술)을 받았다. A 씨는 수술비와 진단비 등 총 2930만원의 보험금을 청구했다. 이때만 해도 ‘보험에 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B 보험사는 2022년 5월 보험계약 해지를 통보하며 보험금 지급을 거절했다. B 보험사는 “A 씨가 보험 가입 당시 고지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B 보험사의 논리는 이랬다. 보험계약 청약 당시 ‘최근 3개월 이내 의사로부터 진찰 또는 검사를 통해 입원 필요 소견, 수술 필요 소견 또는 추가검사(재검사) 필요 소견을 받은 사실이 있습니까’란 질문사항이 있었다. A 씨는 ‘아니오’에 체크했다.
그런데 A 씨는 2020년 8월 두통 때문에 한 정형외과를 찾았다가 대학병원의 신경과 뇌혈관 검사를 권유받은 사실이 있었다. B 보험사는 이를 ‘재검사 소견’이라고 봤다. A 씨가 고지사항을 제대로 알리지 않아 보험금을 줄 수 없다는 게 B 보험사 주장이었다.
그러나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해당 정형외과에선 A 씨에 대한 별다른 검사를 실시하지 않은 채 대학병원 검사를 권유했다는 이유에서다.
재판부는 “의사가 1차 검사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급병원 진료를 권유하며 진료의뢰서를 작성해준 것이 재검사 필요 소견을 받은 경우에 해당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A 씨는 2020년 8월 다른 병원에서 자동 혈압측정기로 자가 혈압을 측정한 후 의사 소견에 따라 24시간 활동 혈압 측정을 한 적도 있었다. B 보험사는 이것 역시 재검사 소견을 받은 사례라고 봤다.
그러나 법원은 자가 혈압 측정은 환자 진찰을 위한 ‘신체 계측’에 해당해 의료급여법 및 국민건강보험법상 검사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즉 24시간 활동 혈압 측정은 재검사가 아니라 ‘최초 검사’로 봐야 한다는 게 재판부 판단이었다.
백내장 수술 이력은 중요사항?
백내장 수술 이력 고지 여부가 문제가 된 사건도 있었다. C 씨는 2024년 2월 D 보험사의 유병자 보험에 가입했다. C 씨는 보험 가입 9개월 만인 2024년 11월 만성 신부전으로 인한 인대·허리 수술을 받았다.
이후 D 보험사에 보험금 약 1000만원을 청구했다. D 보험사는 보험금을 지급하면서 보험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D 보험사는 C 씨가 2022년 9월 백내장 수술을 받은 이력을 문제 삼았다.
이들의 보험계약 청약서엔 ‘최근 2년 이내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입원이나 수술 등 의료행위를 받은 사실이 있습니까’를 묻는 말이 있었다. C 씨는 비교적 간단한 백내장 수술도 고지의무 대상에 포함되는 줄 몰랐다고 항변했다.
“보험자가 고지의무 위반을 이유로 보험계약을 해지하기 위해선 보험계약자 또는 피보험자가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고지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실이 증명돼야 한다”는 게 앞선 대법원 판례다.
재판부는 백내장 수술 이력도 고지 대상에 해당한다고 봤다. 다만 C 씨에게 고의 또는 중과실이 있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일반인인 C 씨가 백내장 수술이 ‘수술’인지 ‘시술’인지 직관적으로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결했다.
백내장 수술 시간은 한쪽 눈 기준 약 30분 이내에 불과하고 수술 이후 당일 퇴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부 안과에선 수술 대신 ‘시술’ 또는 ‘다초점렌즈 삽입술’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2부는 이에 따라 지난 1월 C 씨가 D 보험사를 상대로 낸 보험계약 존재 확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보험은 일정한 질병이 있는 유병력자도 가입이 가능하도록 설계된 상품”이라며 “피고로서는 보험 계약자에게 고지의무가 존재하는 중요한 사항인 수술이 어느 범위의 의료행위를 포함하는 것인지 여부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돋보기]
통지의무 위반, 과잉 청구…가입자 패소 판결도 줄이어
보험금 지급을 둘러싼 법적 분쟁에서 가입자의 잘못이 인정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법원 제3부(주심 오석준 대법관)는 최근 A 씨 유족이 한 보험사를 상대로 낸 보험금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A 씨는 2014년 보험계약을 맺을 당시엔 경비원으로 일했다. 이후 선박의 기관장으로 직업을 바꿨다. 2022년 A 씨가 탑승한 배가 조난되는 사고가 발생했고 A 씨는 사망했다.
보험사는 직업 변경 통지의무 위반을 이유로 보험금 미지급을 결정했다. 그러자 A 씨 유족은 불복 소송을 냈고 1심과 2심에서 승소했다.
보험사가 A 씨의 직업 변경 통지의무 위반 사실을 언제 알게 됐는지가 쟁점이었다. 상법에서 보험자는 피보험자가 통지의무를 지키지 않은 사실을 안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만 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어서다.
원심은 A 씨 유족이 보험금 청구를 6월 3일에 하는 순간 보험사는 통지의무 위반 사실을 파악했다고 봤다. 이 보험사가 1개월이 지난 7월 13일에서야 통보한 계약 해지는 무효라는 취지다. 그러나 대법원은 “유족의 보험금 청구서 접수만으론 보험사가 즉시 A 씨의 직업 변경 통지의무 위반을 알게 됐다고 볼 수 없다”며 원심을 뒤집었다.
가입자가 보험금을 과잉 청구하는 경우도 흔히 발생하는 분쟁 유형이다. 보험 약관에 없는 티눈·굳은살 제거 수술을 4년간 379차례 반복해 약 3500만원의 보험금을 받아낸 가입자 사례가 대표적이다.
법원은 주근깨나 사마귀 등 피부질환에 대해선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도록 한 조항을 근거로 티눈과 굳은살도 보험금 지급 대상이 아니라고 봤다. 이에 따라 해당 가입자에겐 보험금 일부를 반환해야 한다는 판결이 최근 확정됐다.
이인혁 한국경제 기자 twopeopl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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