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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몰빵' 투자의 그늘… 종합 제조업 강국 '코리아'는 어디로

2026.07.04 16:00

제조업 몰락으로 불황이 계속되는 여수 국가산업단지. photo 강은이 영상미디어 인턴기자


한국 경제가 그야말로 '화양연화(花樣年華)', 꽃 같은 시절을 맞고 있다. 올해 1분기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전년 동기 대비 17% 넘게 증가했다.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 고지가 눈앞이라는 장밋빛 전망도 들려온다. 인구 5000만명 이상,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이상 국가를 뜻하는 '30-50 클럽'에 이름을 올린 게 몇 년 안 됐는데, 벌써 4만달러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미국, 독일, 영국 등 세계적 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1인당 국민소득 기준으로는 일본마저 앞지른 한국 경제는 지금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17%가 넘는 성장세에서 반도체의 독주를 걷어내는 순간, 서늘한 현실이 드러난다. 1분기 반도체 생산이 14% 이상 치솟는 동안 나머지 제조업 생산은 0.2% 증가에 그쳤다. 사실상의 정체다. 자동차, 철강, 일반기계 등 주력 산업의 수출도 일제히 꺾였다. 반도체는 고용창출 효과가 낮은 산업이다. 자동차 산업이 10억원당 7.7명의 취업을 유발하는 데 비해 반도체는 2.1명에 불과하다. 수출은 사상 최대를 경신하고 있지만, 제조업 일자리는 23개월째 내리막을 걷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경제가 외발자전거를 타고 있다는 우려가 커진다.

이처럼 경제의 불균형이 심화되는 시점에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6월 29일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함께 대규모 반도체 및 관련 산업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800조원을 비롯해 전국에 총 4000조원이 넘는 투자를 추진하겠다는 내용이다. 인공지능 전환이라는 거대한 격변 속에서 과거 고도성장기처럼 정부가 기업과 손잡고 특정 지역과 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주도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 청사진에서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반도체 산업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뿐이다. 나머지는 동의하기 어렵다.

반도체 산업에 필수적인 정부 지원

반도체 산업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미세한 기술 격차만으로도 판도가 뒤집히는 냉혹한 승자독식의 무대다. 기술 우위를 유지하려면 최첨단 설비 투자가 계속돼야 한다. 공정이 미세화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투자 비용은 기업에 치명적인 부담이다. 기업만 감당할 수 없기에 세계 각국이 앞다퉈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5년간 525억달러를 투입하고 파격적인 세액공제를 내건 미국의 반도체지원법을 필두로 일본과 대만 역시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며 자국 반도체 산업을 뒷받침하고 있다.

중국의 매서운 추격을 떠올리면 정부의 지원은 생존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중국의 메모리 기술은 우리보다 한 세대 이상 뒤처져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중국 창신메모리(CXMT)의 글로벌 점유율은 단 1년 만에 3%에서 8%로 수직상승했다. 이미 최신 규격인 DDR5 양산에 돌입한 데다, 애플이 중국산 메모리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는 외신 보도까지 나오면서 시장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고 있다. 한국이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차세대 시장에서는 앞서가고 있지만, 안방이나 다름없던 범용 시장은 이미 발밑부터 흔들리고 있다. 압도적인 초격차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번 투자계획은 시기가 잘못됐다. 반도체는 호황과 불황이 격랑처럼 교차하는 경기 순환 산업이다. 대규모 재정을 동원한 투자 독려는, 시장이 얼어붙고 기업이 휘청일 때 비로소 진가를 발휘한다. 하강 국면에서 정부가 뒷짐을 지면, 단 한 번의 경쟁 패배로도 세계적 기업이 시장에서 사라질 수 있다. 독일 키몬다와 일본 엘피다의 몰락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 하이닉스 역시 과거 채권단의 손을 거치며 간신히 살아남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아도 국내 경기가 반도체 산업에 의존적인데, 수출이 정점을 찍고 물가가 상승하는 이때는 정부가 나서 투자를 독려할 때가 아니다. 연구개발 지원과 규제개선 같은 내실 다지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렇다면 지금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반도체가 아니라 경쟁력을 잃어가는 나머지 제조업들을 지원해야 한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한국과 일본, 대만을 향해 인공지능 열풍이 기존 주력산업의 쇠퇴를 가리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 거품을 걷어내면 자동차와 석유화학, 2차전지처럼 대한민국 경제의 뼈대를 이루는 산업들이 중국의 무서운 추격에 밀려 흔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차전지 시장을 보자. 한때 세계 시장을 선도하던 한국 2차전지 3사의 합산 점유율은 올해 1분기 15.6%로 주저앉은 반면, 중국 CATL 한 곳의 점유율이 우리 3사를 합친 것의 두 배를 넘어섰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 경제의 특별한 강점을 되짚어야 한다. 한국은 대만과 다르다. 대만은 반도체가 수출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국가지만, 한국은 자동차, 조선, 철강, 석유화학, 2차전지, 바이오까지 고르게 갖춘 보기 드문 종합 제조업 강국이다. 이 산업의 다변화는 대외충격을 견뎌내는 기초 체력이다. 한 산업이 흔들릴 때 다른 산업이 떠받치고, 한쪽의 불황을 다른 쪽의 호황으로 상쇄해 온 것이 한국 경제가 위기를 극복해 온 역사다. 따라서 지금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이미 시장을 주도하는 단 하나의 산업에 자원을 몰아주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나머지 주력산업을 붙들어 경제 전반의 균형을 지키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오른쪽), 최태원 SK그룹 회장(왼쪽)이 지난 6월 2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손을 맞잡고 있다. photo 뉴시스


정치의 시간표에 쫓기는 투자

정부는 반도체가 경제안보를 좌우하는 국가적 전략자산이라는 사실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반도체는 언제든 산업 무기화가 가능한 핵심 자원이자, 미·중 패권 경쟁 속 우리의 생명줄과 다름없다. 이토록 엄중한 자산일수록 그 운명을 가를 결정이 정치적 목적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물론 전략자산인 만큼 정부의 역할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어느 기업이 어디에 공장을 세울지까지 행정지도로 밀어붙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시장의 흐름을 가장 잘 아는 기업이 판단할 몫을 정치가 대신 떠맡는 순간, 전략자산의 토대는 오히려 흔들린다. 전략자산에 대한 정책 결정에는 빈틈없는 인프라 검증이 앞서야 한다. 막대한 전력과 용수가 차질 없이 공급될 수 있는지, 환경적 부담이나 지역 주민의 수용성은 확보되었는지,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의 계획은 예정지에 그만한 자원이 있는지조차 냉정하게 검증되지 않은 채, 정치적 공방만 무성하다. 가장 차분하고 정밀해야 할 판단을, 정치의 시간표에 쫓겨 가장 조급하게 내리고 있는 셈이다.

용수만 봐도 그렇다. 정부는 강에 물이 많으니 문제없다지만, 반도체 공정에 필요한 것은 강물이 아니라 '초순수(UPW)'다. 이온과 미생물까지 걷어낸, 거대한 정제시설이라야 만들어낼 수 있는 물이다. 강에 물이 많다는 것은 첫 단추일 뿐, 취수장에서 공장까지 물을 끌어오고 그것을 초순수로 바꾸며, 공정 후 폐수까지 정화하는 설비가 필요하다. 용인 클러스터조차 팔당댐에서 47㎞ 관로를 잇는 데 2조원 넘는 사업비를 투입하고, 그마저 상류 지역의 반대로 표류했다. 차질 없이 물을 공급하는 일은, 설령 강에 물이 많다 해도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해당 투자계획을 받아든 유치 지역 역시 호황의 단꿈 뒤에 숨은 불황의 필연성을 냉정하게 계산해야 한다. 지금은 누구나 탐내는 황금알이지만, 반도체 산업에서 불황은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지자체가 파격적인 지원을 약속했다가 업황이 꺾이면, 그 재정 부담은 고스란히 지역사회의 몫으로 남는다. 수십 년 공을 들여 '실리콘 작센'의 신화를 썼던 독일 드레스덴이 2009년 초 키몬다의 파산으로 순식간에 고용 절벽에 내몰렸던 일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기업의 재무구조가 아무리 탄탄해도 글로벌 업황이 꺾이면 가동률은 저하될 수밖에 없다. 지원 뒷면에 숨겨진 위험의 무게를 지자체 스스로 따져보아야 할 때다.

충분한 사회적 논의는 결여

마지막으로, 이 거대한 결정이 과연 국민의 진정한 지지와 동의를 받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기업이 천문학적 투자에 나설 수 있는 배경에는 결국 정부가 약속한 대규모 재정 지원과 세제 혜택이 깔려 있고, 그 원천은 고스란히 국민이 낸 세금이다. 전력과 용수, 기반시설 구축에 들어갈 막대한 비용 역시 납세자의 몫이다. 투자를 특정 지역에 몰아주지 않고 전국 여러 곳에 안배했다는 그 노력만으로 정당성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적 지원이 대규모로, 특히 한 산업분야에 투입되어 국민에게 두고두고 부담을 지우는 결정을, 충분한 사회적 논의와 공론화도 없이 대통령의 국민보고회 한 번으로 단숨에 확정할 수는 없다.

지난 20여년간 한국 경제는 남의 길을 베끼던 추격국가에서 적어도 몇몇 영역에서는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여는 선도국가로 올라섰다. 과거 고도성장기에는 정부가 앞장서고 기업이 한 몸처럼 따르는 공식이 통했을지 모른다. 길이 이미 정해져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앞선 발자국이 없는 최전선에 선 지금, 정부가 할 일은 기업이 가야 할 길을 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정치가 기업의 결정마저 대신하려 드는 일방적 개입은, 기업의 자율성을 훼손하고 결국은 코리아디스카운트를 키우는 걸림돌이 될 뿐이다.

1993년 월드뱅크는 '동아시아의 기적' 보고서에서 한국을 비롯한 이른바 '네 마리 호랑이'의 놀라운 성장을 분석했다. 탄탄한 기본기 위에 제한적이고 선택적인 정부 개입이 더해져 기적이 빚어졌다고 보았다. 그러자 이듬해인 1994년 폴 크루그먼은 '아시아 기적의 신화'에서 생산성 향상 없이 노동과 자본을 쏟아부어 이뤄낸 동아시아의 성장은 결국 신화로 끝나리라고 일갈했다. 3년 뒤 외환위기가 한국을 덮쳤을 때 그의 예언은 적중한 듯 보였다. 그러나 21세기의 한국은 혁신적 첨단산업을 발판으로 다시 일어섰고, 기적은 끝내 실제가 됐다.

빗나갔던 크루그먼의 예언이 뒤늦게 들어맞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선도국가 한국에서 정부가 할 일은 분명하다. 기업이 할 일은 기업에 맡기고, 정부는 정부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투자계획은 산업정책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위험한 시도다. 가장 잘나가는 대기업을 호황의 정점에서 정치가 정한 자리로 떠미는 결정은, 기업의 자율과 혁신을 해쳐 한국 경제성장의 공식을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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