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다시 전쟁이 나더라도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
2026.07.04 17:11
인터뷰를 위해 만난 조기동 참전용사는 스물세 살의 나이에 백마부대 제29연대 제1대대 제4중대 제1소대 무전병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정글 한가운데에서 생과 사의 경계를 오가며 17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버텨낸 그는,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당시의 기억을 또렷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단순한 전쟁의 기록이 아니었다. 함께 웃고 생활했던 전우를 떠나보낸 아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작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 순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던 시간들, 그리고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이 오늘날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에 대한 현실까지. 조기동 참전용사의 삶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전쟁의 승패가 아니라, 한 사람의 청춘이 감당해야 했던 희생의 무게였다.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져만 가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지난 2일 서울시에 위치한 보훈회관을 방문해 이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들어보았다.
| ▲ 조기동 참전용사 |
| ⓒ 류채린 |
- 성함과 현재 나이 그리고 참전하셨을 때 소속하신 부대 이름과 나이를 말씀해주세요.
"이름은 조기동이고 현재 나이는 82세입니다. 그리고 월남전에 참전했을 때 소속한 부대는 9사단 백마부대 29연대 1대대 4중대 1소대 소속이었으며 무전병으로 복무했고, 당시 참전했을 때 나이는 23살이었습니다."
- 참전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1968년에 김신조 사건이 터졌을 때 우리 부대가 의정부 노고산 일대에서 대간첩 작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눈이 1m 넘게 쌓인 겨울에 개인호를 파고 장기간 경계 근무를 했죠. 그러다가 부대로 복귀해서 진지를 만들던 중, 중대본부 행정병이 혼잣말로 '베트남이나 갈까'라고 한마디했는데, 그 말을 듣고 제 이름까지 함께 지원자로 올라가게 됐습니다.
그렇게 월남 파병이 결정됐고, 화천 오음리에서 한 달 동안 훈련을 받은 뒤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13박 14일 동안 항해해서 베트남으로 갔습니다. 가족들에게도 미리 말하지 못했고, 청량리역에서 형과 형수가 배웅을 나와 눈물로 인사했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나의 생사에 달린 소대의 목숨과 통신
- 처음 베트남에 도착했을 때 어떤 심정이었나요?
"나트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죽기 아니면 살기다'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살아남으려면 누구보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무전병이었기 때문에 제가 죽으면 소대와 중대의 통신이 끊길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책임감을 가지고 움직였고, 전쟁에서는 용기보다도 상황을 빨리 판단하고 살아남는 요령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몸으로 배웠습니다."
- 베트남 전쟁에서 어떤 임무를 수행하셨나요?
"처음에는 분대장으로 배치됐지만 나중에 무전병을 맡게 됐습니다. 당시에는 베트공이 소대장과 무전병을 가장 먼저 노린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위험한 보직이었습니다. 그래도 무전병은 소대장 바로 뒤에서 이동하면서 상급부대와 계속 통신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제가 죽으면 통신이 두절돼 부대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항상 긴장하며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베트남전은 전선이 따로 있는 전쟁이 아니라 정글을 수색하다가 적을 만나면 바로 전투가 벌어지는 게릴라전이 대부분이었습니다."
- 경험하셨던 전장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전장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디에서 적이 나타날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정글 속을 수색하며 이동하다가 우연히 베트콩을 만나면 바로 교전이 시작됐습니다. 사단 규모의 작전이 시작되면 한 달 가까이 산속에서 생활하면서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전투도 힘들었지만 더운 날씨와 피로, 질병도 큰 적이었습니다. 저도 작전 중 심한 배탈이 나서 후송된 적이 있었는데, 전쟁터에서는 총알뿐 아니라 환경 자체가 병사들을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작전 및 전투는 무엇이었나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작전은 박쥐 4호 작전입니다. 그때 가장 친하게 지냈던 안모 상병이 전사했습니다. 원래 안모 상병은 그림을 잘 그려서 대민지원 업무를 주로 했기 때문에 작전에 나갈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에게 '병장님, 저도 베트남에 왔는데 작전 한 번은 나가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서 제가 소대장과 중대장에게 이야기해 함께 작전에 나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무렵 심한 배탈이 나서 후송을 가게 됐고, 안모 상병은 저 대신 작전에 참여했습니다. 이틀 정도 지나 중대본부에서 전화가 와서 안모 상병의 짐을 챙기라고 하더군요. 군에서는 그런 연락이 오면 중상을 입었거나 전사했다는 뜻입니다. 결국 안모 상병은 박쥐 4호 작전 중 적의 기습 공격을 받아 전사했습니다.
그 친구는 저를 친형처럼 잘 따르던 전우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유품을 정리하는 일이 너무 힘들었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전쟁에서는 한순간의 선택과 우연이 생사를 갈랐습니다. 제가 후송되지 않았다면 제가 그 자리에 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금도 가끔 합니다. 그래서 박쥐 4호 작전은 제게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전쟁이 남긴 평생의 상처
| ▲ 전쟁기념관 속 백마부대 설명 |
| ⓒ 류채린 |
- 전쟁 중에 가슴 아프신 일이나 비극적인 일을 경험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전쟁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함께 생활하던 전우를 잃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저와 가까웠던 안모 상병이 박쥐 4호 작전 중 전사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 함께 생활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전사 소식을 듣고 그의 관물을 정리해야 했는데, 차마 손이 가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전쟁에서는 언제 누구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그때 절실히 느꼈습니다. 살아서 귀국한 것이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지금도 들고, 함께 싸웠던 전우들을 생각하면 늘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때 희생된 전우들의 얼굴과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전쟁은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도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 베트남 전쟁에서 고엽제가 많이 사용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월남전에서 고엽제는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고엽제에 대한 신체적 위험성에 대해 당시 아셨을까요?
"저는 고엽제에 대해서 최근에서야 알았어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들이 호스나 비행기에 고엽제를 가득 실어서 공중에 살포해 나무와 풀들을 죽이는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즉, 제초제 용도로 사용한 것이죠. 근데 이 고엽제라는 게 몸에 유해하다는 걸 당시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지정한 1급 발암물질이라고 하더라고요.
고엽제를 사람이 맞으면 비호지킨림프종, 연조직육종, 호지킨병, 폐암, 후두암, 기관암, 다발성골수종, 전립선암, 당뇨병, 파킨슨병, 허혈성심장질환, 말초신경병 등 각종 암과 신경계 질환, 피부질환, 심혈관계 질환, 대사질환을 일으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고엽제가 사람의 DNA를 변이시켜서, 2세까지도 영향을 끼쳐 선천적으로 눈이 없거나 소아병을 가지는 등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비극적인 무기입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당시 굉장히 덥고 물이 귀했습니다. 반면, 고엽제는 물의 온도가 차가웠습니다. 그래서 탈수 증상을 막기 위해 고엽제로 세수를 하거나, 샤워 물처럼 사용하는 걸 종종 목격했습니다. 저는 고엽제 피해자는 아니지만, 만약 고엽제에 대한 위험을 알았다면 누구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 국가 차원에서 월남전 참전유공자에 대해 어떤 복지가 이루어지고 있고, 개선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있을까요?
"작년에는 국가에서 참전유공자 수당으로 월 45만 원 정도 줬었는데, 금년에는 수당이 4만 원 인상돼서 월 49만 원가량을 받고 있습니다. 추가로 제가 거주하고 있는 노원구에서도 금년부터 참전유공자들을 대상으로 월 3만 원씩 지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훈병원이나 지역 지정 위탁병원에서 진료 볼 때 병원비도 90% 정도 감면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바라는 건 유가족분들에 대한 혜택입니다. 현재 참전유공자 유가족 분들에 대한 혜택은 없는 상황입니다. 유가족 분들은 저희처럼 보훈병원이나 지정 위탁병원에 대한 지원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아프면 병원에 갈 수 있도록 저희가 구에서 지원받는 3만 원을 유가족 분들에게 양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 전투 병력 지원국으로 참전한 국가는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호주, 필리핀, 태국 등이 있습니다. 한국을 제외한 각 국가에서 참전유공자에 대해 지원해 주는 수당은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은 참전유공자에 대해 국가에서 지원해 주는 수당이 450만 원, 호주는 250만 원, 필리핀은 50만 원, 태국은 42만 원 정도 됩니다. 한국은 선진국임에도 불구하고 개발도상국인 필리핀보다 적은 지원금을 주고 있는 것이 현재 한국의 상황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월남전 참전유공자 분들이 수많은 희생을 통해 벌어온 달러로 이만큼 국가가 발전했으면, 저희에게도 합당한 수당적 대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래 세대에게 전하는 메시지
| ▲ 전쟁기념관 속 백마부대 설명 |
| ⓒ 류채린 |
- 전쟁을 경험하신 세대로서 앞으로 미래세대에게 해주고 싶으신 말씀과 어떤 분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안보 부분에 대해서 얘기해 주고 싶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6.25 한국전쟁을 경험했고, 23살에 베트남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북한과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이고, 아직도 군사적 긴장감으로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전쟁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저희 나라도 언제든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말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 청년들은 군대를 기피하거나 부정적으로 보고, 군 복무를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것을 보면 많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군 복무를 36개월을 했고, 베트남 전쟁 때 17개월 동안 무전병으로 복무했습니다. 현재 의무 복무가 18개월인 것에 비해 굉장히 길게 했고, 베트남 전쟁에서 죽을 고비도 수없이 넘겼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군대에서 복무한 것을 늘 자랑스럽게 여겼고, 국가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애국심을 단 한 번이라도 잃은 적이 없습니다. 만약 대한민국에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저는 82세의 노병이지만 총 들고 싸울 겁니다. 이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참전용사들도 똑같이 말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에게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애국심을 꼭 가져 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저를 비롯한 수많은 참전용사들이 지켜낸 자유를 꼭 가슴속에 새기고 이를 누리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저희가 자유를 지켜낸 것처럼 젊은 세대들도 자유를 지키고, 그 자유를 후대에게 물려줬으면 좋겠습니다."
8년 8개월이라는 긴 세월 동안 베트남 전쟁에 파병 간 한국군은 총 32만 5517명에 달한다. 그중 5099명은 끝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무더운 정글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1만 1232명은 전쟁으로 인해 몸에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긴 채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14만 명에 이르는 고엽제 피해자들은 평생 고엽제라는 또 다른 적과 싸워야 했다. 숫자로만 남은 이 통계 뒤에는, 저마다 다른 이름과 얼굴을 가진 개개인의 청춘이 있었다.
17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정글을 누비며 생사의 갈림길을 수도 없이 넘었던 조기동 참전용사는 인터뷰의 마지막까지도 "지금 다시 전쟁이 나더라도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는 말을 망설임 없이 꺼냈다. 여든이 넘은 지금도 변하지 않은 그의 애국심은 오히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으며, 그 희생에 걸맞은 예우를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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