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에 中 편입시켜 민주주의 수출"… 美의 헛된 기대였다
2026.07.03 17:01
금융위기·브렉시트·코로나
부작용 드러내며 한계 봉착
中, 미국에 저가제품 수출해
美 240만개 일자리 사라져
결국 트럼프 등장해 마침표
자카르타의 참혹한 시위 현장에서 이 책은 시작된다. 1998년 5월, 그곳의 거리엔 "검게 그을리고 부어오른 타일 바닥 위의 시체들"이 놓여 있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부도를 막고자 430억달러를 빌렸고, 그 대가로 국제통화기금(IMF) 요구를 수용했다. 이 과정에서 식료품, 연료, 교통 및 전기요금이 폭등하자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거리는 불탔고, 시민 삶은 망가졌다.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당시 현장을 취재 중이던 저널리스트인 저자에게, 이 모습은 단지 한 나라의 금융위기가 빚어낸 참극이 아니었다. 세계화의 부작용이 본격화되는 서막이었다.
데이비드 J 린치 지음, 이혜진 옮김
21세기북스 펴냄, 4만5000원
워싱턴포스트 글로벌 경제전문기자의 신간 '세계화는 어떻게 실패했는가'가 한국에 번역 출간됐다. 냉전이 끝나고 본격화된 세계화가 '국내의 번영'과 '국외의 평화'란 일거양득의 약속을 폐기하고, 결국 도널드 트럼프의 두 차례 당선으로 약 30년 만에 완전한 종언을 고했음을 분석하는 날카로운 책이다. 1997년 G8 정상회의를 앞두고, 빌 클린턴은 표정이 좋았다. 성장률 연 7%, 실업률은 24년 만에 최저였고 월스트리트는 3년 연속 연 20%가 넘는 수익을 거두는 중이었다. 덴버에서 열린 G8 회의엔 러시아의 참여가 예정돼 있었다. 세상은 기대에 들떴다. 서방 주도의 시장경제, 그리고 민주주의에 러시아가 편입되리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를 끌어안는다면 '세계화의 승리'나 다름없었다.
다음 국가는 중국이었다. 중국을 하나의 규칙 아래 통합하면 모두가 부유해지리라고, 중국으로의 민주주의 수출도 가능하다고 봤다.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은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중국 정부로서는 정부가 개인의 부를 합법화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 역사는 기대와 달리 흘러갔다.
공산주의 중국과 탈(脫)공산주의 러시아의 정치체제에선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되레 수입이 쇄도했고 미국 제조업은 도미노처럼 하나하나 쓰러져 갔다. 중국은 꾸준하게 부유해지고 있는 소비자로 가득한 거대한 나라가 아니라 미국 시장으로 중국 제품을 쏟아내는, 게다가 넉넉한 정부 보조금까지 등에 업은 나라였다. 미국 중서부 공업지대의 240만개 제조업 일자리가 날아갔다.
"세계화는 미국의 도박이었다. 제약 없는 세계화에 착수하면 국내에서 광범위한 번영을 누리고 해외에선 정치 자유화가 촉진될 것이라던 믿음은 부서졌다."
세계화의 몰락은 2009년 금융위기, 2016년 브렉시트에서 가시화됐다. 코로나19는 공급망의 붕괴를 여지없이 노출했다.
저자는 이후 세계화가 막다른 지점에 다다랐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가 트럼프의 당선이라고 본다. 그의 당선 이후 2017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폐기 등 미국 우선주의가 본격화돼서다. 미·중 무역전쟁과 관세전쟁은 지난 30년의 경제가 이룩한 세계화에 마침표를 찍었다.
대선 초기만 해도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을 이길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트럼프는 미국이 세계와 관계를 맺어온 방식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를 역이용했다. 그는 미국 엘리트들이 시스템을 조작해 수백만 명의 노동자에게 빈곤과 골칫거리만 남겨줬다고 부르짖었다. 중국의 WTO 가입은 역사상 가장 많은 일자리를 앗아갔으며, 외세가 미국인을 궁핍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이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역시 세계화가 막다른 길에 다다랐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세계화는 러시아에 민주주의를 수출하지 못했고 세계 경제 편입 후에도 제국적 야심을 버리지 않았음을 전쟁으로서 보여줬기 때문이다. 저자는 세계화가 단지 실패한 경제정책이 아니라 정치적 상상력의 실패라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미래는 어떨까. 저자는 미국이 지금도 도박을 걸고 있다고 쓴다. "중국 공장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생산 비용 상승을 무릅쓰고 공급망이 재구축되고 있다. 인공지능의 부상과 저탄소 경제로의 전환으로 노동시장엔 격변이 다가오지만, 미국 사회 안전망은 어느 때보다 부실하다. 이 전환에서 밀려날 노동자들이 포퓰리스트 지지자로 돌아설 가능성이 크다."
저자는 이어 오늘날의 시대를 초세계화, 선택적 세계화로 부르기도 한다. "세계화가 승자와 패자를 만들었듯이, 이 경제민족주의의 새 시대에도 승자와 패자가 생길 것이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세계는 더 이상 평평하지 않다."
책의 에필로그는 서늘하다 못해 섬뜩한 느낌까지 준다. 저자는 빌 클린턴의 2024년 인터뷰를 가져온다. 세계화의 토대를 만든 미국인, 8년간 300개의 무역협정을 체결했던 그는 세계화를 묻는 질문에 자신이 예상했던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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