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비’가 쏟아진다면… 배고픈 기억이 빚어낸 구원의 서사
2026.07.04 03:02
북한의 한적한 마을 하늘에서 난데없이 노란 옥수수 알갱이와 알약, 그리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비처럼 쏟아진다. 현실에선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이 풍경은 탈북민 출신 이지혜(31) 작가가 그린 환상이자 바람이다.
귀여운 그림체에 발걸음을 멈춘 관람객들은 처음엔 미소를 짓지만 작품 속 진실을 알게 된 순간 깊은 탄식을 내뱉는다. 탈북 8년 차인 이 작가는 지난달 25일 서울 마포구 극동방송 극동갤러리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북한에서 경험한 결핍의 기억이 만들어낸 풍요의 환상을 ‘구원의 서사’로 풀어냈다”며 “내 작품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굶주림과 결핍 속에 살아가는 이들과 보이지 않는 연대”라고 말했다.
북한에 옥수수 비 내렸으면…
이 작가는 “‘비 시리즈’는 북한에서 배고파 우는 나를 보며 ‘하늘에서 돈이라도 떨어지면 좋겠다’고 달래주시던 할머니와의 추억에서 시작됐다”며 “‘옥수수 비가 내리면 좋겠다’고 상상하며 허기를 견디곤 했다”고 회상했다. 탈북한 뒤에는 일상에서 넘쳐나는 음식에 감사하면서도 그 시절의 결핍을 잊지 않기 위해 작품을 그리고 있다.
그의 고향은 평안남도 개천이다. 북한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1995년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과거를 ‘배고픔’이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이 작가는 “기억이 자리 잡기 시작한 여섯 살 무렵부터 늘 배가 고팠다”며 “배고픔이 가장 무섭고 견디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어머니 손을 잡고 나간 장마당에서는 아이들과 노인들이 길가에 쓰러진 모습을 수없이 목격했다. 생존을 이어갈 힘조차 없던 이들의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그는 그때 “‘굶으면 정말 죽을 수 있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생존이 우선이었다. 아홉 살 무렵부터 그는 학교 대신 동네 언니들을 따라 집 앞 플라스틱 공장 쓰레기장으로 향했다. 쓸 만한 플라스틱 자재를 주워 씻어 팔면 그나마 옥수수를 살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지만 북한에서 예술은 사치였다. 그는 부모님의 얼굴이라도 그려 집에 걸어두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니는 “그림이 밥 먹여주냐”며 타박하곤 했다.
이 작가는 “집안의 장녀로 치열한 생존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며 “국수와 마늘, 생선, 복숭아씨, 옷까지 닥치는 대로 팔며 ‘내가 무너지면 동생들이 굶는다’는 절박함으로 살아냈다”고 했다.
라디오서 찾아낸 ‘자유’ 그리고 탈북
그의 삶을 바꾼 것은 아버지가 중국에서 몰래 들여온 작은 라디오였다. 서해에서 배를 타던 아버지가 날씨를 확인하려고 가져온 라디오의 주파수를 돌리다 우연히 ‘국민통일방송’과 ‘제주 극동방송’을 듣게 됐다. 탈북민들이 전하는 남한의 삶은 북한과 전혀 달랐다. 모두가 평등하게 공부하고 쌀밥을 배불리 먹는다는 이야기는 어린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마음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라디오에서 계속 ‘기도하라, 부르짖으라’는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면 구원하겠다고 하니 못 할 게 없었지요. 기도하는 방법을 몰라 하나님께 그냥 소원을 말하듯 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스무날에 한 번씩 소원을 빌다 보니 어느새 하나님께 말을 걸게 됐고 ‘굶어 죽지 않고 쌀밥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곳으로 가게 해달라’는 간절한 바람을 눈물로 구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아버지가 어렵게 배를 마련하며 형편이 나아지는 듯했다. 그러나 당국의 재산 몰수로 가족은 다시 절망에 빠졌다. 그의 아버지는 보위부에 끌려가 고문까지 당했고, 그 사건은 북한 체제의 한계를 절감하게 했다. 결국 아버지는 남한 방송에서 들은 탈북민의 전화번호를 적어둔 뒤 ‘정말 자유가 있는지 확인하고 오겠다’며 홀로 국경을 넘었다.
3년 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와 연락이 닿았고 가족은 함께 국경을 넘었다. 그러나 브로커의 배신으로 어머니와 작은동생은 북송됐고 아버지는 중국 공안에 붙잡혔다. 홀로 남겨진 이 작가는 동생의 손을 꼭 붙잡고 라오스를 거쳐 2018년 12월 31일, 매서운 겨울 끝에 마침내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풍요 속 찾은 새로운 소명
처음 마주한 남한의 풍경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거리를 가득 메운 자동차 행렬, 한겨울에도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 여성들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무엇보다 그를 압도한 것은 풍요였다.
이 작가는 “매 끼니 하얀 쌀밥이 나왔고 북한에서는 구하기 힘들어 옥수수 잎으로 대신하던 휴지와 일회용 생리대가 넉넉하게 지급됐다”고 기억했다. 그 풍족함이 언제 사라질지 몰라 불안했던 그는 탈북민 정착지원 기관인 하나원을 퇴소하던 날, 남은 휴지를 가방에 몽땅 챙겨 넣었다.
사회로 나온 뒤 그가 처음 선택한 길은 사회복지사였다. 거리의 노숙인을 보며 북한에서 굶어 죽어가던 고향 사람들이 떠올랐고 남한에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려고 자격증을 취득했다. 복지사로 일하던 중 통일 워크숍에서 대한민국 1호 탈북민 웹툰 작가 최성국을 만난 일은 또 다른 전환점이 됐다.
“북한의 현실을 말로 전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최 작가의 그림에 사람들이 공감하는 모습을 보며 그림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북한의 현실을 알리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 묻어뒀던 그림에 대한 열망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탈북 작가 도움으로 홍대 합격
최 작가를 비롯한 주변의 도움으로 1년간 치열하게 노력한 끝에 그는 2021년 서울 홍익대 미대 회화과에 합격했다. 그러나 대학 생활은 또 다른 도전의 연속이었다. 전국에서 모인 뛰어난 미술 인재들 사이에서 스스로가 너무 작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압박감 속에서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전공 수업을 녹음해서 이해될 때까지 반복해서 들었다”며 “아르바이트를 줄이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버텨내야 했던 시간과 교수님들의 세심한 지도 덕분에 한계를 넘어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 노력의 결실은 극동갤러리에서 3일까지 열린 개인전 ‘인민의 소원’에 담겨있다. 현실과 환상이 어우러진 그의 작품은 북한의 불편하고 어두운 진실들을 무겁지 않게 풀어내며 관람객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작품 ‘아이스크림 비’에는 전기 부족으로 한여름에도 차가운 물조차 마시기 어려운 북한 주민들에게 시원함을 전하고픈 마음이 담겼다. ‘알약 비’에는 한국에서 남는 약이라도 북한에 내려 아이들이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이, ‘라면 비’에는 배고픔 없는 삶에 대한 염원이 녹아 있다. 작품들은 우리가 무심히 누리는 일상과 자유의 소중함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화폭에 그리움, 자유 담아…
모든 역경을 견디게 한 힘은 신앙이었다. 이 작가는 “한국에 와서 굶지 않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그런 그에게 지난해 또 하나의 기적이 찾아왔다. 탈북 과정에서 중국 공안에 체포됐던 아버지가 7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북한에 남겨진 어머니와 동생을 향한 그리움은 깊다. 이 작가는 그 슬픔과 기억을 캔버스에 담아 자유 없는 북한의 현실을 세상에 전하고 있다. 그는 “배고픔이 사라진 자리에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자유를 얻은 자리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남았다”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문화가 총과 미사일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북한 주민들이 마음껏 예배하는 날이 오길 기도한다”고 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자신을 이끄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앞으로도 그림을 통해 희망과 자유의 메시지를 세상에 흘려보내고 싶다는 다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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