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간 전
RM도 사랑한 서승원, 기하학의 세계를 그림에 펼치다
2026.07.04 00:38
예술가와 친구들
1948년 창천국민학교에 입학했다. 3학년 때 6·25 전쟁이 터졌다. 가족들은 피난을 가지 않고 몇 달을 대현동에서 버텼다. 불심이 깊었던 조부 서용인은 봉원사의 불구들을 집으로 가져와 다 숨겼다. 서울이 수복되었는가 했더니 곧이어 1·4 후퇴가 벌어졌다. 이번에는 피난을 갔다. 할머니·어머니, 두 명의 고모, 서승원과 그의 형, 조카 등 일곱 명이 피난을 나섰다. 할아버지가 5원짜리 지폐를 꼬깃꼬깃 접어 서승원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당시 판화, 최첨단 미디어아트에 비견
일행은 리어카에 짐을 가득 싣고 남쪽으로 향했다. 폭격에 놀라 흩어지지 않으려 아이들은 줄을 몸에 감고 리어카에 연결했다. 허기가 지면 재봉틀을 쌀과 바꾸었다. 추운 겨울, 다리 밑에 이불을 깔고 어설픈 잠을 잤다. 충북 진천까지 내려갔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집에 숨겼던 불구들은 봉원사로 돌아갔다. 부처님의 가피(加被)일까, 서씨 일족은 전쟁 중에 한 사람도 화를 입지 않았다.
마당에 우물이 있었는데, 몇 달 쓰지 않았더니 물이 말랐다. 연세대 안에는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묘가 있었다. 능지기 집 앞의 우물이 물이 좋았다. 소년 서승원은 물지게를 지고 집에서 이대 정문과 신촌 기차역을 지나 지금의 연세암병원으로 향하는 백양로 길을 오갔다.
고교생 서승원은 그림 잘 그리는 학생으로 장안에서 유명했다. 미술 교사인 판화가 이상욱(1923~1988)으로부터 목판화와 리놀륨 판화를 배웠다. 판화와의 질긴 인연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1960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회화과에 입학했다. 입학한 지 한 달 조금 지나 4·19가 일어났다. 세상을 개혁하려는 ‘스튜던트 파워’가 대단하였다.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새로운 미술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 고민은 몇 년 후 미술그룹 오리진과 AG의 창립으로 실천되었다.
서승원은 부농 출신이었기에 넉넉한 삶이었다. 그러함에도 개인 미술 지도, 만화 제작 그리고 봉원사의 단청 보수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 학비에 보태고 미술 재료를 샀다. 어릴 때부터 대현동 집에 걸려 있던 가훈 ‘평범, 성실, 자립’의 실행이었다.
1964년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육군에 입대했다. 전북 익산의 제2하사관학교에 배치되었다. 미대 출신답게 군부대의 환경 정리에 노력했다. 내무반마다 스피커를 설치하여 마이크로 한꺼번에 명령이 전달되도록 했다. 오픈 릴 녹음기를 구해다가 라디오 음악 방송을 녹음한 다음, 부대원들이 취침하기 전에 틀어주었다. 학창 시절 캠퍼스 커플 이정혜와 함께 종로1가의 르네상스 음악감상실을 드나들면서 익힌 감각이 발휘되었다. 서울예고 출신으로 홍대 회화과 동기인 이정혜는 부모님의 결혼 반대를 피해 강원도 거진중학교 미술 교사로 가 있었다. 1967년, 서승원은 육군 하사로 제대했다. 1968년, 두 사람은 은사인 화가 이마동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1967년, 서승원은 판화가 배륭(1928~1992)을 찾아갔다. 배륭은 미국문화원 안의 공보원 디자인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실크스크린 제작을 위한 최고의 장비들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1968년, 서승원·최명영·이승조 등의 ‘오리진’, 문복철·석란희·이태현 등의 ‘무동인’, 강국진·심선희·정강자·정찬승 등의 ‘신전동인’, 이 셋이 합쳐서 ‘한국 청년작가 연립전’이 열렸다. 그해 서승원·이상욱·유강렬·윤명로·김상유·강환선·배륭·김봉태 등이 모여 한국현대판화가협회를 창립했다. 당시 판화라는 매체는 요즘으로 치자면 최첨단 미디어아트에 비견되는 현대미술이었다.
1970년에는 평론가 이일·오광수·김인환 그리고 미술작가 서승원·최명영·이승조·하종현·심문섭·김구림·김한·신학철·이승택·박석원·이건용·송번수·이강소 등이 모여서 한국아방가르드(AG)협회를 창립하고 국립공보관에서 ‘현상과 환원의 역학’전을 열었다. 이 무렵 서승원은 오늘날까지 작품명이 이어지고 있는 ‘동시성’이라는 기하학적인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72년, 이화여대 입구에서 도일(渡日) 축하파티를 연 서승원은 동경으로 가서 무라마쓰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동경행에는 박서보가 동행했다. 오프닝이 되자 동경화랑 대표 야마모토 다카시(山本孝, 1920~1988), 미술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 1931~2011), 미술작가 다카마쓰 지로(高松次郎, 1936~1998)가 참석했다. 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교류를 다졌다. 박서보와 함께 야마모토의 자택을 방문하기도 했다. 서승원은 교토, 오사카 그리고 오하라(大原)미술관이 있는 구라시키까지 여행했다. 한 달 동안 일본에 머물렀다.
홍대 교수로 바쁜 삶, 별명이 ‘나는 화살’
이듬해인 1973년 동경화랑의 야마모토와 평론가 나카하라가 서울을 방문했다. 당시 100호짜리 캔버스를 짜려면 폭이 좁은 캔버스 두 장을 이어 붙여야만 했다. 서승원의 작업실을 본 야마모토는 서승원에게 미술 재료를 지원해줄 것을 약속했다. 이윽고 쿠사카베 유화물감과 100호 이상의 캔버스를 짤 수 있는 광폭의 일제 롤 캔버스가 서울에 도착했다. 이런 일들이 이어져서 드디어 1975년 동경화랑에서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이 열렸다. 박서보·권영우·서승원·허황·이동엽이 참여했다. 이 전시가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회자되는 건, 오늘날 단색화로 불리는 미술 흐름의 시작을 열어주고 확인하는 큰 전시였기 때문이다.
1972년 인덕예술공과전문학교가 세워졌다. 김혜란 학장은 한국의 미래는 디자인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스승인 김원이 서승원을 추천했다. 2년을 근무했다. 1974년, 서승원은 홍익대 미대 교수로 부임했다. 학생들이 붙인 그의 별명은 ‘나는 화살’. 동분서주 바쁜 삶이었다.
서승원은 한국 작가로는 드물게 기하학적 구조의 미술을 일찍 시작했다. 서승원이 전시를 열면 방탄소년단 리더인 RM이 가장 먼저 찾을 정도로 세련된 감각을 자랑한다. 기하학은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일어나는 공시성(共時性)의 세계관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기하학은 순간이 곧 영원인 세계다. 찰나가 곧 겁(劫)이 되는 세계다. 찰나를 놓치지 않는 바쁜 삶에서 서승원의 그림은 겁의 아득함을 그리워한다. 요즘 와서는 순간과 영원, 찰나와 겁의 경계가 무너진 ‘동시성’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사바세계(娑婆世界)가 시방세계(十方世界)로 아득해진 노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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