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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보다 경험이 되는 시간 [권지예의 이심전심]

2026.07.04 00:11

체험은 감각 통해 스쳐가지만
경험은 성찰로 삶의 변화 유도

권지예 소설가
35년 전에 남편과 유학 갈 때 이민 가방에 1호 필수품인 전기밥솥과 전기담요, 목침만 한 프랑스어사전, 고춧가루 봉지 같은 생필품 틈에 카세트테이프를 사서 몇 개 넣었다. 타국에서 한국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금쪽같은 카세트테이프는 값싼 와인과 함께 향수병에 특효약이었지만, 몇 년 지나자 안타깝게도 테이프가 늘어져 조용필, 이문세의 목소리는 저음의 협박범 같은 음성으로 변하고 말았다. 요즘처럼 큰돈 들이지 않고 또는 공짜로 세상 모든 장르의 음악을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시대를 그때는 상상도 못 했다.

이런 시대에 지인의 초청으로 오랜만에 예술의전당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을 관람했다. 등이 굽은 노 지휘자의 손끝을 따라 수십 명의 연주자가 정교하게 음을 맞추고, 객석 가득 숨소리마저 멎는 침묵과 마지막 음이 끝난 뒤 터져 나온 폭죽 같은 환호. 아, 이거지! 이게 진짜 음악이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오랜만에 짧은 전율 뒤에 이 순간이 오래 기억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우리 세대에게 문화나 예술은 감상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다양하게 소비하고 즐긴다. 유행처럼 번진 러닝크루 열풍과 직접 향수나 공예품을 제작하는 체험, 관객이 떼창을 하는 공연 등 체험 이벤트에 직접 참여한다. 그 체험을 빠짐없이 인증샷을 찍어 SNS에 올린다. 그런데 누구를 위한 인증인가. 수많은 체험의 기록 사진이 SNS에 있지만, 기억에 각인돼 삶의 의미 있는 경험으로 뿌리내린 건 얼마나 될까.

체험과 경험은 무엇이 다를까. 체험은 주로 감각을 통해 순간적으로 인지하고 참여하는 활동이고, 경험은 체험을 넘어 장기적인 기억으로 자리 잡고 내면화해 삶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수많은 인증샷을 기록으로 남긴 체험이 의미 있는 경험이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할 것 같다. 시간과 성찰과 감정. 짧지만 인상적인 체험의 이벤트가 성찰하고 생각하는 발효의 시간을 거쳐 내 감정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삶에 영향이나 변화를 준다면 진정한 경험이지 않을까.

나 또한 그동안 다녀온 여러 여행지의 기록 사진은 많지만,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진보다 먼저 떠오르는 기억 속 장면이 있다. 그리스 수니온곶에 있는 포세이돈신전. 내가 만난 포세이돈신전은 아주 한적한 바닷가 붉은 노을 속에 돌기둥만 성성하게 남아 있는 폐허였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나는 한 시간을 돌기둥에 기대어 타임슬립 속 주인공이 된 듯 기원전 그리스신화와 현재의 내 삶을 관통하는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또 하나는 인도양의 하늘. 몇몇 작가와 함께 유조선을 타고 아라비아해까지 항해한 적이 있다. 저녁 무렵 갑판을 걷는데 서쪽으로는 해가 지고 동쪽으로는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눈앞의 한 하늘에 해와 달이 함께 걸려 있다니! 카메라 한 화면으로는 양쪽의 해와 달을 담을 수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우주의 비의(秘儀)를 우연히 엿본 사람처럼 경외감에 한동안 말을 잃었다.

포세이돈신전에서 보낸 한 시간, 인도양에서 해와 달을 함께 바라본 몇 분은 그 후 오래도록 광활한 우주의 시간과 공간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우주에서 인간은 얼마나 하찮은 미물이며 인간사가 아무리 힘들어도 세상이 무너질 만한 일은 없다고. 나는 담대한 생각을 가진 인간으로 조금씩 변했다. 돌이켜보면 휴대폰 속 수천 장의 사진보다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남아 내 삶에 영향을 준 것은 몇 번의 강렬한 경험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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