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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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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넘게 같은 방에서 제삿밥 먹는 두 선비의 의리

2026.07.03 12:01

화순 이양면... 천년 세월과 선비의 길, 그리고 작은 역 하나
▲ 쌍봉사 종무소
ⓒ 김재근

지석천은 화순군 서남권 들녘을 살찌우는 젖줄이다. 이양·청풍·춘양면 흘러 능주면에서 화순천 받아들여 도곡면 적시고 나주시 금천에서 영산강과 만난다. 지난 6월 27일, 지석천이 첫 숨을 틔우는 어머니 품 같은 이양면 증리로 향했다.

초여름 열기가 대지에 넘쳤다. 옥수수 수염이 눈에 띄게 길어졌다. 짙푸른 하늘엔 흰 구름이 파도처럼 오갔다. 길은 한적했다. 아스팔트 갈라진 틈새로 풀이 자라나, 까만 도로가 여남은 걸음 간격으로 파란 줄로 반듯하게 잘렸다.

이양의 여름 여정

▲ 정암조광조선생서원유지기념비 이양면 증리 소재
ⓒ 김재근

지석천의 고향이라는 상징성 때문일까, 산세가 깊고 조밀했다. 물줄기는 날것 그대로 청량감을 뿜어냈다. 이 깊은 산골 마을 서정에 담긴 기억과 함께 이양의 여름 여정을 시작했다.

조그만 표지석이 정암 조광조 초장지(初葬地)가 이 동네였다고 일러준다,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고 죽은 정암의 시신을 벗 양팽손이 거두어 장사 지내고, 서원 세워 억울했을 넋을 위로했다. 마을 초입 쓰러져가는 창고 건물 아래로 조그마한 비석 하나, 서원이 있던 자리였다는 표지다.

최익현이 발문하고 양재경이 세웠다. '숭정후 오 기유 삼월 안격서(崇禎后 五 己酉 三月 日 安格書)', 어렵사리 해독하니, 1909년 음력 3월에 안부를 묻는 글을 올리며 기록한다, 라는 뜻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최익현은 1906년 대마도에서 죽었는데. 양재경이 1918년까지 살았으니 글을 미리 받아 놓았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땡볕 아래서 그렇지 않아도 더운 날 머릿속까지 뜨거워졌다. 향토 사학자를 만나게 되면 물어보리.

▲ 쌍봉사 대웅전
ⓒ 김재근

의문은 뒤로 두고 물길 따라 내려오니 쌍봉사다. 조그마한 연못에 연꽃이 화사하게 반긴다. 사천왕이 부릅뜬 눈으로 세속의 번뇌를 매섭게 꾸짖는 천왕문을 지났다. 탑 닮은 3층 건물이 맞이한다. 날렵하게 치솟은 처마 곡선과 비례미가 아담하면서도 당당하다. 대웅전이다.

뜰 가득 보드라운 잔디, 클로버가 군데군데 무리 지어 하얗게 꽃을 피웠다. 그 위로 독경 소리 은은하게 흐른다. 클로버 꽃도 불심(佛心)에 젖어 드는 듯하다. 마당을 따라 늘어선 웅장한 느티나무들, 그늘이 짙다. 나무 아래서 스마트폰 켜고 절 이력 들추어 보았다.

사람 사는 일에 엮여 천년 세월 순탄치는 않았구나. 신라말 철감선사 도윤이 창건했다. 고려 무신 정권 때 최우의 아들 만전과 만종이 거처하며 사세가 융성했다. 조선조에 이르러 왕실의 지원이 있었다고 하나 조광조를 배향하는 죽수서원에 속하면서 세 부담으로 힘들었던 때도 있었다. 긴 세월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산중의 고즈넉한 분위기는 잘 간직했다. 대견하다.

목조탑 형식의 건물로 법주사 팔상전과 쌍벽을 이루었다는 대웅전, 화재로 소실되어 복원 후, 보물의 지위를 잃었다. 당당한 외관과 달리 내부는 협소했다. 주불인 석가여래좌상과 좌우로 아난존자와 가섭존자, 그 앞으로 방석 두 개, 이만으로도 공간이 꽉 찼다. 본당의 역할은 뒤편 극락전이 대신하는 듯했다.

▲ 쌍봉사 독경
ⓒ 김재근

극락전 앞 흰 고무신 한 켤레. 열린 문으로 목탁을 두드리는 스님의 뒷모습이 보인다. 요사채 앞엔 접시꽃이 만발했다. 너른 밭은 검은 비닐로 줄지어 가지런하게 덮었다. 골에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다. 스님의 파르라니 깎은 머리를 보는 듯하다. 주지 스님 성정이 짐작이 간다.

지장전 들러 죽음을 관장하는 시왕(十王)을 만났다. 1667년에 조성한 눈빛이 엄숙했다. 세속에서 지은 크고 작은 허물을 내려놓고 뒤편 호젓한 숲길로 들어섰다. 차나무와 대나무 사잇길이 한여름이라 할 수 없을 만큼 맑고 쾌적했다.

얼마의 돌계단 오르니, 감나무 옆으로 철감선사 부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통일신라 석조미술 최대 걸작이다. 천년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온 사찰의 품격이 여기에서 비롯된 듯하다. 부도와 탑 사이에 돌무더기 몇 개, 탐방객들이 소원 빌며 하나둘 놓고 간 게 탑을 이루었다. 합장하고 조약돌 하나 얹었다.

▲ 학포당 이양면 쌍봉리 소재, 학포 양팽손의 서재.
ⓒ 김재근

작지만 단아했던, 공간 배치가 아름다운 도량을 뒤로 하고 아랫마을로 향했다. 안내소에서 커피 한 잔, 반 넘어 남았는데 쌍봉리 학포당(學圃堂)이다. 오백 살을 먹었다는 은행나무가 멀리까지 마중 나온다. 닫힌 대문 열고 들어섰다.

양팽손(梁彭孫, 1488~1545), 서화에 뛰어나 호남 화단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가 기묘사화로 관직에서 물러나 제자를 가르치며 글과 그림을 벗하며 세월을 보낸 글방이다. 우측으로 은행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좌측으로 시야가 열린다. 시선이 끝나는 곳이 증리다.

학포 양팽손과 정암 조광조 사이엔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의리가 있었다. 같은 해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동문수학했다. 기묘사화로 조광조는 능주로 유배되고, 양팽손은 파직되어 고향으로 내려왔다. 한겨울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죽자 양팽손이 시신을 거두어 고향마을 위쪽 골짜기에 묻었다. 이듬해 용인으로 이장하였다. 화순 죽수서원과 용인 심곡서원에 같이 배향되었다. 500년 넘게 같은 방에서 제삿밥을 먹고 있다.

담장 아래 수선화가 눈길을 끈다. 산골 마을 정취에 묻힌 학자의 은둔과 사색의 흔적인 듯, 고아한 자태가 고즈넉한 분위기 자아낸다. 조선의 어느 여름날로 들어선 듯한 고요가 찾아든다.

영영 문 닫힌 오일장터

▲ 이양김밥집 이양중고등학교 앞 분식집
ⓒ 김재근

다시 물길에 몸을 맡기니 생활 중심인 이양리다. 화학산에서 내려온 물줄기와 만나 제법 강 닮은 모습을 한다.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오일장터에 들어섰다. 작년까지 장을 지켰던 마지막 장수 둘이 오지 않으면서 영영 문이 닫히고 말았다 한다. 이제는 추억뿐, 장터 입구 닭집에 옹송그리는 닭 몇 마리만이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린다. 텅 빈 장터에 따가운 햇살이 소나기처럼 내린다.

이양역 가는 길, 이양중고등학교 사거리쯤 간판 하나가 눈에 띈다. '카페 연화', 어디서 봤더라. 그렇지, 쌍봉사에서 봄날의 햇살 같은 미소로 커피를 건네던 해설사님 이름이었지. 카페는 토요일 정기휴무, 인연은 끊어질 듯 이어졌다, 바로 옆 '이양김밥집'으로. 콩물국수 8천 원, 묘하게 끌린다.

4인용 테이블 6개, 정갈했다. 남자가 홀을 지킨다. 주방엔 이국적인 젊은 여자, 자세가 꼿꼿하다. 흑백요리사에서 보았던 쉐프의 품격이 느껴진다. 달걀 반쪽 방향 올린 콩물국수, 냉면을 닮았다. 와우, 대한민국 99번째 맛집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외벽에서 반짝이는 알전구만큼이나 멋진 김밥집이다.

▲ 이양역 순천역과 광주송정역을 하루 네 차례 오가는 간이역.
ⓒ 김재근

식후 산책, 이양역. 광주송정역과 순천역을 오가는 무궁화호 열차가 하루 네 번씩 서는 간이역이다. 선로 주변 금계국과 기생초 가득했다. 빛나던 시절 지난 듯 마지막 손님 떠나는 파장처럼 꽃이 지고 있다. 그 위로 흰 나비 무리 지어 난다. 뙤약볕 아래 젊은 남자. 10여 분 연착한 광주송정역 가는 기차에 오른다. 차량 두 칸, 차창 너머로 듬성듬성 머리가 보인다. 떠나는 기차에 손 흔들어 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나비가 날았다. 역을 나섰다.

마지막 여정인 송석정, 그런데 햇살이 너무 쨍하다. 그림자도 짧고. 게으름을 피워도 좋겠다. 김밥집 나서며 보았던 '청춘 카페', 들어서니 동네 사랑방이다. 마음만은 청춘인 분들이 이야기꽃을 피운다. 김밥집에서 보았던 분도 계신다. 더덕주스를 주문했다.

책을 꺼냈다. 테이블을 건너오는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 농사 이야기, 병원 이야기, 월드컵 이야기까지. 축구 해설뿐 아니라 전술에도 해박하다. 국가대표 감독도 거뜬하겠다. 생생한 삶의 서정 속에서 이양의 토요일 오후가 깊어진다.

▲ 송석정 소나무와 절벽이 잘 어우러졌다.
ⓒ 김재근

두어 시간이 금방이다. 송석정 가기로 했었지. 농협 앞에서 들녘으로 들어가 지석천을 따라 내려갔다. 파크골프장 지난다. 강성리 지석천 변, 야트막한 절벽 위에 자리한 송석정(松石亭), 해자처럼 연못을 둘렀다. 노송과 절벽과 어우러진 멋진 산수화 보는 듯하다.

조선 광해군 때, 양팽손의 증손인 양인용이 인목대비 폐위에 항거해 낙향하여 세운 정자다. 정면 3칸 측면 3칸, 중앙 1칸 온돌을 우물마루가 빙 둘렀다.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이라 한다.

기둥에 기대고 앉아 발을 뻗었다. 처마 끝에 걸린 하늘이 한없이 푸르다. 이양 너른 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름날의 열기는 여전하지만 바람의 결이 다르다. 솔향 은은하게 번진다. 옛사람들 정자 세웠던 마음이 절로 헤아려진다.

▲ 송석정 옛사람들 정자 세웠던 마음이 절로 헤아려진다.
ⓒ 김재근

들판을 가로지르는 도로로 차들이 바삐 지난다. 옛날과 지금이 한 풍경 안에 나란히 들어앉는다. 떠나기 아쉬운 자리다. 문득, 많은 곳을 보는 것보다 한 곳을 오래 바라보는 일이 더 좋은 여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천년고찰의 고요, 선비의 의리, 간이역의 적막, 콩물국수의 조우, 그리고 커피 한 잔, 차례로 스친다. 꽤 낭만적인 은일(隱逸)의 여정이다. 길 떠나온 이유로 충분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화순매일신문에도 실립니다.개인블로그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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