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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란씨 걸 [헤럴드 단편 : 오늘에 대한 우리 이야기-젊은 작가들과의 동행-차무진]

2026.07.03 11:25

일러스트=김효민·챗GPT


“오란 씨?”

악마는 놀라 한참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술 안 먹은 놈을 선택해야 했었나,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아니, 영혼을 팔라는 것도 아니고, 무참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순전히 대가 없이 소원을 들어주겠다는데 이런 기회가 흔한 줄 아는가. 악마가 다시 물었다.

“여봐, 3분 동안 과거로 갔다가 안전하게 이곳으로 돌아오게 해주겠다고.”

“그러니까 1987년 6월 20일 토요일 오후 4시, 우리 집 안방 텔레비전 앞으로 가고 싶다고요.”

“텔레비전을 보겠다? 그 3분 동안?”

“네. 오란 씨 광고를 보고 싶다고요.”

“지난주 로또 추첨 시간이나 주식 폭등한 날의 아침 9시가 아니고?”

“아. 집에 갈래요.”

사내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 아. 잠깐 잠깐만.” 악마는 다급하게 그를 돌려세웠다. 기가 찼다. 세상의 이치가 이미 제멋대로 굴러가 더는 자신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며칠 전 악마는 롯데타워 꼭대기 첨탑의 앙상한 철골 끝에 쪼그리고 앉아 서울의 밤공기를 맡다가 생각했다. 모처럼 대가 없이 한 놈 선택해서 소원이나 들어주자고. 악마는 천사의 행동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심연이 이따금 빛을 흉내 내는 것은 자비가 아니라 권태 때문이다.

풀쩍 풀쩍 빌딩들을 뛰어넘으며 물색하다 경복궁역 앞 인도에 서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이놈을 찾아냈다. 헐렁한 양복을 입은 회사원. 그는 살짝 취해 있었고 택시를 기다리며 주식 창을 확인하고 있었다. 악마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1513년 동판화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에 그려진 형상으로 표변했다. 박쥐 날개도 보여주고, 뿔도 보여주고 염소 한 다리도 드러내면서 자신이 악마라고 밝혔다. 사내는 처음에는 헉, 하고 놀란 숨을 들이마셨으나 이내 시큰한 코를 비볐다.

“1987년 6월이면 보자, 네가……”

“일곱 살요.”

“그날 무슨 일이 있는 날인가?”

“음. 엠비씨에서 대한민국 스포츠 집념과 태권도 인가 그거 했을걸요.”

“근데 너 정말로 돈 벌고 싶지 않아? 주식 계좌에 삼백만 원뿐이더라.”

“헛. 내 개인정보를 어떻게!”

“야. 나 악마야. 그리고 남들은 다 반도체니 로봇이니 하는데 넌 사놓은 종목이 왜 그 모양이냐? 출판? 도서 유통? 이런, 시대를 역행하는 놈 같으니라고.”

사내는 경기도 안성에서 오늘 출장을 왔다고 했다. 비닐을 만드는 중소기업에 다닌다고 했다. 주로 PE 비닐을 만드는데 하우스 비닐도 만들고 김장 비닐도 만들고 그런다고 했다. 월급도 세전 350 정도 받는다고 했다. 사내는 납품업체에 미팅을 마치고 지금 숙소로 가려고 택시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월급이라도 꼬박꼬박 들어오니 다행이다.”

“고용보험이랑 연금이랑 의료보험 떼고, 마이너스 통장, 이자 나가고 남은 돈의 반은 이혼한 와이프한테 가고 나머지 반으로 월세랑 공과금 내고, 자동차 할부 내고 통신비 내면 통장에 몇십만 원밖에 없습니다. 차 기름 넣고 밥 먹기도 버겁습니다.”

“애새끼는?”

고개를 절레절레. “하나 있습니다. 와이프가 키웁니다.”

“좋아. 오케이. 소원은 들어주지만, 반드시 이유를 알아야 해. 피나 영혼을 달라거나 무참한 운명의 말로를 대가로 원하는 게 아니야. 그냥 내가 베푸는 거야. 다시 물을게. 그러니까 1987년도로 돌아가서 오란 씨 걸을 만나고 싶다, 이거지?”

“그만 물어보시죠. 자꾸 같은 말을 하게 하시네.”

오란 씨 걸이라. 악마는 그게 누구냐고 물었다. 사내는 머리에 하와이 꽃을 꽂은,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새하얀 치아와 아름다운 눈을 지닌 1980년대 최대의 인기녀 오란 씨 걸을 정말로 모르는 거냐고 반문했다. 사내는 그 여자가 나오는 광고를 보던 토요일 오후 안방으로 가고 싶은 거라고 말했다. 사내는 이 엿 같은 세상에 오직 유년의 기억만이 무해하다고 말했다.

“스마트폰 내놔봐.”

악마는 사내의 스마트폰을 스캔했다. 쥐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세계로 가는 세상》, 《한 지붕 세 가족》, 《가족 오락관》, 《일요일 밤의 대행진》, 《출동, 에어울프》, 1987년 광고 모음, 1993년 한국시리즈 6차전. 전부 과거의 영상들이었다.

“너, 옛날 프로그램 많이도 찾아봤구나. 어라? 오란 씨 광고도 이미 찾아서 봤네.”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는 그런데 왜 굳이 1987년으로 돌아가 그 광고를 또 보겠다는 거냐고 따졌다.

“생각나는 대로 말해도 됩니까?”

악마는 듣겠다는 시늉을 했다.

“그 시절 누리끼리한 병을 들고 해변에서 훌라 춤을 추던 오란 씨 걸이 몇 살인지, 이름이 뭔지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다만 처음으로 예쁘다고 느낀 여자였어요. 내겐 성모님 같은 겁니다. 어떻게 저렇게 예쁜 사람이 있을까. 빨리 어른이 되어서 저 여자처럼 예쁜 사람과 놀이 공원 같은 데를 가고 싶다, 생각했죠. 일곱 살 아이는 토요일 학교에서 돌아오면 안방 텔레비전 앞에 등을 고부리고 TV 앞에 앉았어요. 광고는 오후 네 시쯤 꼭 나왔어요. 안방에는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가 누워 계셨고, 경찰관이었던 아버지가 그즈음 퇴근하시면 할머니는 당신 방으로 건너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장롱에 옷을 걸어두시고 씻고 나와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셨죠. 나는 오란 씨 걸을 아직 못 본 상태라 아버지에게 안기듯 매달려 리모컨을 빼앗았습니다. 볼 게 없으면 아버지는 외면하듯 리모컨을 내주고 베개를 꺼내 돌아누우셨어요. 18평 작은 집의 부엌에서는 팔팔, 물 끓는 소리가 났고, 밖에서 놀다 들어온 누나는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냈습니다. 아직 저녁 먹을 시간은 아니었지만, 오후는 아늑했어요. 스마트폰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밖에 할 일이 없던 시절이었어요. 엄마는 집 앞 가게에 반찬거리를 사러 나가시고, 집 안에는 노을빛이 들어왔어요. 창으로 밖에서 아이들 노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텔레비전 앞에 등을 고부리고 앉아 오란 씨 걸을 기다렸어요. 프로야구 중계라도 할 참이면 서너 번 그 CF를 볼 수 있었어요. 아직도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 여자가. 그리고....”

그만. 악마는 그의 말을 끊었다.

“그때가 가장 행복한 때였냐?”

“아니요. 부모님은 한 달에 한 번은 그릇을 깨며 싸웠고, 아버지는 비리에 연루되어 제가 중학생 때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그럼 가장 그리운 때였냐?”

“한 달 전에 회사에서 베트남에 놀러 갔을 때가 더 그립습니다.”

“그럼 왜 하필 그때야?”

“돈이 안 드니까요.”

“뭐? 돈?”

“지금의 세상은, 주식, 전쟁, 정치, 도덕. 내가 알던 상식과 달라서 도무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싫어하는 것에 돈을 너무 많이 써요. 나는 나만의 공간에 머물고 싶어요. 전부 돈에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나처럼 돈 없는 놈은 숨을 곳이 필요합니다.”

“그거 대단히 나쁜 거다. 퇴행이야.”

“퇴행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정신 질환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퇴행은 남에게 피해를 안 주니 오히려 다행이죠.”

가난한 자에게 향수는 유일하게 허락된 사치라고 사내는 말했다.

“음. 요즘 인간들이 마음 둘 곳이 없어서 유튜브만 본다는 말은 들었다. 사실 1987년도 그리 행복한 사회는 아니었어. 시위에 최루탄에.”

“뭐 분석은 악마님이 알아서 하시고요.”

“오란 씨 걸을 보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돈 안 드는 안식을 유튜브가 아닌 실제 3분간 느끼고 싶다?”

“네.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두어요.”

악마는 다시금 무력함을 깨달았다. 인간들은 매일 밤 제 발로 그 낡은 루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악마가 줄 수 있는 건 이미 스스로에게 주고 있었다. 지금 이놈도 살기 위해 과거 영상을 헤매고 있다고 고백한다. 향수의 시대. 옛 개그맨이 아직도 지난 유행어를 외치고 옛 노래만 리메이크되는 시대. 세상은 진화한 게 아니다.

악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원을 들어주마.”

악마의 굽은 손가락이 사내의 스마트폰 화면을 건드렸다. 액정에서 창백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순식간에 사내가 사라졌다. 인도에는 사내의 스마트폰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이내 사내는 임계적 틈새에 있었다. 눈앞에 노란 막대가 천천히 차올랐다. 그리고 영상이 흐른다. 유년을 보러 온 사내는 먼저 치아보험 광고를 끝까지 견뎌야 했다. 막대가 다 차고, 5초 후 건너뛰기. 비로소 익숙한 냄새가 났다.

좁은 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 베개 벤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 서민 아파트 5층의 창밖으로 황동 같은 노을빛이 들어왔다. 사내는 텔레비전 앞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마침내 브라운관에 하와이 꽃을 꽂은 여자가 나타났다. 오란 씨 걸은 예의 그 아름다운 눈으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뜨거운 가슴, 뜨거운 눈길, 태양 같은 젊음이 갈증을 느낄 때.” 여자가 병을 들어 올리며 눈을 찡긋한다. “느낌이 달라요!”

광고는 30초 만에 끝났다. 갑자기 방 안을 비춰들던 노을빛이 일순간 검게 변했다. 누워 있던 아버지도, 물 끓는 소리도 사라졌다. 허공에 거대한 흰색 원이 생기더니 숫자가 떠올랐다.

다음 동영상 재생까지 5초.

3초. 2초. 1초.

다음 영상이 흘러나왔다. 악마는 바닥에 떨어진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 안에 갇힌 사내가 나가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보였다. 그 등 뒤로 작은 숫자가 깜빡였다. 조회수 1. 악마는 이놈이 악하거나 나쁜 놈은 아님을 알고 있다. 그저 삶이 힘들어 퇴행하고 싶어 했을 뿐. 그러나 그것도 죄다. 악마는 액정을 가볍게 두 번 두드렸다. 영상이 멈췄다. 유년의 기억만은 무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영원히 반복되는 무해함은 완벽한 지옥이다. 악마는 전원을 끄고 스마트폰을 품에 넣은 채 하늘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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