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간 전
“AI는 21세기의 범선…새 항로 여는 자가 주도권 쥔다” [채서일 교수 인터뷰 전문]
2026.07.03 08:41
‘불 바퀴 문자 화폐’ 출간한 경영학 거두 채서일 인터뷰
이 책의 첫 페이지에는 코닥의 이야기가 놓여 있습니다. 세계 최초로 디지털카메라를 발명한 그 회사가, 정작 자신이 만든 기술에 밀려 무너졌지요. 가장 앞선 자가 가장 먼저 쓰러진다는 이 역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150만 년 동안 되풀이되어 온 패턴입니다. 코닥의 비극은 기술의 비극이 아니라 목적의 비극이었습니다. 저는 그 한 장면에서 이 책을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책 자체도 오랜 갈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평생 마케팅과 경영전략을 연구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경영학이라는 학문은 대개 ‘지금 무엇이 통하는가’를 다룹니다. 사례는 길어야 수십 년, 유행하는 전략은 몇 년이면 바뀝니다. 가르치면서도 늘 마음 한구석이 답답했습니다. 이 수많은 전략과 사례 밑에, 변하지 않고 흐르는 더 깊은 강이 있지 않을까? 기업이라는 유기체를 진짜로 이해하려면 그 강의 바닥까지 내려가 봐야 하지 않을까?
그 바닥까지 내려가 보니, 거기 놓여 있던 것이 불, 바퀴, 문자, 화폐였습니다. 결국 비즈니스의 본질을 보려면 비즈니스의 시간이 아니라 문명의 시간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기업이 경쟁하는 생산과 유통, 정보와 자본은 사실 인류가 150만 년 동안 다듬어 온 네 가지 힘의 가장 최근 모습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영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인류사 전체를 펼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하나, 지금은 모두가 답을 찾는 시대입니다. AI 앞에서 불안한 것은 경영학도만이 아닙니다. 직장인도, 자영업자도, 학생도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그 질문이 전공자만의 것이 아닌데, 전공자만의 언어로 쓸 수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평생 강의실 안에서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해 온 사람으로서, 이번만큼은 제가 평생 품어온 질문 하나를 강의실 밖 더 넓은 곳에서 나누고 싶었습니다.
사피엔스에 견주어 주신 것은 너무 과분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렇게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라리가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를 물었다면, 저는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작품인 기업은 이제 어디로 가는가’를 묻고 싶었습니다. 같은 인류사를 펼쳐 들었지만, 바라본 곳은 조금 달랐던 셈입니다. 그 질문이 독자들께 와 닿는다면, 저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1-1. 아울러, 또 교수님의 이전 저서는 경영학도 필독서로 사용된 교재였는데, 이번 책은 교재가 아닌 대중서라는 인상도 강합니다. 개인적으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필적할 정도의 통찰이 담긴 책으로 읽었습니다. 대중서를 쓰시기로 결심하신 계기가 있다면 함께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 책이 교재가 아닌 대중서가 된 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기획했다기보다 주제가 그 형식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학술지에 이런 형식의 글을 게재하기가 어울리지 않았어요. 150만 년의 문명과 AI의 미래를 다루는 이야기는, 각주와 도표 안에 가둘 수가 없었습니다. 형식이 내용을 따라간 셈이지요.
기자께서 정리해 주신 ‘자연·공간·시간·불신의 정복’은 제가 미처 그렇게 깔끔하게 말하지 못한 통찰입니다. 다만 한 가지만 보태자면, 저는 이 넷을 각각의 정복이 아니라 서로를 끌어당기며 함께 진화한 하나의 생태계로 봅니다. 불이 강해지면 더 많은 물자가 생기고, 그것을 나르려 바퀴가 발달하고, 거래를 기록하려 문자가, 가치를 저장하려 화폐가 따라옵니다. 넷은 늘 같이 움직였습니다.
이 깨달음이 섬광이었느냐, 오랜 정돈이었느냐 물으신다면 솔직히 둘 다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네 단어를 처음 배운 것은 초등학교, 어쩌면 중학교 시절이었습니다. 누구나 배우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으로서요. 그런데 저는 경영학자가 되었고,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걸작은 ‘기업’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생명이 없다고들 하지만,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는 유기체 말입니다. 저는 평생 마케팅과 혁신을 연구하며, 또 정책·기업·컨설팅·학계라는 네 자리를 오가며, 사실은 그 유기체가 무엇을 먹고 자라는지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같은 그림의 다른 조각들을 본 셈이지요.
돌이켜보면 흥미로운 우연이 있었습니다. 제가 사외이사로 참여했던 네 기업—비앤지스틸, GS홈쇼핑, 오리콤, 한국투자증권—이 정확히 이 책의 네 축과 짝을 이룹니다. 에너지를 다루는 철강, 거리를 좁히는 유통, 정보를 다루는 광고, 신뢰를 다루는 금융. 의도한 것이 아니었는데, 평생의 이력이 이 네 단어 위로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책을 쓰면서 그 우연을 깨닫고 저 자신도 놀랐습니다.
그 조각들이 ‘불·바퀴·문자·화폐’라는 네 단어로 처음 응축된 것은 20년 전, 경영학회 창립 50주년 기념행사에서 회장으로서 경영학의 미래를 주제로 한 기조강연에서 였습니다. 그때는 직관에 가까웠습니다. 그 직관으로 책의 초고를 쓰던 작업을 10여번 했지요. 열 번을 고쳐 썼지만, 매번 무언가 마지막 한 조각이 비어 있었습니다. 그 빈자리가 채워진 것은 AI를 만나고 나서였습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고를 대신하는 것을 보며, 문득 인류가 동물과 갈라서던 출발점이 떠올랐습니다. 다른 동물도 도구를 씁니다. 그러나 에너지를 근육에서, 이동을 다리에서, 기억을 뇌에서, 신뢰를 관계에서 떼어내 몸 밖에 축적한 것은 인간뿐입니다. 그 네 번의 ‘분리’가 문명을 만들었고, 지금 AI는 마지막 남은 인지마저 몸 밖으로 떼어내고 있습니다. 과거를 비추는 거울로 AI가 다가오자, 흩어져 있던 평생의 관찰이 비로소 한 점으로 모였습니다.
송의 강력한 관료제는 모든 것을 안정적으로 통제했기에, 역설적으로 판을 뒤엎을 변이가 살아남을 토양이 없었습니다. 너무 성공적이어서 멈춘 것입니다. 더 나아가려는 욕구가 사라지자, 송은 혁신을 버리고 수성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살아 있는 유기체가 욕구를 잃으면 더 이상 진화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안전한가. 저는 솔직히 위험이 크다고 봅니다. 그 위험은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기술을 살려낼 토양에 있습니다.
첫째는 규제입니다. 진화는 변이가 자유롭게 태어나야 시작되는데, 우리의 규제는 바이오와 IT 같은 가장 유망한 벤처들의 변이를 태어나기도 전에 억누릅니다. 송의 관료제가 21세기 한국에서 규제의 얼굴로 되살아난 셈입니다.
둘째는 금융입니다. 규제와 안전만을 좇는 우리 금융은 가보지 않은 길에 자본을 대지 못합니다. 변이가 태어나도 그것을 선택해 키워줄 회로가 없는 것이지요. 저는 성공과 실패의 판정을 정부나 규제가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것은 시장이, 자본의 논리가 감내하고 가려내야 할 몫입니다. 무엇이 살아남을지를 누군가 미리 정해주지 않는 것이 진화이듯, 자본 시장이 스스로 성공을 보상하고 실패를 감당하게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실패를 죄악으로 보지만, 진화의 눈으로 보면 실패는 도태인 동시에 다음 변이를 위한 정보입니다.
셋째는 조정의 실패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각 섹터의 욕망이 너무 커서 누구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네 축이 따로 놀던 송의 문제가, 부처와 산업의 칸막이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생태계를 흐르게 하는 두 가지—자본과 노동—가 모두 굳어 있습니다. 자본은 규제에 막혀 모험으로 흐르지 못하고, 노동은 경직된 구조에 갇혀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지 못합니다. 피와 영양분이 돌지 않는 몸이 건강할 수 없듯, 자본과 노동이 굳은 경제는 진화할 수 없습니다.
넷째는 가장 아픈 부분인데, 원청과 하청 사이의 갑질입니다. 건강한 생태계는 큰 기업과 작은 기업이 함께 살아야 유지되는데, 갑질은 생태계가 제 토양을 스스로 갉아먹는 일입니다. 상생이 무너지면 생태계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정리하면, 송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회로의 문제입니다. 변이를 억누르는 규제, 모험을 외면하는 금융, 흐르지 못하는 자본과 노동, 토양을 갉아먹는 갑질—이것들이 우리의 네 축을 따로 놀게 만들고 있습니다. 다행히 이것들은 기술처럼 새로 발명할 필요가 없는, 마음먹으면 바꿀 수 있는 제도와 문화의 문제입니다. 규제를 풀어 변이가 태어나게 하고, 시장이 성패를 가리게 하고, 자본과 노동이 다시 흐르게 하고, 갑질 대신 상생으로 생태계를 살린다면—한국은 송이 아니라 영국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을 한 방향으로 묶어줄 목적과 용기입니다.
좋은 질문입니다. 다만 답하기 전에 카라벨선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짚고 싶습니다. 그것은 빠른 배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세계의 항로를 정의하는가, 그 권력을 바꾼 도구였습니다. 항로를 먼저 연 자가 표준과 무역과 질서를 가져갔지요. 그러니 21세기의 카라벨선도 ‘무엇이 빠른가’가 아니라 ‘무엇이 새 항로 자체를 정의하는가’로 찾아야 합니다.
제 답은 AI입니다. 카라벨선이 물리적 바다를 항해했다면, AI는 데이터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입니다. 그리고 똑같이, 그 배로 먼저 항로를 연 소수가 표준을 쥐고, 뒤따르는 이들은 그 항로의 통행료를 냅니다. 다만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AI 모델 자체는 이미 누구나 살 수 있는 범용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진짜 카라벨선은 AI라는 배가 아니라, 그 배로 어디를 향할 것인가를 정하는 능력입니다. 배를 가진 것과 항로를 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니까요.
한국은 어디에 있는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둘 다입니다. 우리는 분명 새 항로를 연 경험이 있습니다. 메모리 반도체에서 세계가 가지 않은 길을 갔고, K-콘텐츠는 누구도 그려놓지 않은 문화의 항로를 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항로를 못 여는 민족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주력 산업의 성공 방식 대부분은, 누군가 이미 연 항로를 더 빠르고 정교하게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빠른 추격’이란 결국 공개된 항로의 항해술이지요. AI라는 새 배가 나타난 지금, 우리는 그 배를 사서 남의 항로를 따라갈 것인가, 그 배로 우리만의 항로를 열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항로를 여는 데는 좋은 배만으로 부족합니다. 가보지 않은 바다로 나서는 용기, 난파를 감수하는 자본, 선원들의 모험심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규제와 보신적 금융, 갑질 같은 것들이 바로 우리 배의 닻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기술이라는 돛은 세계 최고인데, 정작 출항을 막는 것은 그 닻들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겠습니다. 카라벨선으로 세계를 제패한 포르투갈은, 정작 그 항로에 안주하다 다음 배를 탄 네덜란드에 추월 당했습니다. 항로를 여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자기가 연 항로를 스스로 버리고 다음 항로로 갈아타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유기체는 끊임없이 새로운 변이를 만들어야 살아남는데, 한 번의 성공이 너무 달콤하면 그 자리에서 진화를 멈추게 됩니다. 한국이 진짜 경계해야 할 것은 항로를 못 여는 것이 아니라, 어렵게 연 항로—반도체라는 항로에 안주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도 그 두 가지를 나란히 놓고 가장 오래 고민했습니다. 기자께서 ‘한 문명에 머묾’과 ‘여러 문명으로 번짐’으로 보셨는데, 저는 그 차이가 어디서 비롯됐는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키푸의 본질은 ‘사람에 붙어 있는 정보’였습니다. 매듭 그 자체로 뜻이 완결되지 않고, 그것을 묶고 읽는 전문가의 기억과 맥락이 있어야 비로소 완성됐습니다. 반면 알파벳은 소리를 적는 규칙만 익히면 누구나 쓰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보를 인간 전문가의 몸에서 한 번 더 떼어낸 것이지요. 게다가 알파벳은 스무 남짓한 부품으로 무한한 단어를 만드는 조합형 시스템이었고, 어디에나 값싸게 옮겨 적을 수 있었습니다. 분리되고, 조합되고, 값싸게 복제되는 것 — 이 세 가지가 알파벳을 문명의 경계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그래서 정교함이냐 확산성이냐 물으신다면, 저는 확산성이라고 답하겠습니다. 다만 이렇게 덧붙이고 싶습니다. 정교함은 한 세대 안에서 이기고, 확산성은 세대를 넘어 이깁니다. 키푸는 잉카의 행정에는 더없이 정교하고 충분했습니다. 당대의 승자였지요. 그러나 그 정교함은 잉카 문명과 운명을 함께했습니다. 알파벳은 처음엔 투박했지만, 사람에게서 분리되었기에 문명과 세대를 넘어 살아남았습니다.
진화의 눈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정교함은 특정 환경에 대한 완벽한 적응이고, 확산성은 환경이 바뀌어도 퍼져나가는 번식력입니다. 그리고 역사에서 살아남은 것은 늘, 한 자리에서의 완벽함이 아니라 어디로든 퍼질 수 있는 번식력이었습니다. 제 책에서 한국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에게 길을 내준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우리 것이 더 정교했지만, 그의 것이 더 잘 퍼졌으니까요. 그리고 세상을 바꾼 것은 언제나 더 잘 퍼진 쪽이었습니다.
사실 이 원리는 박물관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눈앞에서 똑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술 표준을 둘러싼 경쟁의 본질도 다르지 않습니다. 가장 정밀한 기술이 시장을 갖는 것이 아니라, 가장 널리 퍼져 모두가 쓰게 된 기술이 표준이 되고, 표준이 된 기술이 결국 모든 것을 가져갑니다. 그래서 정말 두려운 경쟁자는 ‘더 정교한 것을 만든 자’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쓰게 만든 자’입니다. 알파벳이 그랬듯, AI 시대의 승부도 정교함의 깊이가 아니라 확산의 넓이에서 갈릴 것입니다. 가장 똑똑한 모델을 가진 자가 아니라, 가장 많은 이들의 일상에 스며든 모델을 가진 자가 다음 시대의 표준을 쥐게 될 것입니다.
6. 교수님의 이번 책에는 ‘선택 압력’이란 단어가 무수히 반복됩니다. 선택 압력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시대정신이 반영된 무형의 요구’일 수 있겠고, 쉽게 풀어보자면 ‘살아남게 만드는 생존의 조건’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기술의 운명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이 놓인 환경의 선택 압력이 결정한다”고도 책에 쓰셨는데요. 지금 한국 기업을 압박하는 가장 결정적인 ‘선택 압력’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인구 감소, AI 확산, 미중 갈등, 저성장, 불평등 등 여러 요인이 거론될 수 있겠고 또 한 가지로만 규정할 수 없는 문제임을 모르지 않습니다만, 교수님의 고언을 여쭙고 싶습니다.
말씀하신 다섯 가지—인구 감소, AI, 미중 갈등, 저성장, 불평등—은 모두 무거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제가 감히 고언을 드린다면, 저는 이것들을 다섯 개의 따로 떨어진 위기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난 다섯 개의 증상으로 봅니다.
그 뿌리는, 한국이라는 경제 유기체가 진화를 멈추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세기 동안 누구보다 빠르게 남의 길을 따라가며 성공했습니다. 그 성공이 너무 달콤했기에, 이제 새로운 변이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힘이 약해졌습니다. 앞서 송나라가 너무 성공적이어서 멈췄다고 말씀드렸는데, 저는 그 그림자가 우리에게 드리우고 있다고 봅니다.
이 눈으로 보면 다섯 가지가 다르게 읽힙니다. 저성장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새 변이를 못 만드는 유기체는 성장할 수 없으니까요. 인구 감소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한 사회가 미래를 더 이상 욕망하지 않게 되었다는 가장 깊은 신호입니다. 유기체가 다음 세대를 만들 욕구를 잃은 것이지요.
불평등은, 제가 앞서 말씀드린 원·하청 갑질과 굳어버린 자본·노동이 생태계를 갉아먹은 결과입니다. 미중 갈등은 우리가 기대어 온 항로가 통째로 흔들리는 환경의 격변이고요.
그렇다면 AI는 무엇인가. 저는 AI야말로 이 모든 것의 반전 카드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한국의 출산율은 세계 최저인데, 로봇 밀도는 세계에서 가장 높습니다. 줄어드는 사람의 자리를 기계가 메우는 구조가 가능하다는 뜻이지요. 다른 나라라면 격렬한 충돌을 겪을 전환을, 우리는 비교적 부드럽게 건널 수도 있습니다. AI는 바깥에서 밀어닥친 가장 강력한 새 선택압입니다. 안주한 유기체에게 선택압은 고통이지만, 동시에 잠든 진화를 다시 깨우는 자극이기도 합니다. 위기가 한꺼번에 몰려온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 고언은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기술이 아닙니다. 돈도, 인재도 아닙니다. 부족한 것은 다시 진화하려는 욕구와,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목적과, 가보지 않은 길로 나설 용기입니다. 규제를 풀어 변이가 태어나게 하고, 시장이 성패를 가리게 하고, 갑질 대신 상생으로 생태계를 되살린다면, 한국은 멈춘 유기체가 아니라 다시 진화하는 유기체가 될 수 있습니다. 위기의 동시 도래를, 저는 절망이 아니라 마지막 기회로 읽고 싶습니다.
7. AI가 세계의 질서를 재편하는 시대이고, 교수님 말씀처럼 기업이 AI를 활용할 때 HOW보다 WHY를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WHY라는 말은 다소 추상적인 단어가 아닌가도 싶어집니다. 물론 정답이 없는 문제이지만 WHY는 어떻게 측정되고 계량될 수 있을까요? 기업이든 사람이든 WHY를 안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에 조심스럽게 여쭙습니다. “모든 혁신은 HOW의 정교화였다. 그러나 AI가 HOW를 인간보다 수백만 배 더 빠르고 정밀하게 해결하는 시대에 효율성은 더 이상 차별화의 원천이 아니다”란 교수님 문장을 기억해 봅니다.
아주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그리고 저는 먼저 그 지적이 옳다고 인정하고 싶습니다. WHY는 추상적입니다. 매출이나 수율처럼 숫자로 똑 떨어지게 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바로 그 점이 WHY의 약점이 아니라 본질이라고 봅니다.
HOW와 WHY는 측정되는 방식이 다릅니다. HOW는 직접 잽니다. 비용이 얼마나 줄었나, 얼마나 빨라졌나, 불량이 얼마나 적은가. 반면 WHY는 직접 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남긴 흔적으로 드러납니다. 사랑을 직접 측정할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포기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기업의 WHY도 세 곳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첫째는 무엇을 포기하는가 입니다. 진짜 목적은 잘나갈 때가 아니라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순간의 선택에서 드러납니다. 단기 이익과 목적이 충돌할 때 무엇을 버리는가, 그것이 그 기업의 WHY입니다. 둘째는 사람이 모이고 남는가입니다. 목적이 분명한 기업에는 사람이 돈이 아니라 의미 때문에 모이고 머뭅니다. 직원이 떠나지 않고, 고객이 팬이 되는 것 — 이것은 WHY가 드리운 그림자이고, 충분히 관찰 가능합니다. 셋째는 위기에서 살아남는가 입니다. 목적이 없는 조직은 위기에 흩어지고, 목적이 있는 조직은 위기에 뭉칩니다. 회복력은 목적의 사후 증거입니다.
파타고니아가 좋은 예입니다. 창업자 이본 쉬나드는 2022년 회사 소유권을 환경 보호 비영리 단체에 이전하며 “지구가 우리의 유일한 주주다”라고 선언했습니다. 환경 보호라는 텔로스를 마케팅 슬로건이 아니라 기업의 소유 구조 자체에 박아 넣은 것이지요. 이런 회사를 알고리즘은 흉내 낼 수 없습니다. 매출 극대화의 목적 함수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결정이니까요.
그러니 제 답은 이렇습니다. WHY는 입력으로 측정되지 않고, 출력으로 측정됩니다. 미리 계량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낸 결과로 되짚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AI 시대에는 측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곧 복제됩니다. 숫자로 잴 수 있다는 것은 알고리즘이 최적화할 수 있다는 뜻이고, 최적화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따라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측정 가능한 HOW는 반드시 범용재가 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측정되지 않는 WHY가 마지막 차별화의 원천으로 남습니다. WHY가 무기인 이유는 그것이 정교해서가 아니라, 잴 수도 베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추상적이라는 것은 약점이 아니라, AI가 끝내 따라올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고대 그리스인이 테크네, 곧 기술과 구별해 텔로스라 부른 그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자께서 상상력과 엉뚱함이라는 두 단어를 두고 더 정확한 표현을 찾으셨는데, 제 책의 언어로 말씀드리면 그것은 ‘변이’입니다. 더 쉽게는, 틀릴 줄 아는 능력, 쓸모없어 보이는 것을 시도하는 능력입니다. 상상력과 엉뚱함의 공통점은 둘 다 정답에서 벗어나는 일탈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진화에서 변이란 본질적으로 오류입니다. 그런데 그 오류 없이는 어떤 새로운 종도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AI가 가장 먼저 지우는 것은 무엇인가. 저는 상상력이라는 능력 그 자체보다, 상상력이 태어나는 토양이라고 봅니다. AI는 본질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답을 내는 기계입니다. 방대한 과거에서 평균적으로 가장 정답에 가까운 것을 고르지요. 그래서 AI와 함께 일할수록 우리는 점점 검증된 길로 수렴합니다. AI가 지우는 것은, 틀려도 되는 여백, 비효율을 견디는 시간, 엉뚱한 질문이 비웃음 당하지 않는 공간입니다.
비유하자면 AI는 모든 길을 포장도로로 만듭니다. 빠르고 편하지요. 그러나 새로운 길은 언제나 포장되지 않은 숲에서 누군가 헤맬 때 생겼습니다. AI 시대의 진짜 위험은 숲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숲으로 들어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포장도로의 속도에 익숙해져서 말입니다.
인간의 도약을 AI가 막느냐 물으신다면, 저는 AI가 막는 것이 아니라 AI가 우리에게서 ‘여유’를 빼앗는 것이 문제라고 답하겠습니다. 변이는 의지의 문제이기 전에 구조의 문제입니다. 빈틈없이 최적화된 시스템에서는 누구도 틀릴 수 없습니다. 틀릴 수 있는 여유, 영어로 슬랙(slack)이라 하는 그 빈 공간이 있어야 일탈이 허용되고, 일탈이 허용되어야 변이가 태어납니다. 그런데 AI는 본질적으로 모든 낭비와 비효율을 찾아내 제거하는 기계입니다. 그 과정에서 틀릴 수 있는 여유까지 함께 사라지는 것이지요. 코페르니쿠스도 아인슈타인도 당대의 정답을 거부한 사람들이었는데, 정답이 너무 견고하고 빈틈이 없어지면 그것을 거부할 여백조차 사라집니다. AI는 우리를 점점 더 똑똑하게, 그러나 점점 덜 대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변이가 왜 그토록 중요한가. 변이는 처음 나타날 때는 늘 무언가 잘못되었거나 이상한 현상처럼 보입니다. 비효율이고, 오류이고, 엉뚱함이지요. 그런데 바로 그 변이가 두 번 이깁니다. 환경이 그대로여도, 알고 보면 그것이 기존의 정답보다 더 나은 답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환경이 바뀌면, 그동안 쓸모없다고 여겨지던 바로 그 변이가 유일한 생존의 길이 됩니다. 공룡이 멸종할 때 살아남은 것은 가장 강한 공룡이 아니라 구석에 있던 작고 보잘것없는 포유류였습니다. 그러니 변이를 죽이는 것은 어느 쪽으로 보아도 손해입니다. 더 나은 답을 미리 죽이는 것이거나, 미래의 생존로를 미리 닫는 것이거나. 모두가 똑같이 효율적인 정답으로 수렴한다는 것은 인류 전체가 하나의 품종이 된다는 뜻이고, 단일 품종은 환경이 바뀌면 한꺼번에 사라집니다. 그래서 저는 틀릴 수 있는 여유를 남겨두는 일, 그 여유 속에서 태어나는 변이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AI 시대에 인류가 자신을 위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9. 책 안쪽에서 잠시 걸어 나와 여쭙습니다. 한국 기업은 ‘패스트 팔로어’ 즉 빠른 추격의 전략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아 왔고 이로써 오늘날의 발전을 일구었다고 감히 생각해 봅니다. 한 명의 독자로서 교수님의 이번 책은 “이러한 전략의 유효기간이 끝났다”는 한 권의 포고문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질문드리건대 ‘이제 한국 기업이 가야 할 길은 빠른 추격이 아니라 OOOO이다’라고 정의하신다면, 저 빈칸에 어떤 단어 혹은 표현을 넣어볼 수 있을까요.
어려운 질문이고, 동시에 제가 이 책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이 그 빈칸에 ‘퍼스트 무버’, ‘선도자’를 넣으실 겁니다. 틀린 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그 답이 절반만 맞다고 봅니다. 먼저 가는 것과 길을 내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굳이 한 단어를 넣는다면, 저는 “길을 내는 자(Path Maker)” 혹은 “항로 개척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패스트 팔로어는 남이 이미 낸 길을 더 빠르게 따라가는 전략입니다. 그 반대는 ‘같은 길을 먼저 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가든 따라가든, 남이 정한 목적지를 향하는 한 그것은 여전히 추격의 게임이니까요. 진짜 전환은 목적지 자체를 새로 정의하는 것, 즉 길 자체를 내는 것입니다.
앞서 카라벨선 이야기를 했지요. 패스트 팔로어는 누군가 발견한 항로를 더 빠른 배로 따라가는 항해술입니다. 그러나 카라벨선의 진짜 힘은 속도가 아니라, 아무도 가보지 않은 바다에 새 항로를 그어 세계의 질서를 다시 짠 데 있었습니다. 한국이 가야 할 길은 더 빠른 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느 바다로 향할 것인가를 스스로 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빈칸은 사실 속도의 단어로 채울 수 없습니다. 빠른 추격의 반대는 더 빠른 추격이 아니라, 무엇을 향해 갈 것인가를 묻는 일입니다. ‘어떻게 더 잘 만들까’에서 ‘무엇을 왜 만들까’로 질문을 바꾸는 것. 길을 낸다는 것은 결국 목적을 갖는다는 뜻이고, 그 목적이야말로 AI도, 추격자도 베낄 수 없는 한국만의 항로가 될 것입니다. 패스트 팔로어가 남이 낸 답을 빨리 푸는 전략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질문을 던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0. 끝으로, 교수님의 이번 신간을 읽을 독자들께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당부의 말, 혹은 주의 깊게 읽어주기를 바라시는 부분에 대해서 말씀 주셔도 좋을 듯합니다.
이 책을 과거의 이야기로 읽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불, 바퀴, 문자, 화폐는 교과서 속 박물관의 유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금 우리가 매일 다루는 모든 것의 조상입니다. 150만 년 전 처음 불을 든 누군가의 손과, 오늘 아침 인공지능을 켜는 여러분의 손은 같은 손입니다. 그 긴 이야기의 가장 최근 페이지에 우리가 서 있다는 것, 그 감각으로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책을 덮은 뒤에 꼭 해 보시길 권하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속한 기업이나 산업의 미래 경쟁력을 가늠해보고 싶다면, 이 네 가지의 내일을 그려보십시오. 앞으로 에너지는, 물류는, 정보는, 자본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그 네 축의 미래 위에 당신의 산업을 올려놓아 보십시오. 그러면 막연하던 미래가 의외로 또렷한 윤곽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 책은 과거를 설명하는 책인 동시에, 바로 그 예측을 위한 도구로 쓰이기를 바라며 썼습니다.
제가 이 책에서 끝내 하고 싶었던 말은 한 가지입니다. 도구는 점점 흔해지고, 결국 사람만 남는다는 것입니다. AI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대신하게 될 때,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더 잘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는가’입니다. 그것은 기업에게도, 그리고 이 책을 읽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던져지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독자들께 답을 드리려고 이 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좋은 질문 하나를 함께 들고 서 있고 싶어서 썼습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끝내 베낄 수 없는 것, 그것은 당신이 왜 그 일을 하는가 입니다. 이 책을 덮으실 때, 그 질문 하나만 마음에 남는다면 저는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인류가 다섯 번째로 무언가를 몸 밖으로 떼어내는, 아주 드문 시대의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두려워할 일만은 아닙니다. 모든 도구가 그러했듯, 결국 그것을 어디에 쓸지는 우리가 정하니까요. 그 선택의 자리에 이 책이 작은 길벗이 된다면 기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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