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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문장 재조립, 요리하는 편집은 가슴 벅찬 일”

2026.07.03 03:07

[이름 없는 장인: 책 뒤에 숨은 문장]

<중> 오자의 숲 헤매는 편집자
게티이미지뱅크

독자가 책 한 권을 마주하기까지 저자의 이름 뒤에는 활자의 밀림을 묵묵히 개간해온 숨은 손길들이 있다. 기획 시리즈 ‘이름 없는 장인’ 두 번째 순서로 원고라는 원석을 다듬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기독 출판계의 편집장들을 만났다.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본사에서 만난 이들은 1989년 두란노에서 첫발을 디딘 후 현재 1인 출판사 아르카를 이끄는 37년 차 베테랑 이한민(62) 대표, 대중문화 잡지를 거쳐 74년 전통의 생명의말씀사에서 15년간 편집을 해온 서정희(55) 편집부장, 성공회 교단을 배경으로 깊이 있는 신학 도서를 출판해 온 비아의 민경찬(43) 편집장이다. 이들은 “편집자는 저자의 가장 날카로운 비판자이자 책이 나오는 순간 가장 열정적인 지지자”라고 입을 모았다.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에 기획 시리즈 ‘이름 없는 장인’ 인터뷰를 위해 모인 기독 출판계 편집장들. 왼쪽부터 민경찬 비아 편집장, 서정희 생명의말씀사 편집부장, 이한민 아르카 대표. 장진현 포토그래퍼

설계자, 요리사 그리고 도로공사

편집자가 현장에서 맡는 역할은 책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심축에 가깝다. 서 부장은 편집자를 요리사에 비유했다. “원고라는 재료를 요리해 먹음직스럽고 보기 좋게 담아내는 과정까지 설계하는 역할입니다. 기획부터 마케팅의 최종 단계까지 모든 소통의 교차로에는 편집자가 서 있죠.”

민 편집장은 축구팀 감독에 비유했다. “원고는 저자의 것이지만 책은 저자와 편집자의 공동 생산물입니다. 독자가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디자인과 주석, 문체 등 모든 시각적·내적 요소를 조화시키는 것은 물론 책 한 권을 완성하기 위해 외주 제작진과 전체 전략을 조율하고 책임지는 존재입니다.”

이 대표는 편집을 ‘도로공사’로 빗댔다. “저자의 글은 때로 콘크리트 트럭 같습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의 흐름을 재조립하고, 블로그나 SNS에 파편화된 글을 모아 단단한 단행본으로 재창조하는 격렬한 공정이지요.”

활자의 끌림, 평생 업으로

세 사람이 편집의 세계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한 편의 드라마 같다. 이 대표는 고교 시절 교회 회지를 등사기로 인쇄해 만들던 재미에 이끌려 두란노 모집에 이력서를 내며 평생의 업을 시작했다.

대학원에서 신문방송을 전공한 서 부장은 졸업 직후 IMF 외환위기를 맞았다. 취업난 속에서 첫발을 내디딘 곳은 기독교 문화 잡지사 ‘낮은울타리’였다. 이곳에서 활자 매체의 힘을 발견한 그는 이후 여러 곳에서 경력을 쌓았고 마흔에 생명의말씀사로 자리를 옮겼다.

민 편집장의 시작은 뜻밖의 인연에서 비롯됐다. 장교 전역을 하고 신학 박사 과정을 마친 뒤 진로를 고민하던 시절, 성공회 독서운동을 기획하며 출판 브랜드 ‘비아’를 준비하던 사제 친구가 갑작스레 리투아니아 여성과 사랑에 빠져 영국으로 떠났다. 공석이 된 출판 총괄 자리에 민 편집장이 전격 추천됐다. 그는 “대학원에서 꿈꿨던 신학적 방향성과 디자인, 텍스트의 결을 제 손으로 온전히 그려나갔던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고 회고했다.

저자 검증의 무게

오늘날 기독교 출판의 편집장들이 마주한 고민은 신뢰할 수 있는 콘텐츠의 생산과 독자층의 다변화다. 특히 기독교 서적은 독자의 삶과 신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에 저자 검증에 따르는 무게와 책임이 훨씬 크다.

서 부장은 “주제에 맞는 저자를 발굴하거나 투고 원고를 심사할 때 출신 학교나 출석 교회는 물론 안팎의 평판 조회까지 거치며 진정성을 확인한다”며 “신학적으로 모호한 대목이 발견되면 기획위원회나 교수진에 감수를 요청하는 등 보이지 않는 전초 작업에 많은 시간을 쏟는다”고 털어놨다.

민 편집장은 철저한 검증을 바탕으로 독서운동을 전개하며 새로운 독자층을 확보해 나간다. 동시에 향후 5년 동안의 방향성을 담은 장기적인 출판 지도를 그리기도 한다. 개별 도서의 판매량에 일희일비하기보다 시리즈의 통일된 색깔과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출판사 자체의 신뢰도를 쌓아가겠다는 전략이다.

이 대표는 변방에 있는 젊은 필자들의 진정성에 주목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독자들은 더 이상 저자의 화려한 직함에 속지 않습니다. 인지도가 낮아도 자신의 실존적 불안과 고민에 진정성 있는 답을 주면 제목만 보고도 책을 집어 듭니다.”

가슴 뛰게 한 책

오자의 숲을 헤치며 이들의 가슴을 울렸던 책은 무엇일까. 이 대표는 규장 시절 기획했던 이용규 선교사의 ‘내려놓음’을 떠올렸다. 당시 대세였던 ‘긍정’의 키워드를 따라 제목을 바꾸자는 논의가 분분했지만, 마감 직전까지 치열한 고심 끝에 원고의 본질을 살린 제목이 확정됐다.

“원고를 구성하고 최종 교정을 보느라 열 번 넘게 읽었는데 특정 대목에만 이르면 편집실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후, 제가 울었던 그 대목에서 독자들도 똑같이 울었다는 피드백을 듣고 편집자의 초심을 확인했습니다.”

민 편집장은 2023년 비아 10주년을 기념해 3년간 공들인 로완 윌리엄스의 ‘상처 입은 앎’과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교수의 ‘신학의 영토들’을 꼽았다.

“‘상처 입은 앎’을 작업할 때는 저자의 깊고 난해한 색채를 소화하기 위해 제 편집 능력부터 성장시켜야 했습니다. ‘신학의 영토들’의 경우 호텔에서 저자와 합숙하며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 내어 읽는 독회를 거쳐 세상에 내놓았고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서 부장은 무명 전도사의 원고가 내부에서 거절당하자 “이대로 사장하기엔 너무 아까운 원고다. 정식 출판이 안 되면 우리끼리 모금을 해서라도 책으로 만들어보자”며 뜻을 모아 성공시킨 서창희 목사의 첫 책 ‘내 인생,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를 언급했다. “편집자가 보며 가슴이 뛰었던 원고는 저자와 함께 만들어갑니다. 편집자가 사랑한 만큼 완성도가 높아지고 그 진정성을 독자들도 예리하게 알아챕니다.”

기꺼이 뛰어들 만한 낭만적인 업

출판계의 열악한 현실과 낮은 임금은 일반 출판사나 기독교 출판사나 크게 다르지 않다. 서 부장은 “기독교 출판계는 사실 더 사명감으로 버텨야 하는 영역”이라며 “그럼에도 이 업을 택한 후배들이 치열하게 책의 완성도를 고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오히려 선배로서 많이 배우고 깊은 존경을 느낀다”고 전했다.

이 대표는 “저자가 10년, 20년 치열하게 공부한 삶의 정수를 몇 달간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 함께 호흡하고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은 편집자만의 특권이자 영광”이라고 강조했다. 밤새워 눈이 짓무르도록 다듬은 원고를 향해 독자가 ‘책이 참 읽기 편하고 좋네요’라고 건네는 한마디면 모든 고생은 눈 녹듯 사라진다. 민 편집장은 “이 시대에 여전히 활자를 좋아하고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가장 낭만적인 이들”이라며 “무언가를 창조할 때 느끼는 기쁨은 어느 직군보다 크기에 기꺼이 뛰어들 만한 가치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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