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당신의 뿌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라고 있으니
2026.07.02 13:21
이유리 지음/ 청림출판 펴냄
"눈에 잘 띄지 않아도, 사람의 눈길을 끌지 않아도, 그들 역시 제 방식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벼꽃도, 은행나무꽃도, 땅속에서 피어나는 꽃들도-형형색색 화려하지 않아도, 누구의 시선에 들지 않아도-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꽃'이었다."(본문 중)
이 책을 보고나면 우리 곁에 피어난 꽃과 잎, 뿌리 내린 나무들을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테다. 너무 당연하고 흔해서 스쳐 지나가는 그것들이 우리의 삶과 너무나 닮아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
이유리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수십 년간 현미경으로 식물세포를 들여다보며 식물의 뿌리와 씨앗 속에서 수십, 수백 번의 계절 내내 길어 올린 삶의 태도를 얘기한다.
그는 자신의 인생 면면에서 식물의 생애와 닮은 모습들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깊은 땅속에서 움틀 시기를 기다리는 씨앗처럼 언젠가 만개할 날을 꿈꾸며 자신을 갈고닦던 독학사 시절부터, 땅속의 뿌리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묵묵히 한 길을 향해 나아가며 대학원, 박사후연구원을 거쳐 교수로 이어져 온 이력까지. 자신이 사랑하는 본질을 향해 끈질기게 나아간 그의 삶은 식물이 빛을 향해 끊임없이 몸을 비틀며 나아가는 굴광성(屈光性)과도 닮아있다.
그러면서 지은이는 식물의 생애가 비단 자신의 삶이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임을 얘기하며 응원을 건넨다.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은 포기가 아니라 다음 계절을 위한 전략적 비움이며, 겨울의 멈춤은 다가올 봄을 위한 치밀한 준비라는 것. 또한 식물에게 빛이 없는 시간은 성장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유한 작동이 시작되는 또 다른 시간이라는 것.
남보다 빨리 성공하지 못했다고 조급해하고, 남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도 지은이는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식물은 한 번도 남의 계절에 자신을 꽃 피운 적이 없다. 봄보다 먼저 꽃잎을 여는 매화가 있는가 하면, 한겨울 서리 속에서 붉게 피어나는 동백이 있고, 모두가 지고 난 가을에야 비로소 꽃을 여는 소국도 있다. 저마다의 때를 알고, 자신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피어난다. 그것이 지구상에서 초록 식물이 수억년간 살아남은 방식이었다.
맹그로브는 바닷물 속에서도 염분을 걸러내며 숨구멍을 찾고, 뿌리 없는 담쟁이는 혼자 서는 대신 누군가에게 기대며 더 높이 오른다. 사막의 선인장은 잎 대신 줄기로 숨을 쉬고, 틸란시아는 흙 없이도 공중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완벽하지 않아도, 주어진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삶임을 식물을 통해 말한다.
결국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가장 오래 빛나는 식물이라는 세계 속에서 지은이가 배운 것은 인생의 정답이 아니라 태도였다. 비바람에 흔들려도 꺾이지 않고, 태양을 향해 묵묵히 이파리를 뻗는 식물처럼, 우리의 삶도 각자의 속도로 찬란하게 피어날 수 있음을 강조한다.
평생 식물세포를 연구해온 과학자의 정밀한 시선과, 세월의 굴곡을 온몸으로 통과해 온 한 인간의 다정한 목소리가 함께 담긴 이 책은 읽는 이들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당신의 뿌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라고 있다고.
"앞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믿고 나아가야 한다. 뿌리처럼. 결국 우리를 앞으로 이끄는 건 선택 그 자체가 아니다. 그 선택을 끝까지 밀고 나아가는 단단한 의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 뿌리처럼 우리는 그렇게, 오늘도 다시 한 걸음 나아간다. 그렇게 내딛는 한 걸음이 결국 우리를 그곳에 도달하게 할 것이다."(본문 중)
260쪽, 1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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