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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의 문화난장] 17년째 ‘호국의 불’ 지키는 ‘비목’ 작사가

2026.07.02 00:14

이지영 문화스포츠부국장
가곡 ‘비목’의 작사가 한명희(87) 선생이 ‘호국의 불’을 밝힌 건 2010년 6월 25일부터다. 6·25전쟁 발발 60주년인 그날 강원도 화천 비목공원에서 열린 호국영령진혼제 향불에서 불씨를 받아 경기도 남양주 그의 집으로 가져왔다. 그 후로 16년 넘게 한 번도 불을 꺼뜨리지 않았다. 양초공장에 특별 주문해 만든 초를 엿새에 한 번씩 갈아준다. 그렇게 지켜온 ‘호국의 불’ 앞에서 선생은 매일 이렇게 기도를 한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강토가 영원하게 하옵소서. 영원히 이어지게 하옵소서.”

‘초연이…’ 지은 국악인 한명희
“대한민국 영원하게” 매일 기도
추념공원단지 조성이 남은 꿈
“문학관 등 아카이브 구축 필요”

한명희 선생이 지난달 28일 남양주 자택에서 ‘호국의 불’을 들고있다. 이지영 기자
선생은 서울대 국악과를 나와 국립국악원장을 지낸 국악인이다. 하지만 ‘초연이 쓸고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로 시작하는 가곡 ‘비목’의 작사가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달 28일 ‘호국의 불’ 앞에서 만난 선생은 ‘비목’의 노랫말에 대해 “호국영령들을 위로하고 속죄하는 마음을 담아 쓴 글”이라고 말했다.

TBC PD 시절 하룻밤 새 노랫말 완성
충북 충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6·25를 비교적 무탈하게 겪었다. 북한군이 고향 마을을 점령한 시기도 있었지만 집도, 가족도 무사했다. 그가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실감한 건 ROTC 육군 소위로 화천 비무장지대(DMZ) 백암산 계곡 초소에서 근무하면서다.

백암산은 6·25전쟁 격전지였다. 휴전 직전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한 혈투, 금성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전사자 수가 4만여명에 달했으니, 도처에 전쟁의 상흔이 아닌 것이 없었다. 막사 주변 빈터에 채소라도 심을 양으로 삽질을 하면 여기저기서 백골이 나왔다. 계곡마다 능선마다 탄띠와 수통, 녹슨 철모와 부러진 총대들이 나뒹굴었다. 전사자 유해발굴의 개념조차 없던 때였다. 꿈 많던 청년들의 장렬한 산화의 현장은 그렇게 방치되고 있었다.

“어느 초가을 순찰 도중 다 썩어가는 나무 푯대와 돌무더기 하나를 발견했다. 무명용사의 유택이 틀림없었다. 전우의 주검을 차마 방치하지 못해 대충 땅을 파고 그 위에 잔돌들을 쌓아 무덤을 지어준 것이다.”

6·25전쟁 정전 60주년인 2013년, ‘비목’의 배경이 된 강원도 백암산의 비목소공원을 방문한 한명희 선생. [중앙포토]
돌무더기 앞에 비석 대신 세운 ‘비목(碑木)’을 보며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 영혼에 대한 비애감이 몰려왔다. 스무살 안팎 인생의 꽃망울들이 피어보지도 못하고 적막공산 풀섶 속에 외로이 묻혀있구나. 그 분노 반 비탄 반의 감정은 이후 선생 인생의 한 축이 됐다.

그날의 기억을 담은 가곡 ‘비목’이 만들어진 건 선생이 제대 후 첫 직장인 TBC에서 PD로 일할 때다.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 ‘가곡의 오솔길’을 제작할 때였는데, 방송에 내보낼 우리말 가곡이 턱없이 부족했다. 지인들에게 부탁해 새 가곡을 만들어 틀었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로 시작하는 ‘기다리는 마음’,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로 시작하는 ‘얼굴’ 등이 그 당시 만들어진 가곡이다. 선생 역시 창작에 직접 나섰고, 하룻밤 만에 ‘비목’의 노랫말을 완성했다.

장일남 작곡가가 곡을 붙여 1969년 발표한 ‘비목’은 곧바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전쟁의 참상을 절제된 언어로 담아내며 한국전쟁 세대의 가슴을 울렸다. ‘비목’은 드라마 배경음악으로도 쓰이고 교과서에도 실리며 국민 애창가곡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6·25전쟁에 대한 사회적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비목’의 위상도 달라졌다. 한때 위령제·추모공연·사진전·가곡제에 하프마라톤·불꽃놀이까지 하며 화천 일대에서 성대하게 열렸던 ‘비목문화제’는 중단된 지 오래다. ‘비목’을 부르는 사람도 줄었다. 선생이 받는 ‘비목’의 저작권료는 월 10만원에 못 미친다. ‘비목’ 노래비와 비목탑이 설치된 화천 비목공원을 찾는 관광객도 예전 같지 않다고 했다.

“우리 세대 죽으면 6·25도 옛날 얘기”
그래도 호국영령을 기리는 선생의 마음은 여전하다. 오히려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이 줄어들수록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중요해졌다고 믿는다.

6·25전쟁의 참상을 담은 연가곡 ‘DMZ는 이렇게 말한다’를 지난해 완성한 것도 그 때문이다. ‘비목’을 포함한 14곡의 가사를 그가 쓰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지낸 이건용을 비롯한 이영자·이종구·진규영 등 베테랑 작곡가들이 곡을 붙였다. “그 이름 장하도다 영광의 대한민국”을 노래하는 합창 피날레는 전쟁의 폐허를 딛고 오늘의 번영을 일궈낸 우리 모두에 대한 찬가이기도 하다. 완성된 악보집도 출간됐지만 아직 무대에 올린 적은 없다. 하지만 그의 남은 계획 중엔 이 작품을 공연하겠다는 욕심은 없다. “만들어놨으니 됐다”고만 했다.

선생에게 꼭 이루고 싶은 꿈은 따로 있다. 바로 ‘6·25 추념공원단지’를 조성하는 것이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문학관·자료관·보은공원 등을 마련해 순국선열의 넋을 기리고 한국전쟁 관련 자료의 아카이브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 2004년부터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이기웅 열화당 대표,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등 가까운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뜻을 모으고 있지만 20년이 지나도록 구체적인 진척이 되지 않고 있다. “평화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6·25의 비극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라며 선생은 연신 안타까워했다.

“우리 세대가 죽으면 6·25가 임진왜란·병자호란 같은 먼 옛날얘기가 돼버린다. 동족상잔의 비참한 희생이 무관심 속에 묻혀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바로 전쟁 당사국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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