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메가프로젝트’ 호남 반도체…50년 불균형 바로잡나 [전문가 리포트]
2026.06.30 19:04
21세기에 읽는 한국 제조업 지도책
이재명 대통령은 6월29일 청와대에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를 열어 서남권(호남) 반도체 생산기지 조성을 공식화했다. 1일 출범하는 전남광주통합특별시에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가 총 800조원을 들여 각각 메모리 반도체 팹(생산라인) 2기씩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에스케이그룹 회장이 이날 직접 단상에 올라 광주·서남권 투자(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를 밝혔다. 이런 계획이 현실로 이어진다면 이재명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공업화를 뛰어넘는 규모의 투자와 인력 양성 등을 통해 대한민국 제조업의 새로운 시대를 연 산업정책의 주역으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번 발표를 두고 지역주의에 불을 붙이는 목소리들이 팽배하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영남 소외론과 지역 안배론이 분출하고 있다. “왜 호남인가” “호남 몰아주기다”라는 반발이 그것이다. 이런 반발을 의식한 듯 정부는 국민보고회에서 지역 균형발전 방안도 내놨다. 피지컬 인공지능 산업은 새만금과 대경권(영남)을 중심으로 키우고, 충청권과 강원에는 2035년까지 1천조원 규모의 인공지능 데이터 센터를 짓겠다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사실 반도체 클러스터 확장은 예견된 일이었다. 최태원 회장의 설명처럼 인공지능이 거대언어모델(LLM) 중심에서 피지컬 인공지능이나 실제 업무를 수행하는 에이전트형 인공지능으로 진화하면서 처리해야 할 데이터와 메모리, 센서 수요가 폭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국 정부와 빅테크(거대 기술기업)들이 인공지능 핵심 칩인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입도선매하기 위해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에게 러브콜을 보내던 흐름이, 이제는 젠슨 황이 삼성전자와 에스케이하이닉스 수장을 만나 치맥(치킨+맥주)을 청하는 시절로 바뀌었다. 메모리 반도체는 이미 수년 치 주문이 찼고, 하이퍼스케일러(엔비디아, 구글처럼 클라우드 컴퓨팅 및 데이터 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형 기술 기업) 투자가 지금 추세라면 팹 증설은 불가피하다.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를 둘러싼 논의가 예전과 달라진 것은 호남 지역에 반도체 생산공정 전체가 들어온다는 데 있다. 앞서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호남에 반도체 제조 후공정(패키징) 공장을 짓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후공정뿐만 아니라 전공정에 해당하는 팹(생산라인)을 모두 짓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국 제조업의 문제는 공간분업이 낳는 지역 격차다. 연구소·설계·기획 같은 구상 기능은 서울·판교·수원·용인 등 수도권에 결집해 있고, 비수도권은 최종 조립과 기자재·부품 공급이라는 실행 기능을 전담한다. 매출 500대 기업의 약 77%가 수도권에 본사를 두고 있고, 광주·전남·전북에 본사를 둔 기업은 3%에도 못 미친다. 생산직과 일부 관리직만 공급하는 비수도권이 청년에게 일자리를 충분히 주지 못하는 것이 핵심이다. 청년 1만명당 채용공고가 수도권은 282건인데 전남은 69건으로 전국 바닥이다. 1973년 중화학공업화 이후 ‘산업수도’를 자칭한 울산과 남동임해공업지구의 중화학공업들조차 연구소·엔지니어링센터는 서울·판교로 보내고, 지역 공장에서는 자동화와 하청에 기대 정규직을 잘 뽑지 않은 것이 최근 10년의 일이다.
그런데 반도체 팹은 공학 인력 활용도가 높다. 전문가 추산으로 팹 하나에 8천명가량의 공학 인력이 필요하고, 그중 학사 이상 엔지니어·연구직만 6천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팹이 4개면 적어도 1만~2만명의 대졸 인력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구상과 실행 기능이 분화되지 않고 클러스터에 함께 집결한다는 점에서, 반도체 산업은 연구소와 생산기지가 분리된 중공업과는 다른 게임 체인저다. 2030년대 중반 가동에 들어간다고 가정하면, 앞으로 10년간 해마다 1천~2천명 이상을 뽑아야 인력이 채워진다. 회사로서는 인재전쟁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셈이다. 조선업계가 1년에 많이 뽑을 때도 3사(에이치디현대중공업, 한화오션, 삼성중공업) 합쳐 1천명을 채우지 못했는데, 반도체 산업은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의 말처럼 “낯선 숫자들”을 고용 측면에서도 보여준다.
서울 청년이 지방으로 내려오느냐는 문제를 제쳐놓더라도, 당장 전남대·전북대·광주과학기술원(GIST)·한전공대 등 호남권 모든 대학의 반도체 공학 계열 학과와 공대 인원을 최대로 활용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지역의 우수한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인재들은 지역에 일할 곳이 없어서 살고 싶어도 떠난다는 말을 반복해왔다. 반도체 ‘투톱’의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는 지금까지와 차원이 다른 일자리 공급처가 된다. 글로벌 탑티어 인재를 어떻게 공급하느냐는, 당면한 지역의 노동시장 현안이 될 것이다.
지역주도성장이라는 균형발전 논리에서 중요한 쟁점은 두 가지다. 첫째,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1970년대부터 누적된 한국의 불균등 발전의 경로를 틀 수 있느냐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초기부터 철저히 경부축 중심이었고, 호남은 적어도 1980년대까지 산업 발전 축에서 비껴나 있었다. 유의미한 산업은 1970년대 야당을 중심으로 불거진 ‘호남 소외론’에 따라 정무적으로 배정받은 여수 정유·석유화학, 그리고 포항제철소의 방계인 광양제철소 정도였다. 제조업이 빈약하니 지역에서는 유통과 토건만 흥했고, 호남의 ‘말 많고 탈 많은’ 토목·건설업에 대한 시민사회의 논란 제기도 결국 주류 제조업의 저발전과 맞닿아 있다.
둘째, 호남 산업정책의 실패를 딛고 반도체 클러스터, 국가에이아이데이터센터, 현대차그룹의 새만금 로봇·에이아이·수소 거점, 신재생에너지 클러스터로 대표되는 이재명 정부의 산업정책이 새로운 지역주도성장 모델을 만들 수 있느냐다. 섬유산업 이후 ‘모바일 시티’, ‘메디시티’, ‘물 산업 도시’를 내세웠다가 최근에는 로봇 산업 육성에 힘을 쏟고 있지만, 어느 산업도 지역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자리 잡지 못한 대구처럼, 호남도 숱한 산업정책을 진행해 왔다. 전북 군산만 해도 그렇다. 1996년 대우자동차가 세운 공장(GM군산공장)은 2018년 폐쇄된 뒤, 2019년 명신 컨소시엄에 매각됐다. 2010년 1조2천억원을 들여 준공한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도 2017년 가동을 중단했고, 올해 6월 제이오션중공업에 7800억원에 매각됐다. 지엠공장이 문을 닫을 때 협력업체 노동자를 포함해 1만여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군산조선소 가동중단으로 협력사 60여곳이 폐업하면서 5천명에 가까운 이들이 군산을 떠났다.
두 곳이 함께 멈추자 군산 인구의 6분의 1인 7만여명이 생계를 위협받았다. 수백억원의 지방정부 보조금과 진입도로·인력양성 지원도, 본사가 ‘경제 논리’로 내린 철수·이전 결정 앞에서는 무력했다. ‘기업을 유치했더니 먹튀’라는 지역의 분노는 그래서 매번 되풀이됐다. 전북은 새만금을 30년 넘게 어떻게 쓸지 고민했으나, 올해 2월 현대차그룹의 9조원 투자 전까지 답을 찾지 못했다. 광주는 문재인 정부 내내 현대차 자회사 광주글로벌모터스(GGM)를 통해 ‘광주형 상생일자리’를 모색했지만, 저임금을 복지로 보상한다는 취지에도 광주가 약속한 주거·복리지원은 더디게 채워졌다. 노동조합 설립과 교섭이라는 정당한 노동권은 ‘무노조·적정임금’을 전제한 모델의 특수함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 갈등 속에서 상생일자리는 대안으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입증하지 못했다.
사례마다 고유한 실패 원인이 있으나, 종합하면 공간분업의 관점에서 본사와 생산공장이 분리된 ‘분공장’ 유치에 급급했다는 점이 가장 크다. 지엠의 경우, 연구개발(R&D)은 부평 본사와 글로벌 생산기지가 맡고 지엠군산공장은 ‘물량’을 받아내는 생산기지였다. 군산조선소도 호황기에 울산 본사의 잔여 ‘물량’을 받는 역할이었다. 광주글로벌모터스가 들여온 차종도 현대차의 주력인 제네시스·그랜저가 아니라 마이너 라인업인 캐스퍼였다. 연 20만대를 넘겨 90%를 수출하며 안착했지만, 자동차 증산을 위한 2교대 전환이 본사 판단에 묶이면서 생산량은 연 5만대 안팎에 머무르며 한계를 보였다. 다시 말해 이들 공장은 독자적인 산업 거점이 아니라 본사의 분공장에 머물렀기 때문에 경기와 경영 환경 변화에 취약했다.
앞서 필자는 지난해 10월 ‘전문가 리포트’(반도체 패권 경쟁 속 생태학적 위기)에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용수와 전력 한계에 직면할 경우를 대비한 대안으로 대구·경북(TK)과 충청권을 제시한 바 있다. 이는 기존 발전설비와 수계 편성의 이점 때문이었다. 아직 삽도 뜨지 않은 용인 팹을 가동하기 위한 고압 송전망 설치와 용수 조달을 위해 동원할 국가 역량을 고려하면, 50년간 발전 축에서 배제돼 온 호남에 투자하며 기술과 거버넌스로 해법을 찾는 일을 무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완공과 가동은 그보다 훨씬 먼 이야기다. 앞으로 우여곡절이 있을 수밖에 없다. 반도체 수요는 언제든 부침을 겪을 수 있기 때문에 착공과 완공 사이의 긴 시간 동안 투자 동력이 흔들릴 위험은 상존한다.
위험을 줄이는 길은 결국 두 가지다. 하나는 지역 인재에 대한 꾸준한 투자다. 팹이 필요로하는 1만명이 넘는 과학기술 인력을 지역 대학과 연계해 양성하고, 정주 여건을 마련해 이들이 지역에 머물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 교육과 연구, 반도체·에이아이 관련 창업과 사업 기회까지 뒷받침된다면 클러스터는 자연스럽게 활성화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착공부터 가동까지 끌고 갈 견고한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일이다. 팹의 성공적인 완공과 안정적인 운영은 물론, 호남이 목표로 하는 에너지 전환과 피지컬 에이아이 산업 육성도 결국 정부·지자체·기업·대학의 협업에 달려 있다.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투명한 의사결정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박정희 정권의 발전국가 프로젝트를 빼면 지역산업 정책은 사실상 성공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이번만큼은 호남에서 새로운 모범을 만들어 내야 한다. 기대만큼이나 신중한 진행이 필요한 때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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