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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전두환에 "폭탄" 같던 기사들, 이 미국인들이 지킨 광주와의 약속

2026.06.30 17:16

[내 이름은 원덕기: 동료들의 기억] 데이비드 돌린저·캐롤린 투르비필 "우리의 본보기였던 팀 원버그"5·18민주화운동 46주년 및 위르겐 힌츠페터 10주기를 맞아 다큐멘터리 영화 <내 이름은 원덕기>를 제작하기 위한 펀딩을 진행합니다. 엔딩 크레디트에 펀딩 참여자의 이름을 기재합니다. 대한민국, 그리고 광주를 사랑한 팀 원버그(한국 이름 원덕기)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에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펀딩 바로가기 https://omn.kr/2i36q <편집자말>

 팀 원버그, 데이비드 돌린저, 캐롤린 투르비필, 스티븐 헌지커에 의해 1980년 7월 보도된 5·18민주화운동 관련 스웨덴 등 외신보도와 관련해 외무부가 생산한 기밀문건 중 일부. "국보위 보고사항", "중앙정보부", "적절한 조치 강구", "봉사단원의 철수", "Ⅲ급비밀", "대통령 각하, 국무총리" 등의 문구와 함께 팀 원버그, 데이비드 돌린저의 이름이 보인다.
ⓒ 외교사료관 제공

5·18민주화운동이 "폭동" 취급되던 1980년 여름, 권력을 틀어쥐려던 전두환에게 "폭탄"(제임스 메이어 당시 미국 평화봉사단장 표현)과 같은 기사들이 터져 나왔다. 스웨덴 스톡홀름발 AFP·AP통신의 보도였다. "광주에 있던 미국 평화봉사단원 팀 원버그(Tim Warnberg)와 데이비드 돌린저(David Dolinger)"를 취재원으로 한 이 기사들은 5·18을 "한국 공수부대가 민간인을 죽인 야만적이고 무차별적인 학살"이라고 명확히 짚었다.

사실상 신군부의 수족이었던 한국 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즉시 반박 성명서를 발표했고 주한 미대사관을 통해 기사에 취재원으로 나와 있는 두 사람의 공개 부인을 요구했다. 더해 곧 입국할 예정이던 평화봉사단의 차기 단원의 파견 거부까지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이 기사들은 1980년 7월 두 차례(15, 20일)에 걸쳐 보도됐다. 광주에서 5·18을 직접 경험한 스물 다섯 청년 팀 원버그와 데이비드 돌린저는 1980년 5월 말 동료 평화봉사단원들에게 "잔혹했던 대학살"을 증언하고 사진, 메모 등이 수록된 자료집을 건넸다. 이를 받은 캐롤린 투르비필(Carolyn Turbyfill)과 스티븐 헌지커(Steven Hunziker)는 일본을 거쳐 스웨덴으로 향했고 "캐롤린 페리"와 "스티븐 클라크"라는 가명으로 제보에 성공해 5·18의 실상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

팀, 데이비드 그리고 캐롤린, 스티븐의 이름은 당시 외무부 기밀 문서에도 기록돼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해당 외신 보도들은 당시 내란 우두머리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으로 있고 신군부 강경파로 구성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도 보고됐다.

팀 원버그는 1993년, 스티븐 헌지커는 2014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특히 1978년 광주로 파견된 팀은 5·18을 아주 초기부터 목격했고 위 스웨덴 보도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5·18 당시 고 위르겐 힌츠페터(2016년 작고) 등 외신 기자의 통역을 돕거나 그들과 직접 인터뷰했으며 계엄군으로부터 광주 시민들을 보호하다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5·18을 경험한 후 팀은 의사가 되려던 꿈을 접고 한국학 전공을 택해 하와이대학 석·박사과정에 입학했고 이곳에서 1987년 영어권 최초의 5·18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지난 3월 16일과 19일 화상으로 인터뷰한 데이비드 돌린저(왼쪽)와 캐롤린 투르비필. 두 사람은 미국 평화봉사단 자격으로 한국에 머물며 팀 원버그와 함께 5·18민주화운동이 외신에 보도되도록 제보한 인물이다.
ⓒ 소중한

<오마이뉴스>는 팀과 함께 5·18을 직접 목격한 데이비드 돌린저(70)와 두 사람으로부터 받은 증언·자료를 받아 스웨덴으로 건너간 캐롤린 투르비필(71)을 각각 지난 3월 16, 19일 화상으로 인터뷰했다.

데이비드는 "광주 시민들이 우리에게 '목격한 것을 꼭 바깥에 알려달라'고 부탁했다"며 "우리는 그 약속을 저버릴 수 없었다"라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팀은 광주 시민들, 특히 5·18 당시 광주에서 살아남지 못한 이들에게 목소리를 주고 싶어했다"라고 강조했다.

"광주 시민들은 팀의 친구들이었고, 매일 만나던 이웃이었습니다. 그들은 팀에게 먼저 베풀었고, 따뜻하게 대해줬습니다. 팀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것이 팀이 광주 시민들에게 받은 호의와 사랑에 보답하는 방식이었습니다." - 데이비드 돌린저

대구에서 평화봉사단으로 근무하다 서울에서 만난 팀과 데이비드에게 5·18 자료를 받은 캐롤린은 이를 바지 안에 숨겨 출국하던 때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캐롤린은 일본에서 제보에 실패한 후 스웨덴까지 건너가 결국 광주에서의 참상을 알렸던 때를 떠올리며 "팀과 데이비드의 용기와 의지 덕분"이라고 말했다.

"광주 학살을 외부에 알리는 것은 두려웠습니다. 자료집을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팀과 데이비드는 엄청난 일들을 겪고도 계속 진실을 알리려고 했고 한국 정부와 미대사관에 맞섰으며 다시 광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저는 두려움마저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결국 (스티브 헌지커와 저는) 이를 알리고자 나서게 됐습니다."
- 캐롤린 투르비필

 고 위르겐 힌츠페터가 5·18민주화운동 중인 1980년 5월 24일 촬영한 인터뷰 영상의 화면을 갈무리한 것. 영상 속 인물은 미국 평화봉사단원 자격으로 광주에 머물던 팀 원버그(Tim Warnberg, 한국 이름 원덕기)다. 5·18기념재단이 보관하고 있던 이 영상은 그 동안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으며, 항쟁 한복판에 있던 인물의 현장 인터뷰는 5·18 관련 기록물 중 이 영상이 유일하다.
ⓒ 위르겐 힌츠페터, 5·18기념재단 제공

'주먹밥' 거절했던 그 마음

함께 평화봉사단원으로 선발돼 1978년 한국에 온 팀과 데이비드는 각각 전남대병원과 영암보건소에서 근무했다. 데이비드는 1980년 5월 24일 당시 전남도청에서 하룻밤을 지낸 유일한 외국인이며 2022년 회고록 <나의 이름은 임대운>을 출판한 뒤 2025년 광주 명예시민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데이비드는 함께 5·18을 경험했지만 자신과 달리 더 이상 증언할 수 없는 팀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아들 이름을 "팀"이라 짓고 회고록에 "팀을 기억하며"라는 장을 따로 쓸 정도로 팀을 향한 강한 애정을 갖고 있다. 인터뷰에서도 "팀이 언제나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한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며 1980년 5월 18일 늦은 저녁, 전남도청으로 향하던 길에서 팀을 만난 이야기를 꺼냈다.

"팀은 저와 함께 걸어가면서 5월 18일 오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줬습니다. 팀의 말에 따르면, 계엄군은 가리지 않고 모두를 구타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쫓아 가게 안으로 들이닥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팀은 그때 외국인이라는 신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끌어안아 보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팀이 개입할 경우 군인들은 대부분 폭행을 멈췄다고 했습니다." - 데이비드 돌린저

데이비드는 5·18의 상징인 "주먹밥"을 거론하기도 했다. 그는 "여성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들고 다니며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시민들은 우리를 보면 멈춰서 필요한 게 없는지 물어보곤 했다"라며 "대부분의 경우 팀과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도청과 도시 외곽에 있는 사람들을 비롯해, 정말로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 음식이 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회상했다.

 5·18민주화운동을 취재한 고 위르겐 힌츠페터의 촬영 테이프에 담긴 영상 갈무리.
ⓒ 위르겐 힌츠페터, 5·18기념재단 제공

데이비드는 항쟁 마지막 날인 5월 27일 새벽을 마치 어제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취재팀이 데이비드에게 "5월 27일"을 언급하자, 그는 곧장 울컥하는 모습을 보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때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당시 팀의 하숙집에 함께 있었다"라며 "우리는 확성기 소리에 즉시 깨어났고, '계엄군이 공격을 시작했으니 도청 앞으로 모이라'는 방송을 들었다"고 입을 뗐다.

"팀과 저는 즉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해가 뜨면 밖으로 나가 거리 상황을 관찰하고, 도청 쪽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더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고 그 중 우리가 아는 사람도 있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이 트기까지) 약 4시간 동안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왜 미국 정부는 개입하지 않는지, 어떻게 무고한 사람들이 죽도록 방치할 수 있는지 고민했습니다." - 데이비드 돌린저

해가 뜬 직후 최후의 항쟁지 전남도청으로 간 데이비드는 "파괴된 현장, 죽은 사람들, 내 친구들의 시신을 봤다"고 말했다. 그는 "군에 의해 도청에서 쫓겨난 후 팀을 만나 내가 본 모든 것을 이야기했고 그는 매우 분노했다"라며 "우리는 미국 정부가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에도 분노했고 사람들이 치른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바랐다"고 설명했다.

데이비드는 계엄군이 광주를 다시 장악한 그날 "외국인인 우리가 광주 시민과 함께 걷는다면, 자연스럽게 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라며 "그날 오후 대부분의 시간을 시민들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왔다"라고 덧붙였다.

우여곡절 끝 나온 기사 "그건 학살이었다"

팀과 데이비드는 직후 서울로 향했다. 항쟁 중 "서울로 당장 오라"는 주한 미대사관과 평화봉사단 본부의 지시를 어겼기 때문에 이를 소명하기 위해서였다. 데이비드는 당시를 떠올리며 "광주 시민들 곁에 있고 싶었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떠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어 "팀은 자신의 친구들이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어했다"라며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반드시 눈으로 목격하고, 그 현장의 증인이 되고자 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때 팀이 주로 작성했던 5·18 목격담을 들고 주한 미대사관을 방문했으나 미대사관은 우리의 면담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라고 덧붙였다.

데이비드는 또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우리가 본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입을 닫으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우리는 정반대로 행동했다"라며 "우리는 평화봉사단원을 포함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우리가 목격한 사실을 전했다"라고 전했다. 이때 두 사람은 캐롤린과 스티븐을 만나 광주의 참상을 알렸다. 데이비드는 당시 상황을 두고 "광주에서 벌어지는 일을 세계가 알도록 하겠다고 한 결심의 연장선이었다"며 "죽은 사람들은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없기 때문에 팀과 나는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일을) 멈추지 말자고 뜻을 모았다"라고 짚었다.

 미국 평화봉사단 앨범에 실린 스티븐 클라크 헌지커(Steven Clark Hunziker, 한국 이름 문성배)와 캐롤린 투르비필(Carolyn Turbyfill, 한국 이름 부경희)의 모습.
ⓒ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캐롤린은 서울에서 두 사람으로부터 광주의 참상을 듣고 사진, 메모 등이 첨부된 자료집을 받았을 때를 떠올리며 "분위기는 극도로 긴장돼 있었고, 그들(팀, 데이비드)은 괴로워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특히 다른 사람들은 끔찍한 피해를 입는 상황 속에서, 자신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점에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5·18이 다른 지역에서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이를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 캐롤린 투르비필

특히 캐롤린은 "팀은 계엄군에게 폭행을 당했는데도 다른 시민들이 겪은 폭행과 희생에 더 크게 아파했다"라며 "다른 시민들이 겪은 일에 비하면 자신의 일은 크지 않다고 했다"라고 전했다. 더해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염려하는 모습이 그의 용기와 세심함을 보여준다"라며 "주한 미대사관마저 그들을 위축시켰지만,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팀은 곧바로 광주로 돌아가 다시 시민들을 돌봤다"라고 강조했다.

캐롤린은 스티븐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두 사람은 "김대중이 이곳에서 납치된 적이 있다는 사실 등을 고려할 때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한 뒤 "중립국이기도 한 스웨덴"으로 향했다. 그렇게 보도된 "코리안 페이퍼즈(Korean Papers)"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이런 내용이 담겼다.

클라크(스티븐이 쓴 가명)와 페리(캐롤린이 쓴 가명)가 소지하고 있던 서류는 대부분 봉사단원 데이비드 돌린저와 팀 원버그, 당시 광주에 있었던 성직자들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3세부터 80세까지의 수백 명의 민간인을 죽인 야만적이고 무차별적인 광주 시민 학살극(Bestial indiscriminate slaughter of hundreds of Kwangju civilians aged 3 to 80)"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캐롤린은 이 보도 후 팀과 전화통화를 했다면서 "팀은 광주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이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알게 됐다는 것에 기뻐했다"고 떠올렸다.

"그는 광주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진 것에 대해 큰 지지를 보냈습니다. 그건 팀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이름을 사용한 건 실수였습니다. 팀이 광주에서 머물던 하숙집 가족들이 한국 정부로부터 위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정보기관은 뉴멕시코(미국 남서부에 위치한 주)에 있던 제 가족과 위스콘신(미국 중북부에 위치한 주)에 있던 스티븐의 가족도 찾아갔어요. 그래서 우리는 계속 외부와 연락을 끊고, 숨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 캐롤린 투르비필

 5·18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24일 전남대병원 옥상에서의 위르겐 힌츠페터(왼쪽 카메라를 든 인물)와 미국 평화봉사단원 팀 원버그(가운데 체크무늬 셔츠)의 모습. 그의 뒤편에 또다른 단원 폴 코트라이트와 데이비드 돌린저가 서 있다.
ⓒ 위르겐 힌츠페터, 5·18기념재단 제공

캐롤린은 또 "(보도 전후로 저는) 두려웠지만 그때마다 한국 시민들 그리고 팀과 데이비드가 처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버텼다"며 "5·18 보도를 이끈 건 지금까지 삶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 중 하나다. 나도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고 있는데, 그곳의 시민들은 훨씬 더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실은 여전히 한국과 북유럽에서의 일로 PTSD를 겪고 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인터뷰 이틀 전부터 잠을 거의 자지 못했고, 아마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도 이틀 정도는 못 잘 거 같아요. 그래서 저는 광주시민들이게 '그 일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한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계속 목소리를 내는 것 그리고 광주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항쟁을 경험한 이들을 지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캐롤린 투르비필

취재팀은 스웨덴 보도 직후 한국 정부의 상황이 담긴 외무부 기밀 문건을 데이비드와 캐롤린에게 전하기도 했다. 데이비드는 놀란 표정으로 "이건 처음 보는 것"이라며 "나는 그때도 한국 정부가 미국인을 죽일 배짱은 없다고 봤다. 오히려 이 사안(스웨덴 보도)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미국 정부를 압박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평했다.

캐롤린은 "우리가 한국 정부의 골칫거리가 됐던 것이죠?"라고 되물으며 "벌집을 제대로 들쑤신 모양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 정부가 그렇게 곤란해 했다니 오히려 기쁘다"며 "당시 미국에서는 보도가 거의 이뤄지지 않아 우리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문건을 보니 꽤 파장을 일으켰던 것 같아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5·18민주화운동을 경험한 팀 원버그가 미국 평화봉사단원 자격으로 광주에 머물던 중 한국인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는 장면. 오른쪽은 함께 5·18을 목격한 데이비드 돌린저.
ⓒ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영상으로 만난 죽은 친구

한편 팀은 1980년 5월 24일 독일 공영방송 ARD 소속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인터뷰에 응하기도 했다. <오마이뉴스>는 5·18기념재단에 보관돼 있던 이 인터뷰 영상을 발굴해 지난달 17일 보도했다. 이 영상은 5·18 관련 기록물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항쟁 중 인터뷰 영상이기도 하다(관련 기사 : [단독] 46년 만에 공개된 5·18 인터뷰, 힌츠페터가 촬영한 이 외국인의 정체 https://omn.kr/2i71h).

보도에 앞서 이 영상을 본 데이비드와 캐롤린은 요동치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친구의 46년 전 생생한 모습에 이들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인터뷰가 진행된 전남대병원 옥상에 함께 있었던 데이비드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팀을 앞으로 내세우며 그가 이번 일을 가장 가까이서 겪고 직접 목격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곳이 팀의 도시인 만큼 그가 직접 나서서 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진실이 반드시 알려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힌츠페터가 처음 광주에 왔을 때 무엇을 취재했는지, 어떻게 필름을 몰래 반출했는지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고, 그래서 그가 진실을 세상에 알릴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 데이비드 돌린저

스웨덴 보도 직후의 전화통화가 팀과의 마지막 대화였다는 캐롤린은 "팀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프다. 그는 정말 강인하고 용감했던 사람"이라며 울먹였다.

"팀이 했던 말과 팀이 보여줬던 행동은 정말 자랑스럽지만, 동시에 너무 슬픕니다. (우선) 그가 직접 목소리를 내고 인터뷰에 나섰다니 정말 자랑스럽네요. 정말 중요한 일을 해낸 거니까요. (하지만) 팀이 직접 자신이 남긴 영향을 보지 못하고 떠났다는 점에서 슬픕니다. 부디 팀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여겼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팀은 너무 자랑스러운 존재니까요." - 캐롤린 투르비필

 5·18민주화운동을 취재한 고 위르겐 힌츠페터의 촬영 테이프에 담긴 영상 갈무리.
ⓒ 위르겐 힌츠페터, 5·18기념재단 제공

데이비드와 캐롤린은 인터뷰 중 공통으로 "본보기(an example)"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캐롤린은 "팀으로 인해 나도 외신 보도를 이끌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팀은 나의 본보기"라고 말했다. 데이비드는 팀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전했다.

"팀은 닮고 싶은 사람(an example)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늘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저를 일깨우는(awakened)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연구와 경력에 깊이 몰두하며 한 방향으로만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얼굴을 한 대 얻어맞은 것만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팀이 죽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제 삶을 다시 돌아봤고 팀처럼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 데이비드 돌린저

미생물학·면역학 박사인 데이비드는 현재 인도 뱅갈루루에서 질병 관련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아들 이름을 팀(Tim) 으로 지은 것을 두고 "팀의 정신이 제 아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기를 바랐다"라며 "내 아이 역시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라고 설명했다.

"지금 팀이 제 앞에 있다면,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정말 짧고도 진심 어린 말이 될 것 같아요. 팀, 내 삶의 일부가 돼줘서 고마워. 제게 가장 중요한 건 누군가 내 삶의 한 부분이 됐다는 거예요. 그건 그 사람이 내 삶에 영향을 남겼다는 뜻이니까요. 우리 모두에게 그런 사람들이 있으면 좋겠어요. '내 삶의 한 부분이 돼줘서 고마워'라고 꼭 말해주고 싶은 사람들이요. 그들이 우리의 삶을 바꿔놓으니까요. 저는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팀에게 그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제 마음 한편에서는 팀이 이 말을 들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데이비드 돌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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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소중한 취재 소중한·전선정·김화빈·이진민·유지영
촬영 강상우·이희훈 편집 콘텐츠팜 호미
CG 김수연 타이틀 김소설 음향 DMC 사운드 비전 내래이션 이승준
펀딩 기획 장유정·이기종·봉주영
영상 제공 5·18기념재단·루먼 형제(Ben&Sam Luhmann)
영상 번역 자문 로버트 그라찬
사진·자료 제공 고진석·나경택·서나래·유경남·변재원·안영주·록산 원버그 윌슨·데이비드 돌린저·폴 코트라이트·캐롤린 투르비필·케빈 페어뱅크스·로버트 그라찬·5·18기념재단·5·18민주화운동기록관·외교사료관·박지원 의원실
촬영 협조 5·18기념재단·5·18민주화운동기록관·전남대병원·전일빌딩245·국가보훈부·별밭·필로스팅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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