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남북 32차례 핵 협상 기록 공개…“놈” “깡패” “머리카락도 없는데”...막말·조롱 난무
2026.06.30 10:37
통일부는 30일 최초로 남북 당사자 간 북한 핵 문제를 협의했던 시기의 회담 문서를 공개했다. 그동안 비공개로 관리됐던 남북회담 문서 공개는 2022년 첫 공개 이후 이번이 여덟번째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는 총 3836페이지 분량으로 1991년12월 세차례에 걸쳐 진행된 ‘핵문제 협의를 위한 대표접촉’(1단계)과 1992년 2월~3월 7차례 열린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구성·운영을 위한 대표접촉’(2단계), 1992년 3월~1993년 1월까지 이뤄진 회의 및 위원·위원장 접촉 22회(3단계)의 기록이 담겼다.
이 기간 남북 간 핵 협상은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1991년 11월 ‘비핵화 선언’과 북한의 비핵지대화 논의가 맞물리면서 진행됐다. 당시 남측은 북한에 핵처리·농축 시설 포기,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안전조치협정 즉각 체결·비준, 일반 핵시설과 군사기지에 대한 사찰 횟수를 상호주의 원칙에 의해 동수로 하자는 상호주의·동수사찰, 의심되는 시설을 성역 없이 강제로 들여다보는 특별사찰 제도 도입, 시범사찰 실시 후 본격 사찰로 전환, 사찰 규정을 먼저 채택한 뒤 이행합의서 논의 등을 요구했다. 북측은 주한미군 핵무기와 핵기지 전면사찰을 핵심 요구사항으로 제시하면서 한미 연합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을 협상의 전제 조건으로 반복적으로 제기했다. 우리측이 요구한 상호주의·동수사찰은 거부했으며 영변의 핵시설을 보여주는 대신 남한 내 모든 주한미군 기지를 사찰대상에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북한은 이행합의서를 사찰규정보다 먼저 채택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IAEA 사찰을 이미 6차례나 받은 만큼 북핵 의혹은 해소됐다며 남측의 특별사찰도 거부했다.
남북 핵 협상 1단계 기간만 하더라도 남북은 3차례에 걸쳐 이뤄진 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 기간 3차 대표접촉에서 우리 국방부는 1992년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을 발표하고 북한 외교부는 국제핵사찰 수용 성명을 냈다. 이어진 2단계 회담 기간 남북은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구성·운영 합의서’를 채택했으나 북한의 거부로 시범사찰·사찰 규정 시한 조항은 합의서에서 삭제됐다. 이후 3단계 협상 기간 사찰규정 채택을 위한 실무협상이 이어졌으나 남북은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다. 북한은 결국 1993년 1월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를 빌미로 협상을 사실상 결렬시켰고 위원장 접촉을 끝으로 협상은 중단됐다.
이 기간 이뤄진 남북 핵 협상은 남북대화 역사상 가장 거친 거친 말을 주고 받은 회담으로 기록됐다.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구성·운영을 위한 제6차 대표접촉(1992년 3월 10일) 당시 남측 임동원 대표는 북측에 핵시설 사찰의 실효성을 높이는 요구를 했으나 북측이 “강도적 주장” “깡패 논리”라는 막말로 거부하자 북측 대표였던 최우진 외교부 순회대사를 향해 책상을 치면서 “핵 문제 토의하는 사람이 핵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하는 놈이 어디…(있느냐)”라고 했다. 이에 북측 대표는 똑같이 책상을 치며 “야! 어디 책상을 쳐!”라며 목소리를 높이면서 회담장은 양측 대표 간 고성이 오고갔다. 1993년 1월 핵통제공동위 위원장 접촉에서 북측의 최 위원장은 상호 사찰 수용을 촉구하는 우리측 공 위원장을 향해 “자기 정신인지 모르겠다” “음력설 3일 동안 놀더니 자기 정신이 다 나간 거 아니냐”는 막말을 하기도 했다.
북측 대표가 우리측 대표의 외모를 비하하는 일도 있었다. 북측 최우진 대표는 당시 탈모가 있었던 우리측의 공로명 대표를 향해 “공 위원장 머리카락 없는데, 괜히 모자 안 쓰고 나갔다가 햇볕에 쬐게 되면 건강에 나쁘다”고 조롱했다. 당시 공 대표는 흥분 상태로 열변을 쏟아내는 북측 최 대표에게 ‘우황청심원’을 건네며 진정시키기도 했다.
북측 대표가 흥분한 나머지 우리측이 건넨 김일성 사진을 찢고 사색이 된 일화도 있다. 1992년 12월 핵통제공동위 제13차 회의에서 공 위원장은 외세와 결탁해 남침을 저지른 주체는 되레 북측이라며 참고자료로 김일성과 스탈린의 사진이 게재된 남측 신문을 건네자 북측의 최 위원장은 “그런 건 가져가라”며 보란 듯이 사진을 북북 찢었다. 이에 우리측 공 위원장이 “위대한 지도자 사진인데, 왜 찢느냐”고 말하자 북측 대표단은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듯 동시에 “완전히 도발”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이번 회담 문서 공개 예비심사위원장을 맡은 정승훈 전 통일부 남북회담본부장은 “남북이 32례나 회담을 했음에도 양쪽 모두 초기 입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하고 양보하지 않았다”며 “되돌아보면 그때 (핵개발) 초기 단계에서 우리가 당시 실현 가능했던 카드로 (협상)에 접근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핵능력 고도화는)막을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정 위원장은 “당시 남측은 IAEA보다 고강도 사찰을 북측에 요구했고 북측의 군사기지를 포함 불시 사찰에 응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사실 북측이 수용하기 쉽지 않은 강압적 사찰 조건이었고 유인책 없이 압박성 레버리지만 사용한 건 우리 협상력 측면에서 아쉬운 대목”이라고 했다. 정 위원장은 당시 대선에 이은 정부 교체 시기여서 노태우 정부가 협상의 유연성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평가도 있다고 전했다.
이번에 공개된 남북회담 문서 원본은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및 북한자료센터, 국립평화통일민주교육원, 국회도서관, 국회부산도서관, 호남권 통일 플러스 센터에서 열람할 수 있다. 이번 8차 공개때부터는 문서 열람 장소를 경기·강원·충청권 통일 플러스 센터까지 확대해 전국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저작권 보호를 위해 본문의 일부만 표시됩니다.
원문 보기 →댓글 (0)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김일성의 다른 소식
모든 소식을 불러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