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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사진 찢고 탈모 조롱까지‥35년 전 북핵 협상의 실패

2026.06.30 14:43


TV 화면을 통해 보는 국가 정상들의 만남은 언제나 외교적으로 완벽에 가깝습니다. 자로 잰 듯한 동선과 카메라 워킹, 세련된 미소와 제스처까지 모든 것이 철저하게 기획된 것처럼 보입니다. 회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공동 성명 역시 조사 하나까지 치밀하게 조율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죠.

하지만 이처럼 매끄러운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실무진들이 물밑에서 벌인 치열한 고투는 상상 그 이상일 겁니다. 하물며 그 무대가 '남북회담'이었고, '핵'이라는 가장 민감한 의제를 다루는 자리였다면 실무진이 느꼈을 압박은 짐작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상대방을 상대로 양보를 이끌어내야 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총성 없는 대결과 다름없으니까요.

35년만에 공개된 판문점의 '날 것'

그런 의미에서 최근 통일부가 35년 만에 비밀 해제한 남북 핵협의 회담의 실제 대화록은, 남북이 처음으로 '핵'이라는 단일 주제를 두고 마주 앉았던 역사적 순간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991년 12월부터 1993년 1월까지 총 32회에 걸쳐 진행된, 핵협상 기록 3천 836쪽 분량입니다.

더군다나 1991년 말, 당시는 한반도 주변 정세가 그야말로 급박하게 돌아가던 시기였습니다. 소련이 해체되며 수십 년간 이어온 냉전 체제가 막을 내렸고, 남한은 러시아, 중국 등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를 확대하며 북방외교를 확대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북한 영변 핵시설이 가동 중인 것을 넘어 이미 플루토늄 재처리까지 시도하고 있다는 경고음이 나오고 있었죠.

흥미롭게도 그해 9월 남북한은 UN에 동시 가입했습니다. 명실상부한 '정상국가'로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핵의혹을 수습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9월 미국의 전술핵 철수 선언과 11월 노태우 대통령의 한반도 비핵화 선언이 잇따랐습니다. 12월에는 서울에서 열린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을 계기로 남북은 핵 문제를 전담할 실무대표접촉을 갖기로 전격 합의하게 됩니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양측 실무단은 어떻게든 공동 성명문을 도출해야만 하는 무거운 과제를 안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처럼 전 세계의 눈이 판문점으로 쏠린 상황에서 핵협의 첫 회의가 열린 겁니다. 기싸움이 치열했던 그해 12월 26일, 평화의 집에서 오간 남북의 첫날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핵문제' 협의를 위한 제1차 대표접촉 (1991년 12월 26일)

북(최우진): 악수를 해달라?
남(이동복): 악수를 한 번 더 해요?
남(임동원): 악수는 많이 할수록 좋아요.
북(최우진): 우리는 악수는 많이 해줄 수 있습니다. (쌍방 웃음)


시작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긴장을 풀려는 듯 가벼운 농담이 오갔고, 남북 대표단 사이에는 작은 웃음이 터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남측이 '북한은 핵안전조치협정을 즉각 체결하고 국제핵사찰을 수용하라'는 내용의 기조 발언을 마치자, 북한의 반응은 차갑게 얼어붙었습니다.

북(최우진): 임동원 대표의 발언을 듣고 한마디로 말하면 상당히 유감스럽고 실망스럽습니다. 우선 마치 우리가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처럼 전제하고 대화 상대방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 이거 온당치 못합니다. 우리는 핵무기를 개발할 의사도 없고 능력도 없고 필요도 없고 써먹을 데도 없습니다. 이런 입장을 명백히 밝혔으면 믿어야지, 믿지 않고 횡설수설하며 걸고 드는 것은 아주 온당치 못한 태도입니다.


북한은 핵 문제가 남한이 아닌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단둘이 얘기할 문제라며 선을 그었습니다. 오히려 남한에 미국의 핵무기가 2,000여 개나 배치되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왜 자신들만 잘못한 것처럼 몰아가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나아가 남측이 제안한 '비핵화'가 아니라, 미군의 핵우산까지 완전히 걷어내는 '비핵지대화'를 해야 한다고 맞받았습니다.

남측도 북한의 의도를 직접 찌르며 논쟁은 정점으로 치달았습니다.

남(이동복): 북이 또 시간을 벌어서 발을 끌려고 한다는 의혹을 없애주는 것이 북을 위해서도 좋고 남을 위해서도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구체적인 시한이 나오는 것입니다.


거친 고성·비속어 난무‥험난한 실무 협상

시간을 끌지 말라는 남측의 압박과 핵 개발 의혹 자체가 모욕이라는 북측의 반발은 그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새밑날까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파국만은 막아야 한다는 압박 속에 남북은 세 차례 대표접촉 끝에 의견을 조율해 나갑니다. 마침내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이 도출됐습니다.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문 총리 서명 (1992년 1월 20일)

남북도 처음엔 행동 대 행동으로 화답했습니다. 북측은 IAEA 사찰을 수용하겠다는 성명을 공식 발표했고, 남측은 한미 연합 팀스피릿 훈련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싸움은 합의문 조항 뒤 '실무 검증' 단계에서 시작됐습니다. 비핵화 선언의 구체적인 이행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대표접촉이 7차례나 더 진행되었지만, 양측 입장은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특히 북측이 사찰 방식과 기한을 끊임없이 문제 삼으며 '지연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하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남(임동원) : 최대표가 뭐 영변에 조그마한 원자로 하나 있는데 불과 하다는데, 이게 대표들이 자기 영변에 어떤 핵시설을 갖고 있어서 무엇이 문제가 되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는 사람하고 얘기할라니 정말 답답하구만, 정말 답답해요. 우리는 내 손금을 본듯이 훤히 알고 있어요. 과학 장비를 통해가지고 가장 최신의 장비, 옛날 것부터 축적된 장비를 다 알고 하는 얘기입니다.
북(최우진) : 임대표, 난 그럼 무식하니까 상대가 안돼요? 똑똑히 말해보라요.
남(임동원) : 아니, 알고 그러는지, 알고도 억지로 그러는지.
북(최우진) : 아니 나에 대한 자격 문제를 논의하오?
남(임동원) : 내가 얘기하는데 왜 끼어들어 (중략) 핵문제 토의하는 사람이 핵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하는 놈이, 어디‥‥
북(최우진) 야! 어디 책상을 쳐!


물밑에 쌓이던 상호 불신과 팽팽한 신경전이 1992년 3월 제6차 대표접촉에서 터져 나온 겁니다. 외교적 수사나 예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날 것 그대로의 감정과 비속어가 난무했습니다. 상대의 외모를 겨냥한 노골적인 조롱도 있었는데, 탈모가 있었다는 공로명 대표를 향해 북측 최우진 대표는 "공 위원장 머리카락 없는데, 괜히 모자 안 쓰고 나갔다가 햇볕에 쬐게 되면 건강에 나쁘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수령은 왜 찢어? 불신으로 멈춰 선 비핵화

북한 입장에서 그야말로 '아찔한' 돌발 상황도 있었습니다. 1992년 12월 핵통제공동위 제13차 회의, 남측 공로명 위원장은 "외세와 결탁해 남침을 저지른 주체는 되레 북측"이라고 강하게 몰아붙였습니다. 그러면서 참고자료라며 김일성과 스탈린의 사진 사진이 실린 남측 신문을 건넸습니다. 그런데 상황을 오판한 최우진 북측 위원장이 "그런 건 가져가라"며 신경질적으로 사진을 찢어버립니다.

남(공로명) : 외세, 외세하기 떄문에 내 지금 누가 외세에 의존적이냐, 사대적이냐 하는 사진을 하나 가지고 왔어. 역사적인 문건, 내 이거 참고로 드릴게요.
북(최우진) : 그런 건, 가져가세요.
남(공로명) : 아니, 아니, 아마 필요할거요.
북(최우진) : 또, 또, 그…
남(공로명) : 왜 그, 저, 위대한 지도자 사진인데.… 왜 찢습니까!


공 위원장이 "왜 위대한 지도자의 사진을 찢느냐"고 허를 찔렀고, 그제야 자신들이 수령의 사진을 훼손했다는 사실을 파악한 북측 대표단은 새하얗게 질렸다는 후문이 전해집니다.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제3차 회의(1992년 4월 21일) 남북 대표단의 모습.

결국 마지막 위원장 접촉까지 총 22차례나 핵통제공동위가 열렸지만, 남북은 끝내 상호 사찰 규정조차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이 실패를 기점으로 어렵게 물꼬를 텄던 남북 관계도 다시 후퇴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평가입니다.

남북회담 문서를 공개 심의한 위원들은 결렬 책임이 쌍방 모두에게 있다고 지적합니다. 우선 처음부터 핵개발 의혹을 해소하려는 진정성 없이, 오직 시간을 벌기 위한 전략으로 일관한 북측의 불성실한 태도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힙니다. 박용한 한국국방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측은 정작 자신들의 핵 문제는 남측이 아닌 IAEA와 단둘이 처리하려 했고, 남측을 상대로는 주한미군의 기존 핵시설만 들여다보겠다고 강하게 요구했다"며 남북 간의 동상이몽을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한 채 지나치게 경직된 태도를 보인 남측의 협상력 한계도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정승훈 전 남북회담본부장은 "당시 남측은 북측의 민감한 군사기지까지 포함해 언제든 불시에 사찰에 응하라고 요구했는데, 이는 북측 체제 특성상 도저히 수용하기 어려운 강압적인 조건이었다"고 짚었습니다.

정승훈 전 남북회담본부장도 "남측은 북측의 군사기지도 포함해 불시 사찰에 응하라고 요구했는데, 이는 북측이 수용하기 쉽지 않은 강압적 사찰 조건"이라며, "유인책 없이 압박성 레버리지만 사용한 것은 우리 협상력 측면에서 아쉬운 대목"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적절한 유인책 없이 오직 압박성 레버리지만 흔들었다는 겁니다. 또 당시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정권 교체를 앞둔 시기라, ‘레임덕’에 빠진 노태우 정부가 과감한 유연성을 발휘하기엔 현실적인 한계가 분명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이번에 공개된 3천 836쪽의 기록들은 결국 남북 간의 철저한 불신과 협상력의 한계 속에서 한반도 비핵화 협상이 어떻게 결렬로 이어졌는지를 보여주는 명확한 근거로 남게 되었습니다.

공개된 남북회담 문서 원문은 통일부 남북회담본부와 북한자료센터, 국립평화통일민주교육원, 경기·강원·충청·호남권 통일플러스센터, 국회도서관, 국회부산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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