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 난무했던 90년대 남북核협상…북측, 실수로 김일성 사진 담긴 南신문 찢고 ‘안절부절’
2026.06.30 13:56
남측, 북측 대표 ‘놈’ 표현 강공
북측대표 “남측은 깡패, 도둑”
南공로명에 ‘탈모’ 외모비하도
북측대표 “남측은 깡패, 도둑”
南공로명에 ‘탈모’ 외모비하도
“머리카락 없는데 괜히 모자 안 쓰고 나갔다가 햇볕에 쬐게 되면 건강에 나쁘다”(북측)
1994년 1차 북핵위기 직전 남북 간 핵 협상은 예상보다 더욱 치열하게 전개됐다. 양측 모두 격앙돼 있던 당시 현장의 분위기는 30일 통일부가 공개한 3836쪽 분량의 남북회담 문서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번 문서 공개는 2022년 5월 최초 공개 이후 여덟 번째 공개다. 1991년 12월부터 1993년 1월까지 총 32회에 걸쳐 진행된 남북 간 핵 협상 일지가 기록돼 있다.
1990년대 초는 북한의 핵 개발 의혹이 증폭되고 있던 때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1991년 9월 제46차 유엔총회 연설에서 남북 핵문제 협의 추진 용의를 표명했다. 그는 이어 11월에는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구축을 위한 선언’을 내놨고, 남북 간 핵 협의가 성사됐다.
남북은 협상 초기인 1991년 12월 ‘핵문제 협의를 위한 대표접촉’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도출했다.
1992년 1월에는 남북 합의에 따라 북측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수용 성명을, 남측은 한미 연합 ‘팀스피릿’ 훈련 중단을 각각 발표했다.
사찰 사실상 거부한 북측…시작된 감정 싸움
그러나 실제 핵 사찰을 두고 북한은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1992년 3월 ‘남북 핵통제공동위원회(이하 핵통제공동위)’ 구성·운영을 위한 6차 대표 접촉에서 남과 북은 서로 시쳇말을 쓰며 날카롭게 대립했다.남측 대표인 임동원 당시 통일원 차관은 북측 대표인 최우진 당시 외교부 순회대사를 향해 책상을 치며 “문제 토의하는 사람이 핵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하는 놈이 어디있느냐”고 소리쳤다.
최 대표가 사찰 시한을 명시하지 말고 위원회부터 먼저 발족시키자고 주장하면서 북한 영변 플루토늄 생산시설의 존재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는 데 대한 분노였다. 최 대표는 영변 핵 시설 수준에 대해 “조그만 원자로 하나가 전부”라는 취지로 말했다.
그는 또 남측이 핵시설 사찰의 실효성을 높이자고 제안하자 “강도적인 주장을 누구한테도 하지 말라. 이는 깡패의 논리”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한반도 외세 개입 설전 중 북측, 김일성 사진 찢어
같은 달 열린 7차 대표 접촉에서 결국 핵통제공동위가 구성됐으나 상호 사찰 방식 등에 대한 협의에는 진전이 없었다. 북측이 논의를 여러 달 동안 지연시키자 남측은 팀스피릿 훈련을 재개할 수도 있다고 압박했다.남북 간 기싸움은 1992년 12월 핵통제공동위 제13차 회의에서 폭발했다. 북측이 한반도 문제 해결에 외세(미국)를 끌어들인다고 강하게 반발한 데 대해 남측 위원장인 공로명 당시 외교안보연구원장은 6·25 전쟁을 언급했다.
공 위원장은 외세와 결탁해 남침을 저지른 주체는 북측이라면서 참고자료로 김일성과 스탈린의 사진이 게재된 남측 신문을 북측에 건넸다.
앞서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 김일성이 스탈린으로부터 남침 계획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소련 외무부 비밀문서들이 구소련 붕괴 후 공개된 바 있다.
최우진 북측 위원장은 받기를 거부하며 해당 신문을 찢었다. 공 위원장은 이에 “위대한 지도자 사진인데, 왜 찢느냐”고 말했고, 최 위원장 등 북측 인사들은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다. 그러면서 “완전한 도발”이라며 크게 반발했다.
이번에 공개된 회담 문서에는 최 위원장 등의 반응이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지 않지만, 외교가에 따르면 당시 최 위원장은 김일성의 사진을 찢었다는 사실을 인지한 직후 사색이 됐다고 한다.
‘탈모’ 인신공격도 수 차례…끝내 협의 결렬
감정 싸움의 장이 된 핵통제공동위에서는 인신공격까지 오고 갔다.사찰 방식과 기한 등에 대해 북측 안을 수용하라며 흥분 상태로 열변을 토하던 최 위원장에게 공 위원장은 우황청심원을 꺼내며 진정시켰다.
최 위원장은 이에 “이제 보니 공 위원장이 약을 잡숫는 것 같구만. 혈압이 올라가서”라며 비아냥댔다. 한 회의에서는 최 위원장이 “공 위원장 머리카락 없는데 괜히 모자 안 쓰고 나갔다가 햇볕에 쬐게 되면 건강에 나쁘다”고 말했다. 그는 “대동강에 놀러 나갔는데 햇볕이 쎄서 머리가 벗드러진(벗겨진) 공로명이 생각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핵통제공동위는 마지막 접촉까지 총 22차례 열렸지만, 상호 사찰 규정도 마련하지 못한 채 협의는 최종 결렬됐다.
이후 팀스피릿 훈련은 1993년 3월 재개됐다.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및 국제원자력기구(IAEA) 안전조치협정 파기를 선언했다. 1994년 ‘1차 북핵위기’의 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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