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 전
[디깅노트] 외산 장악한 안방, 1200억 게임펀드의 숙제
2026.06.30 09:00
자금 가뭄에 시달리던 업계에는 단비다. 정부는 이를 'K-게임 성장 사다리'라고 불렀다. 다만 사다리가 놓였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어디를 향해 놓이느냐다. 국내 모바일 게임 시장의 변화는 그 질문을 더 무겁게 만든다.
모바일인덱스 기준 올해 6월 국내 모바일 게임 매출 1위는 중국 센추리게임즈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WOS(화이트아웃 서바이벌)'였다. 월 매출은 331억원으로 추정됐다. 2024년 7월만 해도 173억원으로 5위에 머물던 게임이다. 같은 기간 매출 정상을 지키던 엔씨의 '리니지M'은 414억원에서 223억원으로 줄며 4위로 내려앉았다. 오딘, 리니지2M, 리니지W 등 한때 상위권을 채우던 국산 대형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도 줄줄이 순위가 밀렸다.
초고과금 이용자에 기댄 한국식 MMORPG 모델이 이용자 피로 누적 속에 성장 한계에 닿았다는 신호다. 과거 국내 모바일 게임 시장의 매출 상단은 대형 MMORPG가 떠받쳤다. 그러나 지금은 그 자리를 중국 전략·생존 장르가 빠르게 메우고 있다.
외산 게임의 약진은 특정 장르에 그치지 않는다. 올해 6월 매출 톱10 가운데 6개가 해외 게임이다. WOS와 '킹샷', '라스트 워' 같은 중국 전략·생존 장르가 상위권을 차지했고 서구권과 여성 이용자를 겨냥한 머지 퍼즐 게임 '가십하버'도 102억원으로 9위에 올랐다. 한때 비주류로 여겨지던 가볍고 직관적인 캐주얼 장르가 매출 상위권에 진입한 것이다. 이용자 취향이 옮겨가는 흐름을 글로벌 게임사들이 한국 안방에서 더 기민하게 포착했고, 그 결과 국내 모바일 차트의 주도권도 빠르게 외산으로 기울고 있다.
더 뼈아픈 대목은 인기 차트다. 매출 차트에는 아직 리니지M, 메이플 키우기, 승리의 여신: 니케 같은 국산 IP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용자 수 기준 인기 순위에서는 국내 게임의 존재감이 더 옅다. 올해 6월 인기 차트에서 가장 가파르게 치고 올라온 신작은 49계단 상승한 '이환'이었다. 중국 퍼펙트월드가 만든 오픈월드 역할수행게임(RPG)이다. 인기 톱10에 든 한국 게임은 화투 게임 '피망 뉴맞고' 정도가 전부였다. 새 이용자를 끌어들이는 신작마저 외산 게임인 셈이다.
물론 국내 업계도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니다. 넥슨 IP를 활용한 방치형 RPG '메이플 키우기'가 월 매출 285억원으로 매출 2위에 올랐고, 인디 기반 '운빨존많겜'도 매출 10위를 지키며 선전했다. 무거운 장르에서 벗어나 캐주얼·방치형으로 노선을 트는 시도가 일정 부분 성과를 낸 셈이다.
다만 대형 MMORPG가 빠져나간 시장을 메우기에는 허리가 여전히 부실하다. 여기에 국내 메이저 게임사들이 모바일의 한계를 인식하고 글로벌 PC·콘솔 시장으로 개발 역량을 옮기면서 생긴 국내 모바일 시장의 공백을 외산 게임이 선점하는 구조도 겹친다. 국내 모바일 시장에서 한국 게임이 기존 IP로 벌지만 새 얼굴을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규 IP를 키우자는 펀드의 문제의식이 타당한 이유다.
그러나 방향이 옳다고 결과까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펀드가 넘어야 할 첫 관문은 운용 독립성이다. 넥슨이 588억원을 출자한 만큼 펀드가 내건 '오픈 생태계'가 실제 운용에서도 지켜지는지가 관건이다. 넥슨이 직접 퍼블리싱하지 않는 외부 IP까지 투자하겠다는 취지는 긍정적이다. 다만 유망 IP가 특정 대형사의 선점 통로로 비칠 가능성을 차단하는 장치도 필요하다. 출자자의 전략적 이해와 초기 개발사 육성이라는 정책 목적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지킬지가 펀드의 신뢰를 좌우한다.
돈만으로 메울 수 없는 공백도 있다. 펀드는 시드부터 시리즈A까지의 자금 공백을 겨냥한다. 옳은 조준이다. 하지만 한국 게임이 정작 약해진 지점은 자금만이 아니다. 글로벌 이용자가 반응할 신규 IP를 설계하는 기획력, 장기 서비스에 앞서 초기 재미를 증명하는 제작 방식, 특정 과금 구조에 기대지 않는 사업모델도 함께 필요하다. 자본은 마중물이 될 수 있어도 그 자체로 창의성이 되지는 않는다.
검증 역시 남는다. 펀드의 성패는 몇 년 뒤 숫자가 증명한다. '몇 개 기업에 투자했고 후속 투자로 얼마나 이어졌으며, 세계 시장에 몇 편의 신작을 올렸는가' 등이 잣대가 될 수 있다. 투자받은 개발사가 특정 플랫폼이나 퍼블리셔에 종속되지 않고 IP 주도권을 지켜냈는지도 살펴야 한다. 이 숫자가 채워지지 않으면 1200억원은 허울뿐인 정책 성과 자료로 남을 수 있다.
자금은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 아니라 시장이 이동하는 방향으로 흘러야 한다. 리스크가 낮다는 이유로 기존의 무거운 과금형 게임이나 대기업의 위험 분산 수단에 돈이 쏠린다면 시장 흐름과 동떨어진 결과만 남는다. 지금의 차트가 가리키듯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맞춘 잘 만든 캐주얼, 독창적인 인디·방치형, 글로벌 확장성을 갖춘 융합 IP에 자금이 골고루 스며들도록 정교한 투자 원칙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한국 게임의 경쟁력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국내 모바일 시장은 주춤하지만 글로벌 PC·콘솔 시장에서는 다른 흐름도 나타나고 있다. 크래프톤, 시프트업, 펄어비스처럼 세계·콘솔 무대에서 성과를 내거나 도전을 이어가는 회사도 있다. 모바일 순위만으로 한국 게임의 경쟁력을 재단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국내 모바일 시장의 변화는 다음 세대 IP를 키우는 일이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임을 보여준다.
정부가 늦게나마 신규 IP에 베팅하기로 한 것은 긍정적인 출발점이다. 하지만 사다리는 놓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펀드의 투자 기간은 앞으로 5년이다. 몇 개의 초기 개발사가 후속 투자를 받고 몇 개의 신규 IP가 글로벌 시장에 올라서며, 그중 얼마나 많은 회사가 자기 IP를 들고 다음 단계로 넘어서는지가 넥슨의 별도 투자까지 더해질 2500억원의 진짜 의미를 가르게 된다. 국내 게임 업계는 지금 분기점에 서 있다. 역대 최대 규모로 출발한 1200억원 게임 IP 펀드가 다음 라운드로 이어질지는 그 마중물이 어디로 흘러가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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