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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칼럼] 21세기 '발전국가'의 성공 조건

2026.06.30 00:15

AI혁명 시대 '국가주의의 귀환'
韓, 강대국 간 기술패권 경쟁 직면
국가의 전략산업 설계는 불가피

20세기와 달리 기업 경쟁력 커져
정부 역할과 개입 범위 한정해야
자율성 무너지면 큰 대가 치를 수도

김원호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첨단산업 분야 대규모 투자와 관련한 정부 발표를 둘러싸고 정치권에서 논란이 거세다. 정부의 지나친 시장 개입 우려 때문이다. 미국과 영국에서조차 국가자본주의 기조가 등장하는 지금이야말로 정부의 역할과 개입 범위에 선을 그어야 한다.

미국은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이 최근 필수 요소 자급자족을 선언하고 반도체, 인공지능(AI), 양자컴퓨팅, 핵심 광물을 전략산업으로 지정했다. 심지어 인텔에 대한 ‘반도체 및 과학법(CHIPS)’ 보조금을 10%의 정부 지분으로 전환하고, 엔비디아와 AMD의 대중국 AI칩 매출의 15%를 국고로 귀속시키는 조건부 수출허가도 추진 중이다. 영국은 유력한 총리 후보인 앤디 버넘이 필수 서비스의 공공 통제 강화를 내세운 ‘친기업 사회주의’를 들고 나왔다. 미국 뉴욕에서는 시장 당선에 이어 하원 예비선거에서도 민주사회주의(DSA) 바람이 일고 있다. 이른바 ‘Z세대 사회주의’로 불리는 젊은 세대의 분노는 국가가 시장에 더 깊이 개입하라는 정치적 압박으로 번지고 있다.

논쟁의 뿌리는 깊다. 학계에서는 국가가 산업화와 경제 개발을 전략적으로 주도하는 모델을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라고 부른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1994년 ‘아시아 기적의 신화’라는 논문에서 한국, 싱가포르 등 아시아 발전국가의 고성장이 총요소생산성(TFP) 향상이 아니라 노동 및 자본 투입 확대에 기인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동일한 방식으로 성장한 소련에 빗대며 아시아 성장의 지속 가능성에 의문도 제기했다. 결국 그 논문은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발전국가의 한계 연구를 가속화하는 분기점이 됐다.

AI 혁명 시대에 이재명 정부가 추진하는 신(新)안보혁신기업 육성, 비수도권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등은 21세기 발전국가의 방향성으로서 필요한 일이다. 지정학적 경쟁이 심화하고 기술 패권이 안보와 직결되는 지금 국가가 전략산업의 생태계를 설계하고 공공투자로 마중물을 대는 것은 2022년 미국의 CHIPS나 유럽의 산업 정책과 다르지 않다. 다만 성공 조건은 냉정하다.

발전국가 이론가인 피터 에번스 UC버클리 교수는 발전국가의 성공 열쇠를 ‘배태된 자율성(embedded autonomy)’으로 정리했다. 국가는 민간 산업계와 정보를 공유하고 공동 전략을 수립(배태성)해야 하지만, 전문 관료 조직이 이익집단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자율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요소의 결합만이 ‘약탈적 국가’나 ‘무능한 국가’로 가지 않는 길이다. 과거 한국 등 일부 국가에서 발전국가가 일부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관료들이 기업 현장과 연결된 전문성을 바탕으로 정치 압력으로부터 자율성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자율성이 무너지고 정치가 산업 정책을 장악한 순간 경제는 비효율과 부패의 대가를 치렀다는 것이다.

발전국가가 성공하려면 첫째, 정부 개입은 시장실패의 영역, 즉 공공재 성격인 인력 양성, 기초연구, 인프라 및 장기위험 투자 등에 한정돼야 한다. 지금은 입지 선정에 대한 논란이 주를 이루지만 정책 집행 구간마다 에번스가 경고한 ‘정치에 포획된 개입’은 아닌지, 크루그먼이 비판한 ‘비효율적 투입’은 아닌지 점검하는 자정 노력이 절실하다. 둘째, 정책의 설계와 집행은 전문 관료 조직과 독립적 평가기구가 주도해야 한다. 셋째, 산업 정책은 무역·교육·과학기술·노동 등 여타 정책 분야와 유기적인 조화를 이뤄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가는 기업을 파트너로 삼되 경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대원칙을 지켜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식 국가 개입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지분 취득과 매출 환수 등 ‘거래적 개입’이 ‘연고자본주의(crony capitalism)’로 흐를 가능성이다.

한국의 20세기 발전국가는 빈곤 탈출의 절박함과 냉전이라는 시대 조건 속에서 기업이 하지 못하는 것을 국가가 대신했다. 21세기의 여건은 다르다. 기업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역량을 갖췄고, 민주주의는 국가 권력에 공정성을 요구하며, 시민사회는 국가 실패에 더 이상 관대하지 않다. 국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명확히 구분하고 이를 정치가 아니라 원칙과 전문성으로 지켜낼 때 한국의 두 번째 발전국가 신화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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