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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재정 지배’와 통화 시스템의 미래

2026.06.29 20:13

|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근대 이후로 재정과 통화 및 금융은
제도적 차원에서 볼 때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고
그 관계가 표출되는 방식은 다양했다
‘재정 지배’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그 두 요소의 결합 방식은
큰 변화의 조짐을 암시하는 말이 아닐까
이 걱정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속될 것 같다.
우리에게 익숙한 지난 40년의 세계는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올해 1월 재닛 옐런 전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미국경제학회 연례 회의에서 언급했던 ‘재정 지배(fiscal dominance)’라는 낯선 말이 계속 떠돌고 있다. 이는 어쩌면 앞으로 다가올 미국, 나아가 세계 통화 체제의 혼란이라는 불길한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말 자체의 의미는 어려운 것도 새로운 것도 아니다. 물가 안정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통화 및 금리 정책이 재정 적자의 악화에 대한 고려에 지배당하는 상황을 말한다.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은 분명하다. 지난달 미국 연간 인플레이션율은 4.2%로 2023년 4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며 4월의 3.8%를 뛰어넘었다. 그 전 3개월 동안에도 계속 증가 일로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명백한 인플레이션 상황에 발 빠르게 대응해 올라야 할 금리는 작년 초에 인하된 숫자인 3.5~3.75%에 묶여 있다. 미국의 엄청난 재정 적자 부담에 대한 고려가 압력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자지급액이 재정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24년 이미 국방비 지출을 상회했고 지금도 그 폭은 더 벌어지고 있다. 의회예산국은 향후 10년간 미국이 추가로 25조달러를 더 빌릴 것이며, 그중 16조달러가 이자 지급에만 쓰일 것으로 전망한다. 게다가 2036년이면 이자 비용에 더해 사회보장, 메디케어, 메디케이드까지 합하면 연방 정부 세수의 100%를 잠식할 것이라는 추정도 나온다. 이러한 부채 규모에서 금리가 조금이라도 오른다면 가뜩이나 끔찍한 상태의 정부 이자 부담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정책 금리 인상을 주저할 만한 상황이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연준에 계속 금리 인하를 압박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낯설지 않은 이야기이다. 그리고 현재까지는 미국 국채 시장의 수익률 곡선이 우상향의 정상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연준이 그래도 인플레이션 압력에 대응해 조만간 금리를 올리는 표준적인 행보를 할 것이라는 기대가 반영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통 시장 금리의 벤치마크가 되는 10년물 장기 국채 금리는 정책 금리의 변동 경로에 대한 예측에 장기 보유 리스크를 더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표준적인 설명이다. 하지만 연준의 금리 정책이 이렇게 ‘재정 지배’에 짓눌려 정상적인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게 된다면 그 변동 경로의 예측도 애매해지고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실질 가치 하락에 대한 걱정 때문에 장기 보유 리스크도 더 커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책 금리와 시장 금리의 괴리가 굳어지게 될 것이며,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그 괴리의 폭이 스스로 증폭되는 나선형 구조를 만들어서 갈수록 커질 가능성까지 있다.

미국 재정 적자 더 악화될 가능성

금리 인상이 계속 지체된다면 시장은 이를 인플레이션에 맞설 의지와 결기가 없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인플레이션이 현실화한다면 장기적으로 자산 가치의 하락 위험이 더 커지게 되고 장기 국채를 들고 있는 데 대한 보상으로서 기간 프리미엄을 요구하게 될 것이므로 국채 금리는 더욱더 올라가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오른 금리는 정부가 새로 국채를 발행하고 또 기존의 국채를 갱신하는 데 들어가는 차입 비용을 폭발적으로 늘려 다시 재정 적자를 악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연준의 금리 정책에 대한 ‘재정 지배’를 더욱더 강화하게 되고, 연준은 더욱더 금리를 인상하기 힘든 애매한 처지에 더 빠져들 것이다. 이쯤 되면 국채 시장은 정부가 아예 인플레이션을 방조해 그것으로 정부 부채의 실질 가치를 감소시키는 음흉한 의도를 갖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지금도 이미 많은 이들이 의심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더 키울 것이며, 이는 다시 국채 금리의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는 나선형을 그리며 점점 더 확대될 수 있다.

아직 수익률 곡선이 곱게 우상향의 모습을 유지하는 상황에서 과도한 상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이미 10년도 넘게 경제학에서 ‘자기실현적 국가 채무 위기’라는 이름으로 연구되어 온 이야기이다. 2010~2012년 유로존 재정 위기 당시 그리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등의 국채 스프레드가 경제의 기본 여건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으로까지 치솟았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마련된 모델이다. 국가 신용도와 국채 프리미엄은 여러 복잡한 요인들의 결과물이며 때로는 기초 여건과 별개로 시장의 비관적 기대만으로도 위험 프리미엄이 올라가 정부를 부도로 몰아가는 자기실현적 결과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재정 정책이 특히 채권 시장의 차입 여건에 크게 좌우되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게다가 중앙은행의 금리 정책이 ‘암암리에 인플레이션을 부추겨 국가 부채를 녹이는 방향으로 의심’될 때에는 이러한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도 한다.

‘재정 지배’ 미국만의 문제 아니다

물론 미국은 기축통화국이며 세계 국채 시장에서의 위치가 유럽 국가들과는 판이하므로 이러한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기 힘들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재정 적자 상태를 본다면 생각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단지 그 크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러한 적자가 나타나는 구조적 원인들을 감안해볼 때 상황이 완화되기보다는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인구 구조의 변화와 맞물린 각종 사회 지출의 폭증은 되돌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며, 이를 개혁할 만한 배짱과 결기를 가진 정치 세력이 나올 수 있을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이자지급액은 폭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채 신규 발행분이 과거 저금리 시절 채권을 더 높은 금리로 갱신하는 구간에 들어와 있으므로 이미 정책 결정과 무관하게 자동 진행되는 경로에 들어섰다. 게다가 중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미국 국채를 소화해주던 해외의 수요도 예전 같지가 않다.

미국의 ‘재정 지배’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이 이러한 이유로 정책 금리의 인상을 주저하게 된다면 거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다른 많은 나라들도 금리 인상이 막히게 되며, 유럽 여러 나라들이나 일본처럼 막대한 재정 적자를 안고 있는 나라에서는 미국과 비슷한 경향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재정이 훨씬 건실한 편이니 여기에서 자유로울까? 대신 우리는 엄청난 규모의 가계 부채를 안고 있으므로 이것이 중앙은행의 금리 정책에 큰 부담이 될 것이며 ‘재정 지배’의 한국적인 변형으로 작용할 수 있다.

물론 아직 이는 가능성일 뿐이다. 정말로 이 방향으로 상황이 나아가게 되는지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10년물 국채의 기간 프리미엄 추이, 연준의 금리 결정과 시장 금리 사이의 괴리, 그리고 외국인 투자자들의 미국 국채 보유 비중 변화 등 세 가지를 주목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이 세 가지가 한결같이 악화되는 방향으로 함께 움직인다면 이는 불길한 신호가 될 것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 근대 이후로 재정과 통화 및 금융은 제도적 차원에서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고 그 관계가 표출되는 방식은 다양했다. 19세기 영국의 금본위제는 통화 정책에서 일체의 재량을 배제하는 제도였지만 그 반대쪽 극단에는 통화 정책과 국가의 재정 정책을 완전히 하나로 합쳐버린 1930년대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의 파시즘 체제도 있었다. 오랜 자본주의 역사에서 나라마다 시대마다 재정 시스템과 통화 및 금융 시스템이 결합되는 방식은 다양했지만 크게 볼 때 이러한 연속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재정 지배’라는 말이 회자하는 현재 상황은 여기에서 무슨 의미를 갖는가. 너나 할 것 없이 막대한 부채에 시달리고 있는 오늘날, 그 두 요소의 결합 방식은 큰 변화의 조짐을 암시하는 말이 아닐까. 인공지능(AI)을 통해 폭발적인 생산성 증가와 경제성장이 이뤄져서 이 모든 걱정을 씻어내고 증대된 세수로 재정 적자도 날려 버린다면 모를까, 이 걱정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속될 것 같다. 우리에게 익숙한 지난 40년의 세계는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홍기빈

(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대안적 사회의 정치경제 질서를 설계하고 구축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연구와 활동을 병행해 왔다. 저서로는 <위기 이후의 경제학> <비그포르스, 잠정적 유토피아와 복지국가>가 있으며, 역서로는 <도넛 경제학> <21세기 기본소득> <균형재정은 틀렸다: 현대화폐이론 입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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