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 전
"당신이 소송에서 이겼습니다"…지적장애인 위한 '쉬운 판결문' 나왔다
2026.06.29 18:00
"원고 A씨가 재판에서 이겼습니다. 소송에 들어간 돈은 구청이 냅니다."
지적장애인이 당사자인 행정소송에서 어려운 법률 용어 대신 일상적인 표현과 삽화를 사용한 '쉬운 판결문'이 제공됐다. 대법원이 올해 시행한 예규에 따라 '이지리드(easy-read)' 문서 제공 조항이 적용된 첫 판결문이다.
서울행정법원 행정7부(수석부장 강우찬)는 지난 25일 지적장애인 A씨(26)가 서울 양천구청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A씨의 손을 들어주며, 알기 쉬운 문장과 삽화로 구성된 이지리드 판결문을 함께 제공했다고 29일 밝혔다.
부모의 학대로 시설에서 자란 A씨는 중학교 시절부터 강박, 폭력적 성향, 주의력 결핍 등 다양한 정신질환을 겪어 온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는 천주교 기관의 도움을 받아 정신병원에 입원해 생활하고 있다.
A씨는 성인이 된 뒤 3년간 서울대병원에서 받은 지능검사에서 IQ 61~67이 나와 지적장애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양천구청은 A씨가 어릴 때 IQ 70을 넘었던 점과 '어려운 문제를 쉽게 포기한다'는 의사의 감정 내용 등을 이유로 장애인 등록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A씨는 기관의 도움을 받아 구청의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냈고, 법원은 A씨의 청구를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어려운 법률 표현을 쉬운 말로 풀어 설명했다. 기존 판결문에 쓰이는 "주문(主文)" 옆에는 "판결의 결론"이라는 설명을 붙였고, "피고가 원고에 대하여 한 장애정도 미해당 결정 처분을 취소한다"는 내용은 "원고 A가 재판에서 이겼습니다'라고 표현했다.
별도로 첨부된 쉬운 판결문에는 "법원은 구청의 결정을 취소합니다", "이제 구청은 A씨에게 장애인을 위한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라는 문장이 담겼다. 법률상 '취소'의 의미에 대해서는 "취소는 결정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판결문에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복지카드를 건네는 그림과 원고가 만세를 하며 웃는 그림도 포함됐다.
판단 이유도 쉬운 문장으로 정리됐다. 재판부는 "법원은 구청의 결정이 틀렸다고 판단합니다.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라고 쓴 뒤 "첫째, 오랫동안 당신을 직접 만나고 치료한 의사들의 말은 믿을 만합니다", "둘째, 당신은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과 지내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주는 단체가 당신을 도왔습니다", "셋째, 판사도 법정에서 당신을 직접 만났습니다. 판사도 당신이 보통의 사회생활을 하기 어렵다고 봤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지적장애 여부를 IQ 수치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도 밝혔다. 재판부는 "장애인복지법이 정한 지적장애는 지적 능력 손상으로 인해 일상 및 사회생활에서의 상당한 제약이 있는지 여부로 판단해야 한다"며 "일상 및 사회생활에서 제약이 인정된다면 불완전한 척도인 IQ 산정만을 들어 장애를 섣불리 부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리시아 칼슨 교수의 저서 '지적장애의 얼굴들'을 인용해 IQ테스트가 "복지 관점에서의 분류체계가 아니다"라고 짚었다.
국내에서 이지리드 판결문은 2022년 서울행정법원에서 처음 등장했다. 당시 강 수석부장이 작성한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라는 주문이 주목받았지만, 일회성에 그쳤다.
이후 사법정책연구원은 2024년 '장애인 등을 위한 이해하기 쉬운 판결서 작성방안'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 이번 재판부는 해당 보고서가 제시한 이지리드 판결문 작성 방법을 A씨 사건에 활용했다. 보고서 내용을 인공지능(AI)에 학습시킨 뒤 판결문에 들어갈 삽화도 생성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월에는 '장애인·노인·임산부 등 사법접근 및 사법지원에 관한 예규'가 제정됐다.
예규 6조에는 "법원은 수어·문자·이지리드 자료 등을 제공해 장애인 등이 그 외의 사람과 동등하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A씨 사건은 해당 예규 제정 이후 이를 근거로 제공된 첫 이지리드 판결문 사례다.
(사진 = 서울행정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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