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수많은 장소·시간 머무는 도서관”···은희경이 육십대 중반에 깨달은 것들
2026.06.29 15:01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384쪽 | 1만8800원
소설가 은희경이 7년 만의 장편 <시간의 감촉>을 펴냈다. 소설은 같은 해에 태어난 자매 안나와 경선의 이야기다. 60대에 이른 두 자매는 경선의 투병을 계기로 새롭게 만나 과거를 반추한다. 이제는 노화한 그들의 몸에 새겨진 시간을 더듬는 과정이기도 하다.
같은 집안에서 태어난 여성이지만 안나와 경선은 너무도 다른 사람이다. 어린 시절 읽었던 책의 취향도, 남자를 바라보는 관점도 상이하다. 안나는 미혼이나 경선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이혼도 했으며 이제는 손녀 다니엘을 돌본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찾아온 노화는 두 사람에게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공평한 감각을 일깨운다.
[플랫]‘63살 은희경’은 ‘27년 전 은희경’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은희경은 자매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에 대해 지난 24일 기자와 만나 “자기가 자기 몸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활용하면서 사느냐에 따라서 같은 시대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도 (삶이) 다른 식으로 변형되어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 한국 사회를 다양하게 보여주고 싶었기에 두 인물을 설정한 것도 있다”고 덧붙였다.
소설은 예순다섯 살 생일에 안나가 자신의 아파트 창가에서 바깥을 내려다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멀리 정류장에서 나이 든 여성이 앞선 아이에게 손을 들어 인사한다. 그러나 아이는 이미 버스를 타고 사라진 뒤다.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지만, 어쩐지 앞으로 펼쳐질 글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장면이다. 책 전체적으로 그렇다. 이야기를 지배하는 것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인물과 함께 흘러가는 시간과 공간 그 자체다.
은희경은 “사건보다 전체를 조망하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인물을 봐도 이 인물이 ‘이런 일을 겪을 때 어떻다’라는 것보다 ‘나중에 어떻게 될까’ 같은 흐름에 관심이 간다”며 “사건이 만들어지고 해결이 오고 또 다른 것들이 오는 것보다 이 변화를 통해서 나아갈 곳을 본다”라고 했다.
인간의 조건으로서 몸에 주목한 소설을 쓴 이유에 대해 작가는 “인간은 행복할 때보다 고통스러울 때 자기 조건을 더 의식하는 것 같다. 나이가 들고 부모님도 돌아가시니 석가모니식으로 생로병사가 뭘까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두 주인공만큼 경선의 손녀 다니엘의 존재감이 크다. 경선의 입원으로 안나는 어린 다니엘을 돌보게 되는데 아이는 안나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게 한다. 은희경은 “안나는 미혼이기 때문에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모든 삶이 연결돼 있고, 느슨한 연대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작가의 이 같은 생각은 책 속에 나온 “내가 생각한 진실과 사랑이 그런 방식으로 지켜져서 훗날의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그들이 그걸 믿는다면 죽음 또한 소멸이 아닌 시간의 계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문장과 이어진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새의 선물>과 <빛의 과거>를 잇는 ‘시간 3부작’의 마지막 책이라 했다. 그는 “<새의 선물>은 주인공이 30대가 되어 열두 살을 돌아보고 <빛의 과거>는 50대 후반에 청춘을 돌아본다. 이번 책은 60대 중후반에 인생 전체를 돌아보는 것”이라며 “(내가) 이런 방식으로 지나간 시간을 편집하며 삶을 다시 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인물을 통해 시간의 추이를 쓰고 있다(는 결론이었다)”고 말했다.
[플랫]은희경 ‘새의 선물’…우주선의 세계에 여성은 없다는 냉정한 자각
문장은 단정하고 늘어짐이 없다. 사람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듯한 날선 사유는 여전하지만, 이것이 냉소로 보이진 않는다. 그는 “과거엔 여성 작가가 적다 보니 내가 듣는 질문들에 대한 답이나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부드럽게 얘기할 수 없었다. 지금은 사회가 달라졌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될 뿐이다. 객관적으로 세상을 보려 하는 태도는 여전하다”고 말했다.
인간의 존재 조건으로서 몸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올해 서울국제도서전 주제인 ‘인간선언’과 연결해 읽어볼 수 있다. 작가는 이날 만남에 앞서 도서전 개막식에 들렀다. 소설가 김연수가 생성형 인공지능(AI)과 함께 써 화제를 모은 주제문에 대해 그는 “생각은 김연수의 생각인데, 문장은 번역어 같았다. 신기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은희경은 27일 도서전에서 황인찬 시인과 미래에 인간과 AI는 어떤 몸을 지니고 살아가게 될지를 주제로 대담했다.
“AI와 글쓰기? 반복 노동 같았지만···” 소설가 김연수의 실험 결과는
▼ 고희진 기자 gojin@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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