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히치콕을 어설프게 갖다쓴 허술한 스릴러, 영화 ‘눈동자’
2026.06.29 07:02
영화 ‘눈동자’는 앞서 말씀드린 원작을 나름대로 변형했습니다. 시작부터 달라요. 주인공은 쌍둥이 자매인데 유전 질환 때문에 시력을 잃었거나 잃어가고 있습니다. 원작 ‘줄리아의 눈’은 자매 중 한 여성이 자살당하는, 죽기 싫은데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 의해 자살처럼 꾸며져 살해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범인이 누군지 즉각 궁금해지고, 다른 쌍둥이 자매가 그걸 밝히는 추적과 추리가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수수께끼와 연결됩니다. ‘눈동자’는 주인공(신민아)이 스토커에게 시달리면서 시작해요. 스토커는 사진가인 주인공의 모델이었다가 그녀에게 집착하게 됐습니다. 그녀는 시력을 잃고 혼자 지내던 여동생을 찾아갔다가 목을 맨 시신 상태로 발견하는데,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 믿고 범인을 찾으려 합니다. 신출귀몰한 스토커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그녀를 계속 쫓아오고, 형사들이 그녀를 보호하겠다며 나섭니다. 그녀는 스토커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리메이크 영화가 원작과 다른 길을 가는 건 관객에겐 반가운 일일 수 있습니다. 아는 영화를 다른 감독의 시선으로 새롭게 볼 수 있으니까요. 단, 단순히 변형을 위한 변형이 아니라 그를 통해 말하고자하는 바가 뚜렷할 때 그렇겠죠. ‘눈동자’는 원작과 다른 범인을 내세웁니다. 과감한 선택, 좋았습니다. 미스터리 스릴러는 범인 찾는 재미의 지분이 크고, 거기서 발생하는 긴장감이 주요 동력인데 리메이크판만의 승부수를 던진 거죠. 또 원작에 없던 스토커를 등장시켜 관객을 더 교란시키려 합니다. 결과는? 그다지.
왜냐면 범인이 누구인지 바로 아실 수 있거든요. 그 인물을 보시는 순간, 너구나, 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범인이 누구냐보다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가 리메이크작의 독창성을 보여줄 부분일 텐데, 그걸 다른 작품도 아니고 히치콕의 ‘싸이코’에서 그대로 가져왔으니 역시나 듣던 풍월이 돼버립니다. 명작의 오마주라 하기엔 앞서 말씀드린, 승부수라 할 부분이다보니 결말이 쉽게 짐작되는 구태의연한 선택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눈동자’가 첫 장편 상업영화라는 감독에게 그만의 개성이나 독창성을 기대한 제가 과했던 걸까요.
누가 그랬는지가 보이는데 왜 그랬는지도 뻔하면 과정의 긴박함이나 긴장감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게 살았느냐 하면, 아니요. 시력 상실이라는 설정을 지극히 편의주의적으로 썼다 말았다 하면서 일부 장면에서는 시각 정보의 차단이라는 공포 장치가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보입니다. 긴장감 조성은 출몰하는 스토커가 상당 부분 맡다보니, 보다보면 과연 이 영화가 눈이 잘 보이는 주인공을 썼을 때와 무엇이 달랐을까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여기까지 읽으신 독자분들 중에, 아니 나는 원작도 안 봤고 히치콕 ‘싸이코’도 모르는데 그럼 재밌게 볼 수 있는거 아냐, 라고 하실 수 있는데, 범인이 뻔한데다 전개도 느슨하면 미스터리 추리극으로서는 힘을 갖기 어렵습니다. 주변 인물만 해도 그렇습니다. 미스터리나 추리극에서 범인이 확실하게 공개되기 전까지, 주변 인물은 ‘혹시 저 사람이 범인이 아닐까’ 관객을 헷갈리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걸 잘할수록 재미있고 긴장감도 높아지죠. 주변 인물이 뭐라 말해도 믿을 수 없으니 혼란이 가중되는데, ‘눈동자’에서는 주변 인물이 오히려 혼란을 줄여줍니다. 원작에선 등장인물 중 한 명이 주인공에게 “범인은 땡땡이야!”라고 말해줍니다. 근데 이걸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어서 더 헷갈려요. 말해준 그 인물부터가 수상하니까요. ‘눈동자’에선 등장인물 중 한 명이 눈이 안 보이는 주인공에게 인쇄된 종이를 전해주며 “범인이 누구인지 여기 적혀있어!”라고 말합니다. 아니, 그 말할 시간에 누군지 말해주면 빠르고 정확하게 도움이 되는데, 왜요?
물론 이유가 있습니다. 범인이 적혔다는 그 종이를 보려고 눈수술한 주인공이 뜨면 안 되는 눈을 뜨는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그렇게 설정했는데, 고비고비 이런 식으로 긴장감을 증폭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만들어놓은 상황을 굴러가게 만들기 위해서 인물이나 배경이 소모되다보니 이야기가 굴러갈수록 푸쉬식 푸쉬식 바람빠지듯 재미 빠지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더군요.
눈이 안 보이는 인물을 보여주기 위한 고민을 과연 얼마나 했을까 의구심이 든 장면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동생이 죽고 나서 동생의 휴대폰을 주인공 언니가 갖게 됩니다. 폰이 울리는데 폰 화면에 ‘엄마’라고 떠요. 엄마는 예전에 돌아가셨는데 누굴까 해서 받아보니 동생을 도와주던 아주머니였습니다. 나중에 언니도 이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게 되고요.
자, 여기까지 들으면 뭔가 이상하지 않으세요? 동생은 시력을 잃었는데 폰에 저장된 이름이 뜨면 어떻게 구분한다는 걸까요? 관객에게 보여주려는 장치일텐데, 그러면 시력 잃은 동생 설정은 어쩌시고요? 사소한 부분 같지만 영화 구석구석에 이런 구멍입니다. 개연성은 때로 좀 떨어질 수도 있고, 영화적 설정으로 눙치고 지나가는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인물의 신체 상황 혹은 직업적 설정에 명확한 특성이 있을 때는 꼼꼼한 연구가 기본이 됐으면 한다면 관객으로서 너무 큰 기대인 걸까요.
‘눈동자’ 배급사는 바이포엠스튜디오입니다. 소셜미디어 홍보에 특히 일가견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눈동자’ 흥행을 세게 굴리고 있는데, ‘스포 방지 서약서 시사회’ 했다는 보도자료 보고 관객을 너무 쉽게 아는 거 아닌가 했습니다. 다 보이는 데 무슨 스포이고 말고가.
원작 ‘줄리아의 눈’은 엄청난 수작은 아니지만 시력 상실이라는 소재를 일관되게 끌고갔고, 그 때문에 발생하는 공포와 긴장도 꽤 살렸습니다. 그리고 엔딩에서, 눈이 안 보이는 주인공이 주변 인물에게 받은 사랑과 위로라는 마지막 한 스푼을 첨가하면서 확실히 감독 자신의 작품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어요. 미스터리 추리물 팬이라면, 아니, 난 더블 에스프레소 시켰는데 웬 설탕첨가냐 하실 수 있는데, ‘눈동자’에서도 마지막 대사가 그 분위기로 들어갔어요. 다만 통하지 않았을뿐.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건 너무 억지아니었는지.
기자 양반이 그렇게 말하니 오히려 ‘눈동자’가 보고싶구려, 하는 독자분이시라면 나중에 넷플릭스에 올라오면 보시는 쪽을 그나마 권해드립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히치콕의 ‘싸이코’를 보시는 게 훨씬 값진 시간이 되실 거에요(왓챠, 티빙, 웨이브 등에 다 있습니다). 얼마나 잘 만들었으면 만든 지 60년이 넘었는데 굳이 그 영화에서 핵심 부분만 갖다쓴 걸로 영화를 또 만들었겠습니까. 고전은 영원하다, 이 연사 외쳐보며, 다음 레터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선닷컴 ‘그 영화 어때’ 구독 링크 https://www.chosun.com/tag/cinema-review
네이버 ‘그 영화 어때’ 구독 링크 https://naver.me/FZ82SAP3
영화는 세상의 창이고 호수이며 거울. 여러분을 그 곁으로 데려다 드립니다.
그 영화 어때 더 보기(https://www.chosun.com/tag/cinema-review/)저작권 보호를 위해 본문의 일부만 표시됩니다.
원문 보기 →댓글 (0)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김우빈의 다른 소식
모든 소식을 불러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