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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 홀로선 김히어라… 유머·자기혐오 넘나든 90분

2026.06.29 05:31

[리뷰] 연극 '플리백'
英 극작가 월러 브리지의 女 1인극
친구 죽음에 죄책감 휩싸인 주인공
관계에 집착하며 성적농담 쏟아내
류주연 연출 "결핍·사랑·회복 담아"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지난 27일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보라색 니트에 검은 바지를 입은 한 여자가 헐레벌떡 면접장으로 뛰어 들어온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그녀는 더위를 참지 못해 니트를 훌쩍 들어 올린다. 하지만 그 순간, 면접관은 그 행동을 유혹으로 받아들여 분위기가 싸늘해진다. “꼬시는 게 아니라구요. 거울 좀 보세요!” 억울한 마음에 항변해 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나가달라”는 퇴장 명령뿐이다. 시작부터 인생이 제대로 꼬였다.

연극 ‘플리백’의 한 장면(사진=브러쉬씨어터).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무대 위에 선 이는 배우 김히어라(37)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에서 약에 취한 일진 이사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그가 이번에는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주인공 ‘플리백’ 역으로 관객 앞에 섰다.

그가 선택한 작품은 영국의 극작가이자 배우 피비 월러 브리지가 직접 쓰고 연기해 화제를 모은 1인극 ‘플리백’이다. 국내에서는 이번이 초연으로, 김히어라를 비롯해 김주연, 김규남이 같은 역할을 번갈아 연기하며 각기 다른 ‘플리백’을 선보인다. 2013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첫선을 보인 ‘플리백’은 2016년 TV 시리즈로 제작되며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월러 브리지는 각본과 주연을 맡아 에미상 작품상·여우주연상·각본상을 거머쥐었다.

플리백은 친구 부(Boo)의 죽음 이후 죄책감과 상실을 애써 외면한 채 살아가는 인물이다. 관계와 섹스에 집착하고 냉소적인 농담을 쏟아내지만, 이 모든 것이 결국 깊은 상처를 감추기 위한 몸부림이다. ‘플리백’은 영어권에서 ‘지저분한 사람’, ‘문제투성이’를 뜻한다.

연극 ‘플리백’의 한 장면(사진=브러쉬씨어터).
배우 혼자 90분을 이끌어가야 하는 작품인 만큼 김히어라는 거침없는 에너지로 무대를 채웠다. 제4의 벽(무대와 객석의 경계)을 허물고 객석을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건네며 관객을 자연스럽게 극 안으로 끌어들였다.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일부러 오이를 떨어뜨린 뒤 엉덩이를 뒤로 쭉 빼며 능청스럽게 일어서는 장면에서는 객석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외설적인 사진을 요구하는 전 남자친구의 부탁에 은밀한 부위까지 연신 사진을 찍어 보내는 장면도 전혀 머뭇거림 없이 소화했다.

김히어라는 침대 경험담까지 스스럼없이 털어놓다가도 “나는 모든 걸 망쳐버리는 사람이에요”라는 한마디로 플리백의 자기혐오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언니의 남편이 자신을 더듬었다고 털어놓지만, 믿어주지 않자 슬픔을 참지 못한 채 흐느껴 울었다. 그러면서 그는 “거지 같은데 다들 말을 안 하는 거죠?”라고 객석을 향해 말을 건네며 플리백의 상처와 외로움에 자연스럽게 공감하게 했다.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은 “왜 사람들은 실수를 할까요? 그게 연필 끝에 지우개가 달린 이유예요”라는 대사에 담겨 있다. 누구나 흔들리고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작품은 삶을 할퀴고 간 상처와 지독한 자기혐오를 애써 밀어내기보다, 그것마저 자신의 일부로 끌어안을 수 있는지를 관객에게 묻는다.

극이 마지막에 다시 처음의 면접장으로 돌아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플리백은 연필 끝의 지우개처럼 실수를 딛고 삶을 다시 써 내려갈 수 있을까. 류주연 연출은 “‘플리백’은 결핍과 사랑, 그리고 회복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라며 “관객들도 공연을 통해 결국 자기 안의 플리백과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연은 9월 6일까지.

연극 ‘플리백’의 한 장면(사진=브러쉬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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