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간 전
구룡사 스님도 모르는 구룡산…숨은 능선에서 '숨은 길' 찾기 [경상도의 숨은 명산 사천 봉두산·하늘먼당]
2026.06.29 07:25
사천을 대표하는 산은 단연 와룡산이다. 아흔아홉 개의 봉우리가 이어져 '구구연화봉'이라 불리며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거대한 용이 몸을 누이고 있는 형상이란다. 낙남정맥 남쪽에서 가장 웅장한 산세를 자랑하며 도시의 절반을 품고 있는 상징적인 존재다. 그러나 이번 산행의 목적은 그 유명세가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찾는 주능선이 아닌,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북쪽 능선 약수암에서 시작해 안점산 봉수대(봉대산), 봉두산, 하늘먼당을 지나 구룡산으로 이어지는 숨은 능선을 돌아보려 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더 궁금했고, 덜 다듬어졌기에 더 도전적이었다. 그야말로 숨은 명산을 찾아가는 산행이었다. 맑고 청명한 봄날하늘은 더 없이 푸르렀고, 산 전체가 연둣빛 신록으로 물들어 있었다. 들머리인 약수암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오늘 코스를 머릿속에 그려봤다. 약수암-안점산 봉수대-봉두산-하늘먼당 그리고 구룡산을 거쳐 하산. 지도로 볼 때는 그럭저럭 걸을 만해 보였다. 그 판단이 틀렸다는 걸 산은 곧 알려 주었다.
약수암은 이름처럼 조용하고 단아한 암자다. 기와지붕 처마 아래 단청을 곱게 입힌 약수암 누각이 산을 배경으로 조용히 서 있었다. 봄볕을 받은 기왓장이 따뜻하게 빛나고, 암자 주변으로 연초록 나뭇잎들이 기지개를 펴듯이 쑥쑥 돋아나고 있었다. 산행 전 잠시 마음을 가다듬기에 더없이 좋은 출발이다.
약수 한 모금 대신 큰 쉼 호흡으로 산행 세포를 깨우고 본격적으로 길에 들었다. 와룡산 등산 안내판 앞에서 산행을 마친 동네 어르신께 하늘먼당에서 구룡산 가는 길을 여쭈었다. "하늘먼당까지 길이 편안한데, 구룡산 가는 길은 잘 모르겠다"는 어르신의 말씀이 가볍게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는 몰랐다. 그 말이 오후의 우리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약수암 맞은편 연둣빛 숲속으로 발을 들였다. 산행은 부드럽게 시작된다. 군데군데 야자매트가 깔린 등산로는 발걸음을 편안하게 받아주고, 울창한 숲이 만들어내는 그늘은 초입의 긴장을 풀어준다. 햇살은 나뭇잎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들고 길은 마치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을 것처럼 이어진다.
그렇게 오르막을 이어가다 보니 마침내 시야가 열리며 봉수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편안함에서 긴장으로, 길을 따르는 산행에서 의미를 읽는 산행으로 봉수대는 그렇게 이번 산행의 첫 장면을 또렷하게 열어준다.
안점산 봉수대 검은 화강암 표지석에 새겨진 글씨가 묵직하다. 이곳은 고려시대에 처음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유서 깊은 봉수로, 조선시대 중심 봉수 다섯 곳 중 하나였다. 동래 다대포에서 시작해 서울까지 이어지는 제2봉수로의 한 축을 담당했던 곳이다. 남쪽으로는 각산봉수대, 북쪽으로는 진주 망진산 봉수대와 연결되었다고 하니, 이 작은 산봉우리가 한반도 남해안의 방어 정보망의 핵심 고리였던 셈이다.
봉수대의 지명 유래도 흥미롭다. 원래 봉수는 봉두산(465m)에 침지봉수로 먼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후 안점산으로 옮겨오면서 '봉대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불꽃 하나가 산 이름까지 바꾼 것이다.
1993년 복원되어 잘 정비된 석축이 길게 이어지고, 그 사이로 봉수 5구가 나란히 서 있다. 푸르게 올라온 풀과 나무들, 그 뒤로 돌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 석축은 과거의 흔적을 고스란히 되살려 놓은 듯, 석축의 질감이 어우러지며 이곳이 단순한 산 정상 이상의 공간임을 느끼게 한다.
봉수대를 지나 시선을 멀리 두자 석축 너머 사천의 들판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끝에 반짝이는 바다. 잔잔히 이어진 수면 위로 길게 놓인 사천대교가 시선을 끌고 크고 작은 섬들이 겹겹이 이어진다. 비로소 풍경이 열렸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가까이 있을 때와는 또 다른 깊이를 지닌다. 시간의 결이 잠시 가지런히 정돈된 듯한 기분이 든다. 한때는 긴박한 신호가 오가던 자리였지만 지금의 봉대산은 햇살 아래 평온하게 열려 있는 공간으로 등산객에게 여유로운 쉼을 내어준다.
봉수대를 뒤로하고 다시 힘차게 직진, 숲길로 걸음을 이었다. 간간이 오른편에 나뭇잎에 가린 바다 조망이 드문드문 눈에 들어오긴 해도 별다른 조망은 없다. 40여 분 업다운을 반복하며 걷는다. 햇살 아래 거미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나불거리는 애벌레가 멈칫거리게 한다.
이윽고 큰 바위가 나타났다. 숲 사이로 난 길 끝에서 하늘로 이어지는 철계단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미지의 세계로 건너가는 문처럼 느껴진다. 한 걸음 한 걸음 설레는 마음으로 계단을 다 오르자 시야가 탁 트이며 사천의 풍경이 한눈에 펼쳐졌다. 조금 전 지나온 안점산봉수대, 사천읍내, 일주일 전 다녀온 이구산과 흥무산까지. 멀리 사천만이 잔잔하게 빛나고, 해안 가까운 곳인지 저수지들이 여기저기 반짝였다.
겹겹이 쌓인 바위 더미에 용머리, 악어 등 일행과 이런저런 이름을 붙여가며 지나쳤다. 슬슬 풍성하게 자란 잡풀로 등산로가 점차 흐릿해진다. 한때는 신호가 오가던 길이었지만 지금은 자연 속에 묻혀 색 바랜 희미한 등산리본 몇 개만이 겨우 길을 이어준다.
그냥 지나칠 뻔한 봉두산 정상, 표지석은 없다. 벤치 2개가 잠시 쉬어가라 한다. 소나무 기둥에 A4용지 크기의 코팅된 안내판이 정상임을 알려 준다. 서울 모 산악회에서 만든 것이었다. 이 봉두산이 바로 안점산으로 옮겨오기 전에 원래 침지-봉수가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봉수의 역사가 이 소박한 봉우리 위에 켜켜이 쌓여 있는 셈이다. 산 이름 봉두산도 봉수대의 봉烽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불꽃 신호가 오가던 그 자리에 이제는 잡목 사이로 바람만 스쳐간다.
정오 무렵 이정표 앞에 섰다. 민재봉 5.8km, 하늘먼당 1.2km, 약수암 2.8km, 봉화대 2.0km, 정면에는 하늘먼당이 우뚝 솟아 있고, 그 너머로 민재봉, 와룡산 최고봉 새섬봉까지 시선이 닿는다. 누군가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 돌탑이 너덜지대 한쪽에 조용히 서 있다. 고도가 낮아지며 평탄한 길이 이어지더니 낡은 안내철판을 지나 막바지 오르막이 시작됐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치고 올라, 출발 2시간 20분 만에 드디어 '하늘먼당' 도착. '먼당'은 서부 경남의 방언으로 '마루', 즉 산꼭대기를 뜻한다. 마을에서 올려다보면 저 멀리 하늘에 닿을 듯 솟아 보여 이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라고 누군가 말한다.
이제 구룡산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진짜 산행은 이제부터다. 낙엽과 이끼와 지의류가 덮인 바위들로 인해 발밑은 불안정하고 등산로는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지도를 보며 구룡산으로 향하는 왼쪽을 주의 깊게 살피며산행을 계속 이어갔다. 이상하리만큼 이정표도, 표지석도, 낡은 시그널조차 없다. 그러다 명지재마저 지나쳤다. 지도상으로는 명지재에 이르기 전에 분명 빠지는 길이 있다고 돼 있었다.
마음을 다잡고 구룡사를 경유하는 코스로 계획을 바꾸었다. 그 와중에 아내는 낙엽에 미끄러지면서 발목과 꼬리뼈 부상을 입었다. 그래서 홀로 약수암으로 원점회귀하도록 보내고 우리는 낡은 안내판이 보이는 지점에서 구룡사 방향으로 하산을 진행했다.
그러나 분명히 있어야 할 하산길이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진다. 희미하던 길은 끊어지고 시그널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무성한 잡목과 빽빽한 어린 대나무숲이 앞을 가로막았다. 앞으로 나아가는 게맞는지 아니면 방향이 틀어진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 물길을 따라 내려가다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내딛어도 미끄러지기를 반복한다.
사찰의 기운이 느껴지는 순간 비로소 긴장이 풀린다. 구룡사에 도착했을 때의 감정은 단순한 산행종료가 아니라 무사히 내려왔다는 안도감에 가까웠다. 경내 스님께 등산로에서 구룡사로 내려오는 길과 구룡산 가는 길을 여쭸다. 스님은 잠시 생각하시더니 말씀하셨다.
"그런 길은 없어요. 내려오신다고 고생하셨네요."
구룡산이라는 이름조차 낯설어하시며, 구룡사 앞에 보이는 산을 보고 "저게 구룡산인가?"하고 되묻는다. 사천시청 문화해설사와 통화해 보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예전엔 길이 있었는데, 찾는 사람이 없다 보니 사라진 것 같습니다."
길은 사람이 걸어야 길이 된다. 사람의 발길이 끊기면 길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을, 무성한 잡목 속에서 온몸으로 배웠다. 임도를 따라 한참을 걸어 구룡마을 경로당에 닿은 무렵, 약수암에서 차를 타고 온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토록 반가울 수 없었다. 앞으로 더 많은 산꾼들의 발걸음이 이어져길이 자연스럽게 살아나고, 사천시의 체계적인 정비가 더해져 와룡산 주능선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산행코스로 자리 잡기를 기대해 본다.
하늘먼당은 약수암 → 안점산(310m) / 봉수대 → 무지개샘 → 전망바위 → 선바위 → 봉두산(465m) → 456봉 → 하늘먼당(566m)에서 약수암으로 되돌아오는 코스(8.5km, 4시간)가 가장 좋다.
또는 와룡산 코스 7개 중 5코스를 응용하는 용현신기 → 약수암 → 안점봉화대 → 하늘먼당 → 백천재 → 민재봉(10.9km, 4시간) 코스도 있는데, 백천재 갈림길에서 백천사 방향 백천사주차장까지 하산하는 것이 최상이다.
약수암에서 하늘먼당, 백천재까지 이어지는 초록 숲길은 햇살과 바람, 숲의 고요함 속에서 무상무념의 시간을 갖게 하는 평안한 코스다. 와룡산 종주가 부담스럽다면 백천재에서 백천사주차장으로 하산하는 코스도 무난하게 즐기기 좋은 길이다.
대중교통 이용보다 자차 이용을 추천. 주차는 약수암 주차장. 대중교통 이용 시 사천시외터미널에서 삼천포행 진주사천완행버스(매일 31회 운행)를 타고 신기버스정류장(15분 소요)에 내리면 된다. 여기서 약수암까지 도보로 1.3km 이동하면 된다.
택시는 사천개인택시(852-3100), 사천개인콜(835-4000) 이용.
맛집(지역번호 055)
변함없는 사천시장 국수골목의 대표적인 집은 예지분식(854-1054)이다. 물국수 5,000원, 비빔국수, 칼국수, 계절콩국수 6,000원. 착한 가격과 후한 인심이 매력적이며 홍합으로 우려낸 깊은 육수와 숙주나물이 어우러진 물국수의 맛이 일품이다. 맞은편 원조시장국수도 오랜 전통으로 찾는 사람이 많다.
현지인 추천 맛집으로 귀빈식당 해물탕(0507-1418-6663)은 싱싱한 해산물로 만든 해물탕과 낙지볶음이 맛있다. 국물이 시원하며, 밑반찬도 깔끔하다. 해물탕/해물찜 2인 4만5,000원/ 3인 6만5,000원/4인 8만 원. 양지해물탕(832-1149)도 삼천포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해물탕 전문점으로 자극적이지 않은 맑은 국물에 신선한 해물이 듬뿍 들어가 깊은 맛의 풍미를 느낄 수 있다.
하주옥진주냉면(853-9005)은 진주 물냉면, 비빔냉면이 인기메뉴인 냉면전문점이며, 특히 물비빔냉면이 매콤 새콤한 양념과 어우러진 육전으로 인기가 높다. 해산물과 회를 먹고 싶다면 삼천포 용궁수산시장을 가면 된다.
월간산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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