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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서 지워져가던 오지였는데... 연둣빛 밀밭에 숨겨진 비밀 [나의 오래된 사진 이야기]

2026.06.28 14:36

[나의 오래된 사진 이야기] 저마다 천천히 익어가는 술과 필름의 시간... 니콘 EM과 함께한 맹개마을【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사진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전통시장과 주변의 일상을 기록해왔다. 오래된 필름카메라를 통해 사라져 가는 풍경과 기억, 기록의 의미를 묻는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기자말>

▲ SonyA7촬영 니콘의 EM과 함께 발매된 니코르 E 시리즈 렌즈들은 휴대성에 촛점을 맞춰 펜케익렌즈로 출시되었다.
ⓒ 이재필

우리 밀로 빚은 전통 소주, '진맥 안동소주'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을 때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들떴다.

조선 시대의 고조리서인 <수운잡방>의 빛바랜 한지 위에 적힌 선조들의 가르침 그대로, 다른 인공 첨가물 없이 오직 이 땅에서 자란 우리 밀과 깨끗한 물, 그리고 정성으로 빚어낸 누룩만으로 완성하는 귀한 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쌀이 귀하던 시절, 밀로 소주를 내려 마셨던 조상들의 슬기와 멋이 그 투명한 액체 속에 고스란히
고여 있을 것만 같아 늘 술의 본향이 궁금했다. 애주가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는 이 술의 고향이 안동의 깊숙한 골짜기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미 나의 마음은 맹개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마침 운 좋게도 가까운 지인이 이 비밀스러운 양조장에 초대를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초여름의 싱그러운 푸른 기운이 가득할 안동의 풍광과 그곳에서 피어날 향긋한 술 냄새를 상상하니 도저히 집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서둘러 카메라 제습함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오래된 수동 카메라, 니콘 EM을 꺼냈다.

오래되어 닳아버린 가죽 케이스를 씌우고 검은색 어깨끈을 단단히 매단 채, 염치 불고하고 지인의 동행 길에 덥석 따라나섰다. 카메라 가방을 들어올리자 아련한 필름카메라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고,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기 전의 설렘이 손끝에서부터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물길이 막아선 비밀의 정원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유진 초이와 고애신이 작은 나룻배를 타고 건너던 아름답고 서정적인 고산정의 풍경을 지나 차를 달렸다.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늘어선 강변길을 따라
깊숙이 들어갈수록 길은 점점 좁아졌고, 스마트폰의 내비게이션마저 갈팡질팡 중심을 잡지 못했다.

▲ Nikon EM촬영 진맥소주 양조장은 자연속에 완전히 숨어있다.
ⓒ 이재필

그러다 어느 순간 눈앞을 가로막은 낙동강 줄기와 마주쳤다. 다리도 없고 흔한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 곳. 예천의 회룡포나 안동 하회마을이 그러하듯 이곳 맹개마을 역시 낙동강 물길이 마을 전체를 포근하게 휘감아 돌며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한 독특한 지형을 이루고 있었다.

육지 속의 섬이라는 말이 이보다 잘 어울리는 곳이 또 있을까 싶었다. 마을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현대 문명의 편리함을 잠시 내려놓아야 한다. 강물에 수량이 풍부하게 차오를 때는 작은 조각배에 몸을 싣고 조심스레 노를 저어야 하고, 물이 좀 빠졌을 때는 거대한 바퀴를 단 트랙터를 빌려 타거나 강바닥에 아슬아슬하게 놓인 긴 징검다리를 하나씩 딛고 건너야 한다.

내가 찾아간 날은 다행히 강물이 무릎 춤까지 빠져 있어서 양조장 주인이 마중 나온 트랙터 적재함에 올라탈 수 있었다. 탈탈거리는 우람한 엔진 소리와 함께 거친 자갈밭을 지날 때마다 온몸이 들썩였지만, 그 불편한 덜컹거림마저 비현실적인 여정으로 들어가는 근사한 서막처럼 느껴졌다.

문명과 잠시 단절되는 듯한 이 기묘한 경험은, 뷰파인더 너머로 마주할 감춰진 마을에 대한 기대를 한껏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스마트폰의 안테나가 하나둘 줄어드는 것을 보며, 온전한 자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는 해방감이 온몸을 감쌌다.

▲ Nikon EM촬영 마을을 감싸 돌아 나가는 강물은 수량이 많지 않을때는 징검다리로 건널수 있다.
ⓒ 이재필

초여름의 투명한 공기, 그리고 니콘 EM의 영리한 경고음

트랙터에서 내려 마을 초입에 발을 디디는 순간, 나도 모르게 깊은 탄성을 내뱉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연둣빛 양탄자 같았다. 마침 우리 밀 수확을 코앞에 둔 시기여서, 온 대지가 눈이 부실 정도로 싱그러운 연두색과 맑은 초록빛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바람이 한 자락 불어올 때마다 수만 개의 밀이삭들이 서글서글한 소리를 내며 초록의 파도를 만들어냈다.

초여름 특유의 나지막하면서도 투명한 하늘은 청량함을 더해주었고, 그 푸른 대지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낯선 동 증류기의 붉은 실루엣은 공간의 신비로움을 정점으로 끌어올렸다. 마치 유럽의 어느 오래된 시골 마을이나 시간이 멈춘 환상 속의 정원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 Nikon EM촬영 수확을 앞둔 밀밭은 초여름의 싱그러움은 분위기를 한층 더 느끼게 해주었다.
ⓒ 이재필

이 눈부신 풍경을 필름 한 장에 온전히 담고 싶어 서둘러 니콘 EM을 눈가로 가져갔다. 수동으로 초점 링을 서서히 돌려가며 햇살을 머금은 밀이삭 하나에 초점을 맞추고 셔터를 누르려던 찰나, 카메라 내부에서 매섭게 "삐- 삐-" 하는 경고음이 울렸다.

청명한 시골 공기를 깨뜨리는 그 기계음에 깜짝 놀라 손을 멈췄다. 1979년에 처음 세상에 나온 니콘 EM은 작고 가벼워 '리틀 니콘'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수동 카메라다. 조리개 우선 모드를 기반으로 작동하며, 노출이 너무 부족하거나 반대로 과할 때 부저음으로 촬영자에게 경고를 보내는 영리한 기능이 있다.

초여름의 밝은 햇살과 투명하게 빛나는 하늘이 렌즈로 과하게 쏟아지자, 카메라의 노출계가 감당할 수 있는 최고 셔터 스피드인 '1/1000초'를 초과했다며 "지금 눈이 너무 부셔요!"라고 소리 높여 외친 셈이었다.

니콘 EM처럼 오래된 아날로그 카메라는 하늘이 너무 밝거나 하얀 배경이 넓게 자리 잡으면, 세상 전체가 과하게 밝다고 착각하여 오히려 사진을 어둡고 칙칙하게 인화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빛의 평균을 계산하는 기계의 한계 탓이다.

이럴 때 당황하지 않고 카메라 전면 왼쪽 렌즈 마운트 옆에 조그맣게 돋아난 '역광 보정 버튼(+2 스탑)'을 손가락 끝으로 꾹 누른 채 셔터를 누르면, 카메라는 기계적인 계산을 무시하고 빛을 두 배 더 풍성하게 필름 위로 입혀준다. 덕분에 밝은 하늘에 밀려 까맣게 뭉개지기 쉬웠던 연둣빛 밀밭의 부드러운 질감과, 세월이 묻어나는 동 증류기의 붉은 색조를 눈으로 보는 것처럼 화사하고 투명하게 살려낼 수 있었다.

아날로그 장비를 다루는 진짜 재미는 이처럼 기계의 부족함을 인간의 작은 손짓으로 달래며 서로 호흡을 맞춰가는 과정에 있다.

사라짐의 길목에서 피어난 100년의 약속

양조장 마당에 앉아 주인이 건네는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마을의 내력을 들었다. 지금은 이토록 아름답고 풍요로워 보이는 맹개마을이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작 대여섯 가구만이 외롭게 고향을 지키던, 지도에서 조용히 지워져 가던 오지 중의 오지였다고 한다.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노인들만 남은 마을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결국 주민들이 모두 떠나버린 빈 땅이 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맹개마을'이라는 아늑한 이름과 이 거친 강바람이 키워낸 땅의 역사적 기록들이 허무하게 소멸하는 것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던 이들이 하나둘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이 무너져가는 마을을 살리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바로 우리 밀 농사였고, 그 밀로 전통 술을 빚는 양조장을 세우는 일이었다.

▲ Nikon EM촬영 가동을 앞두고 있는 다단식 증류기
ⓒ 이재필

농약을 치지 않고 오직 낙동강의 맑은 물과 바람만으로 자라는 우리 밀은 일반 외래종 밀에 비해 수확량도 적고 가공하기도 까다롭다. 하지만 이를 사용해 정성껏 내린 소주는 과일향과 꽃향, 깊은 누룩의 풍미를 품은 최고의 전통주로 거듭난다.

사라져가는 마을의 시간을 붙잡고,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100년 뒤의 미래를 약속해가며 묵묵히 씨를 뿌리고 술을 내리는 사람들의 고집. 그 우직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가슴 깊은 곳에서 잔잔한 울림이 일었다.

그것은 어쩌면 매초 수천 장의 사진이 쏟아지는 디지털 시대에, 굳이 서른여섯 장짜리 불편한 필름 한 통을 넣고 손끝으로 정성스레 초점을 맞추며 사라져가는 아날로그의 감성을 붙잡으려는 우리의 마음과도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고 빠른 길을 두고 굳이 느리고 정직한 길을 걷는 이들의 온기가 마을 전체를 따스하게 데우고 있었다.

숙성실의 어스름 속에서 시간을 기록하다

서늘한 바람이 새어 나오는 숙성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알싸하면서도 곡물 특유의 들치근하고 구수한 술향이 코끝을 진하게 찔렀다. 어두컴컴한 공간 내부에는 커다란 오크통들과 옹기항아리들이 가득 늘어서 있었고, 그 안에서 투명한 소주들이 숨을 쉬며 은은한 향을 키워내고 있었다.

차가운 스테인리스 탱크의 밀봉이 아니라, 나무와 흙의 숨결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세월을 견디는 술의 모습은 필름실 안에서 빛을 머금고 천천히 상을 맺어가는 필름의 시간과 참 많이 닮아 있었다. 서두르지 않고 묵묵히 익어가는 것들만이 가질 수 있는 묵직한 가치가 전해졌다.

▲ Nikon EM촬영 출하를 기다리는 술들이 자연 토굴에서 조용히 숨쉬고 있다.
ⓒ 이재필

어스름한 조명 아래서 니콘 EM의 조리개를 f/1.4로 최대한 넓게 열었다. 빛이 부족해 셔터 스피드가 1/30초까지 뚝 떨어졌다. 손이 조금만 떨려도 사진 전체가 흐려져 필름을 버리게 되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지만, 카메라를 가슴팍에 가만히 붙이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멈춘 채 셔터를 눌렀다.

'툭-' 하는 기분 좋은 미러 쇼크와 함께 손바닥으로 잔잔하게 전해지는 아날로그의 진동. 한 장 한 장이 귀하고 돌이킬 수 없기에 온 신경을 손끝에 집중해야 하는 이 팽팽한 긴장감이 참 오랜만이었다. 찍는 즉시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와 달리, 필름 카메라는 현상소의 약품 속에 들어갔다 나오기 전까지는 그 결과를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우리는 풍경을 마음속에 한 번 더 새기게 된다. 숙성실 안에서 익어가는 술처럼, 내가 찍은 사진 역시 필름 통 안에서 조용히 익어가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물드는 저녁과 기다림의 미학

숙성실을 나와 다시 밀밭으로 걸어 나오자,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며 황혼의 붉은 빛이 연둣빛 대지 위로 얇은 실크처럼 내려앉고 있었다. 낮동안 청량하게 빛나던 초록색 밀밭은 이제 차분한 주황빛 옷으로 갈아입으며 한층 깊고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당 한편에 세워진 빛바랜 경운기 바퀴 자국 위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바라보며, 카메라의 와인딩 레버를 가만히 돌렸다. 철컥, 하며 다음 장으로 부드럽게 넘어가는 소리가 조용한 마을의 저녁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오늘도 맹개마을의 양조장은 향긋한 술 향기를 사방으로 품어내며 초여름의 자연 속에 아늑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니콘 EM의 작은 뷰파인더 속에 담긴 그 풍경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경치를 넘어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는 단단한 생명력 그 자체였다.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소비되고 쉽게 잊히는 세상 속에서, 이토록 느리지만 정직한 방법으로 자신만의 소중한 가치를 묵묵히 지켜가는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친 일상에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전통과 자연, 그리고 사라져가는 것들을 향한 인간의 따스한 애정이 필름의 거칠고 따뜻한 질감과 참 잘 어울리는 멋진 하루였다. 제습함 속에서 오랫동안 잠자던 카메라를 깨워 떠난 이번 안동 여정은, 한동안 잊고 지냈던 '기다림의 미학'을 다시금 일깨워준 소중한 출사로 가슴 속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트랙터 위에서, 아직 현상 되지 않은 묵직한 필름 통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벌써 초여름 안동의 정취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눈을 감아도 뷰파인더 너머로 보았던 그 싱그러운 연둣빛 파도와 아늑한 술 향기가 여전히 곁에 머무는 듯했다.
▲ Nikon EM촬영 진맥소주 '시인의 바위'의 모티브가 된 바위. 옛 선비들이 바위 위에 앉아 한시를 읊고, 계곡 바람을 벗 삼아 한가로운 여름날을 보내던 풍경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 이재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https://brunch.co.kr/brunchbook/mycamera4th)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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