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 1500조각 맞췄다”…왕실유산 되살린 설화수의 ‘빅 픽처’ [비크닉]
2026.06.27 06:00
환한 조명 아래 한 쌍의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마주한다. 벽조목으로 만든 몸체는 황금빛으로 굽이치고, 비단 실을 감은 가지마다 박달나무를 깎아 만든 잎과 옥·산호·진주로 빚은 열매가 매달렸다. 붉은 산호 가루를 두텁게 뿌린 발치엔 모란이 피고, 금빛 유기가 이 모두를 떠받친다. 약 140년 전, 고종의 명을 받아 조선 왕실의 장인이 옥과 나무, 금속으로 한 조각씩 빚어낸 인공 꽃나무-반화(盤花)다. 쟁반에 핀 꽃이라는 이름처럼, 이 작은 분경 안에는 조선이 한 나라에 건네고 싶었던 가장 복된 마음이 담겨있다.
돈덕전 반화, 140년만 살아 돌아오다
반화는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고종이 사디 카르노 프랑스 대통령에게 전한 외교 선물이다. 장수를 축원하는 소나무,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 다복을 기원하는 연화 등 다양한 길상의 의미를 빼곡하게 수놓은 이 공예품에는 상대국을 향한 축복의 의미와 함께, 격변의 시대를 지나고 있는 위태로운 조국에 다시 길조가 찾아오길 바랐던 염원도 담겨있다.
선물로 전해진 뒤 줄곧 파리 기메아시아예술박물관에 머물렀던 반화를 발견한 건 지난 1998년. 특별전을 위해 2024년부터 대여 협의를 했으나 진동에 취약해 국내 반입이 불가하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복제품 제작을 택했다. 50년 경력의 국가 무형유산 김영희 옥장(玉匠)은 프랑스로 건너가 반화를 실측하고 3차원(3D) 스캔을 실시했다. 비취모(물총새 깃털), 대모(거북이 등껍질) 등 당대 재료와 어교·아교 등 전통 접착 기법 등을 그대로 사용, 1500여개에 이르는 조각을 한 점 한 점 다듬고 붙여 꼬박 1년 만에 제작 당시의 완벽한 원형을 재현했다. 그리고 이 모든 복원 과정을 후원한 곳은 화장품 브랜드 ‘설화수’였다.
메세나 고집 20여년, 이쯤 되면 문화 브랜드
뷰티 기업 아모레퍼시픽 산하 설화수는 국내를 대표하는 럭셔리 뷰티 브랜드다. 설화수는 아모레퍼시픽이 1966년 처음 개발한 한방 인삼 크림 ‘ABC인삼크림’에 뿌리를 둔다. 설화수는 단일 화장품 브랜드 최초로 2015년 연 매출 1조원 돌파했다. 10년 연속 국내 백화점 매출 1위에 오르는 등 국내 화장품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겨왔다.
다만 설화수를 숫자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화려한 숫자 뒤에는 20년 넘게 쌓아온 집요한 문화 브랜딩 전략이 있다. 비슷한 스펙의 제품이 넘쳐나는 시대, 소비자가 끝내 지갑을 여는 건 그 브랜드가 어떤 세계관을 품고 있느냐다. 이런 전략은 브랜드의 남다른 ‘오라(Aura)’를 만들어야 하는 럭셔리 브랜드에 특히 유효하다. 샤넬이 ‘컬처 펀드’를 만들어 전 세계 미술관을 후원하고, 로에베가 브랜드 이름을 건 공예 상을 만들어 사라져가는 손의 기술을 끌어안는 것도 같은 이유다.
문화 전담 CA팀, 살롱 꾸리고 예술 전공생 지원
2021년부터는 예술 전공 대학생을 위한 창작 지원 프로그램 ‘설화프로젝트’가 가동된다. 단순한 공모전이 아니라 대학생들이 직접 기획·제작하는 제작 중심 프로그램이다. 참가자 전원에게 제작비와 활동비를 지원하고, 전문가 멘토링과 함께 약 3개월간 작품을 완성한다. 시즌1에서는 전통 가구 ‘각게수리’, 시즌2에서는 ‘민화’를 주제로 작품을 선보였고, 오는 8월에는 ‘탈춤’을 주제로 북촌 설화수의 집에서 전시가 열릴 예정이다.
일반 참여자를 위한 문화 프로그램인 ‘살롱 설화수’도 설화수의 대표적 문화 브랜딩 사례다. 한옥과 양옥이 어우러진 서울 북촌 ‘설화수의 집’을 무대로, 전통을 기반으로 현대적 작업을 선보이는 작가들이 클래스를 연다. 일방적 강연이 아니라 실제 교류가 일어나는 ‘살롱’ 콘셉트를 살려, 참여자가 직접 문화를 경험하고 체험하도록 설계한 것이 특징이다. 다루는 소재도 한국적이다. 도예와 전각(도장 공예), 분재, 보자기 포장이 대표적이다.
설화수에는 일련의 문화 활동을 전담하는 조직을 두고 있다. 지난해 신설된 CA(Culture Activation·문화 활동)팀이다. 말 그대로 설화수의 다양한 문화 예술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한다. 이다경 CA팀 담당자는 “한국의 미학에서 비롯된 설화수의 정체성을 문화 활동을 통해 깊이 있게 표현하고 이를 통해 설화수만의 품격을 완성해 갈 것”이라고 전했다.
시간이 축적한 한국의 미감을 찾다
이런 일관된 시선은 설화수가 제품을 만드는 방식과 정확히 포개진다. 한국의 땅에서 나는 원료인 고려인삼을 지난 60년간 집요하게 연구해 화장품을 빚어온 브랜드. 설화수는 상품과 문화에서 언제나 한국의 것을 현대로 잇는 방식으로 움직여 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축적이라는 태도다. 당장 매출로 이어지지 않는 문화 활동을 집요하게 지속하는 것. 소모성 트렌드가 아니라 시간이 빚어낸 한국적 아름다움을 천천히 쌓아 올리는 방식. 시간을 이기는 아름다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늘 질문하는 뷰티 브랜드이자, 한국의 브랜드인 설화수가 택한 정공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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