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대신 읽어주는 시대, 인간이 잃는 것
2026.06.27 00:11
나오미 배런 지음
전병근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책에 인용된 에피소드 하나. 한 명문대에서 예비졸업생들에게 지난 4년간 인생을 바꾼 책이 무언지 물었다. 어색한 침묵이 길게 흐른 뒤 한 학생이 말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책을 읽지 않거든요. 수업을 이수하기 위해 각 책을 필요한 만큼만 뽑아 읽을 뿐이죠.”
‘뽑아 읽기’ 위해 도서관을 가지는 않는다. 다른 사례 하나. 한 대학생이 커피를 사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스마트폰으로 AI(인공지능)에게 논문을 읽고 요약본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요약본을 훑어본 뒤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제야 나온 커피를 받아 자리를 뜬다.
기술이 언어와 인간의 문해력, 주의력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온 언어학자인 저자는 이런 ‘스마트한’ 세상에 개탄한다. 인간이 품이 드는 독서를 AI에게 맡겨 얻은 시간에 소셜미디어를 즐기는 사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 추적한 보고서가 이 책이다.
읽기란 단순히 정보를 얻는 도구가 아니다. 저자는 읽기를 기억과 공감, 판단, 나아가 윤리적 인식 능력까지 형성하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AI가 텍스트를 선택하고 해석하며 요약해주는 것은 시간을 절약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비판적 사고 근육을 키우고 정신적 지구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인지적 노동을 대신할 뿐 아니라, 여가활동의 하나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삶의 활력을 재충전할 기회를 앗아간다.
사실 AI가 나오기 이전에도 책 읽기의 미래가 밝은 전망은 이미 아니었다. 많은 노력이 필요한 독서를 우회하는 지름길도 있었다. 수험생들을 위한 철학 및 문학작품 요약서가 책방에서 팔렸고, 클리프노츠 같은 요약 정리 웹사이트들이 인기를 끌었다. 이들은 독서를 위한 보조도구 또는 학습 가이드 역할을 내세웠지만, 과거 세대 학생들이라고 그렇게 순진하지만은 않았다. 결국 완독 시간을 아끼는 ‘뽑아 읽기’ 도구가 됐다.
훨씬 똑똑해진 AI가 나온 뒤에야 두말이 필요 없다. 기술의 유혹을 무시하기 어렵다. 대신 읽어주겠다는데 왜 그 많은 일을 내가 직접 해야 하지? 그러다 보니 책을 내는 출판사가 앞장서 AI를 홍보하는 시대가 됐다. 대형 의학과학출판기업 엘스비어는 자사가 보유한 세계 최대의 과학 논문과 단행본을 요약·비교·종합해 제시하는 사이언스다이렉트AI를 출시하면서, “읽는 시간의 낭비여 이제 안녕. 관련성이여 어서 오라”고 자랑했다. 필자가 들어가 보니 지금은 “검색은 그만. 발견을 시작하라”는 훨씬 근사한 문구로 바뀌었지만, 지식 소비자들의 니즈가 어디에 있는지 진작에 간파한 것이었다.
저자는 AI가 인간과 어떻게 다르게 읽는지 분석한 뒤 우리가 읽기를 버렸을 때 어떤 위험이 따르는지 설명한다. 책뿐만 아니라 평가를 위한 읽기(자기소개서), 의무적 읽기(학교·직장), 자발적 읽기(여가), 사회적 연결로 읽기(편지·이메일)로 나눠 살펴본다. 교육과 출판, 법률, 공공정책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들여다보지만 극단적 주장보다는 사례와 설문조사, 역사적 비교, 언어학적 추론을 통해 신중하게 접근한다.
저자는 AI 읽기의 거부를 주장하지 않는다. 직접 사용해보고 패턴을 찾거나 기억을 되살리는 AI의 능력에 감탄하면서, 그래서 더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의존성을 우려한다. 일부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저자는 아무리 뛰어난 AI라 하더라도 실제 삶의 맥락, 감정적 기억, 윤리적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대목에서는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성장소설을 AI한테 대신 읽게 하는 것은 자신의 성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평범한 독서가 정신의 퇴화를 막아준다는 점이다. 독해와 논증, 모호함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을 멈추면 비판적 사고와 인지 능력을 잃게 된다. 빠른 AI가 도움을 줄 수는 있어도 판단력과 분석력을 키우는데 필수불가결한 느린 노력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AI에 대한 전적인 의존은 영혼을 악마에게 판 파우스트의 거래와 다를 게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가련한 파우스트와는 달리 당신의 선택은 전부 아니면 전무일 필요는 없다.” 인간 주도적 읽기와 AI를 활용한 대신 읽기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이훈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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