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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맛에 홀려버린 뒤… ‘밤의 시드니’에 눈 뜨다

2026.06.27 00:31

[아무튼, 주말]
6월, 빛의 도시로 변모
호주 시드니의 재발견

시드니의 상징 하버 브리지를 바라보며 관광객들이 노을을 즐기고 있다. /카페 시드니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처음 호주 시드니에 와 놀란 건 오리너구리처럼 그 발생 연원을 설명하기 힘든 자연·문화적 특수성이었다. 언어도 그러했다. 무슨 단어든 축약해 ‘y’나 ‘o’를 붙여 버리는 독특한 화법. 하루는 하루키가 호텔 직원에게 “이 근처에 빨래방(Laundromat·론드로맷)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잠시 후 돌아온 대답이 “아 ‘론디’ 말이군요”였다고 한다. 이런 경우가 하도 잦아 혀를 내둘렀다고. “그런 말을 들으면 종종 ‘아아, 그냥 멋대로 사세요’라고 하고 싶어진다.”

얼마 전 기자가 시드니에 도착하자마자 한 일은 머리를 깨우려 커피를 찾는 것이었다. 현지인에게 “스타벅스가 어딨느냐”고 물었다. 근처에서 쉽게 볼 수 있을 테니까. 친절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 ‘스타비’ 말이군요.” 그러고는 덧붙였다. “거기는 관광객밖에 안 가요. 원하시면 제가 맛 좋은 카페를 알려드릴게요.” 스타벅스가 맥을 못 추는 거의 유일한 나라. 그의 추천 리스트 몇 곳을 받아든 뒤, 시드니에 머문 일주일 동안 매일 커피 4잔 이상을 마셔대는 중독 수준에 이르렀다.


호주를 대표하는 유명 카페 캄포스, 토비스 에스테이트, 아슬란의 커피 및 브런치(왼쪽부터). /각 사

가벼운 위궤양 증세를 느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시드니가 ‘브런치’의 도시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인스타그램에 넘쳐나는 찬탄의 후기, 그러나 빵이 맛있어 봐야 빵이고, 커피도 그렇지 않겠는가? 아니었다. 이를테면 ‘토비스 에스테이트’(Toby’s Estate)는 지난해 전 세계 100대 커피숍 중 1위로 선정된 카페. 이곳 한국인 직원의 추천대로 ‘플랫 화이트’(Flat White)를 주문했다. 1980년대 시드니에서 처음 탄생한, 에스프레소 위에 우유 거품이 평평하게 올라간 라테다. 쓴 듯 단 듯 부드러운 별미. 더 진한 플랫 화이트 ‘피콜로’(Piccolo)도 마셔봤다. 손맛 좋은 두피 마사지 비슷한 각성 효과를 냈다.

앙증맞은 크기의 '베이비치노'. 부모와 함께 온 유아를 위해 제공되는, 호주 커피 문화를 상징하는 메뉴다. /정상혁 기자

여기서는 아메리카노 대신 ‘롱 블랙’(Long black)이라는 말을 쓴다. 에스프레소는 ‘숏 블랙’. 가게마다 차이는 있어도 커피가 기본적으로 진하다. 가히 ‘블랙’이 어울리는 풍미. 물을 덜 타는 데다, 물을 먼저 붓고 그 위에 원두를 내려 크레마(거품)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민자들이 모여 형성한 독특한 커피 문화 덕에 ‘캄포스’ ‘아슬란’ ‘서리힐스 싱글오’ ‘스리 블루 덕스’ 등 개성 강한 카페를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애들도 한 잔씩 즐길 수 있다. ‘베이비치노’가 있으니까. 유아들을 위한 ‘베이비 카푸치노’의 줄인 말. 진짜 카푸치노는 아니고 데운 우유에 초콜릿 가루를 뿌린 것인데, 인심 좋은 카페는 공짜로 주기도 한다. 커피 사랑이 남녀노소를 불문하는 이유일 것이다.


황혼 무렵, 시드니를 상징하는 교각 하버 브리지에서 클라이밍 체험을 하고 있는 관광객들. 안전 교육을 포함해 3시간 코스다. /뉴사우스웨일스주 관광청

종일 눈이 말똥말똥했다. 세계 3대 미항(美港)에 왔으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시드니의 핵심, 너나없이 다 가는 곳이지만 결코 건너뛸 수는 없는 ‘오페라 하우스’를 여정의 출발지로 삼았다. 포시즌스 호텔 등 인기 숙소 및 지하철·여객선 터미널 등의 교통편이 몰려 있고, 바로 옆에 거대 야외 식물원 ‘로열 보타닉 가든’까지 있다. 눈요기 후 간단히 요기도 가능하다. 호주는 ‘미쉐린 가이드’ 대신 자국 ‘굿푸드 가이드’가 부여하는 ‘셰프 햇’(hat·3햇이 만점)으로 식당에 급을 매기는데, 꾸준히 ‘2햇’을 받는 맛집 ‘베네롱’이 오페라 하우스 안에 있다. 한국인 요리사 윤남노씨가 일했던 곳이기도 하다.

시드니의 대표적 해변 본다이 비치의 ‘아이스버그 수영장’. /정상혁 기자

원초적 풍경을 원한다면 근처에 ‘본다이 비치’(Bondi Beach)가 있다. 본다이는 원주민 언어로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를 뜻한다. 택시로 15분이면 닿는다. 탄산음료 캔을 처음 딸 때처럼, 해안마다 청량한 포말이 터져 올랐다. 6㎞에 걸친 산책로 ‘코스탈 워크’(Coastal Walk)를 커피 홀짝이며 걷다 끄트머리 ‘아이스버그 수영장’(Iceberg Pool)에 닿았다. 바다와 맞닿은 수영장, 정말 각진 얼음처럼 생겼다. 거센 파도가 그 얼음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여기서 차분한 건 갈매기뿐. 본다이 비치는 사실 지난해 12월 총기 난사 테러가 일어난 충격의 장소다. 전 세계가 놀랐다. 인근 과일 가게 주인이 맨몸으로 총격범을 제압했다. 전 세계가 놀랐다.

시드니 천문대 앞 잔디밭에서 시민들이 노을을 바라보고 있다. 카메라 대신 스케치북을 펼쳐 수채화로 노을을 기록하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정상혁 기자

놀랍게도 서울과의 시차는 단 1시간, 그러나 시간의 감각은 사뭇 다르다. 시드니에 관한 대표적인 오해는 “저녁에 할 게 없다”는 것이다. 웬만한 카페는 오후 3시쯤 문을 닫는 동네니까. 절반의 오해다. 본색은 이때 시작되기 때문이다. 오후 4시 30분쯤 되면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향하는 곳이 있다. 일몰 맛집 ‘시드니 천문대’ 주변 잔디밭에 모여 피크닉을 벌이고, 공책을 펴 수채화를 그린다. 해가 언덕을 넘어가면 일순 몽롱해지는 순간이 온다. 하버 브리지의 거대한 철골이 서서히 땅거미에 잠길 때, 거미처럼 그 꼭대기를 기어오르는 등반족(族)이 보일 것이다. 40만원짜리 유료 스릴 체험. 알뜰족에게는 하버 브리지 보행로 산책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왕복 1시간 러닝 코스로도 유명한데, 바다 위를 걷는 와중에 간혹 교각이 흔들릴 때마다 충분히 오금이 저렸다.


‘비비드 시드니’ 기간 미디어아트로 채색된 오페라 하우스. /뉴사우스웨일스주 관광청

오후 6시가 되자 도시는 작정하듯 빛을 뿜어냈다. 밤의 시드니를 본격화하는 야간 축제 ‘비비드 시드니’(Vivid Sydney)가 시작된 것이다. 시드니 중심가 서큘러 키부터 바랑가루~달링 하버 등으로 이어지는 6.5㎞ 구간을 각종 조명과 폭죽, 빛의 무대로 꾸미는 프로젝트. 이를테면 오페라 하우스의 흰 지붕이 미디어아트로 채색돼 거대한 수족관으로 변신하는 장관, 떠들썩한 야장 ‘파이어 키친’의 열기 같은 것이다. 5월 말~6월 중순 치러지는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이맘때 시드니를 찾은 이유다. 발광하는 40여 개의 설치미술 작품만큼 인상적이었던 건, 곳곳의 전광판으로 끊임없이 거리 혼잡도와 인근 화장실 위치 등을 알려주는 친절함이었다. 장애인 포용 장관까지 둔 주(州)의 섬세함이랄까. 계속 비가 왔지만 혼란은 없었다.

야장 행사 ‘파이어 키친’에서 요리사가 고기를 굽고 있다. /정상혁 기자

6월부터 호주는 겨울로 돌입한다. 영상 20도를 오가기는 해도, 비가 잦고 남반구의 칼바람이 제법 날카롭다. 전통의 여행 비수기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비비드 시드니’로 인해 그 전통도 옛말이 돼가고 있다. 여기에 웨스턴 시드니 국제공항까지 오는 10월 개항하면서 접근성도 향상될 전망. 금요일 밤 ‘차 없는 거리’가 된 골목마다 인파로 들썩였다. 2019년 오픈해 7년 연속 ‘월드 50 베스트 바’에 이름을 올린 ‘메이비 새미’(Maybe Sammy)에는 심지어 자정 무렵에도 웨이팅이 있었다. 바텐더들이 비눗방울을 불며 술을 섞고, 칵테일이 모두 영화 제목인 독특한 명소. 하이볼 ‘좋은 친구들’(Good Fellas)을 주문했다. 매콤했다. 밤을 깨우는 맛.


올해의 '패킹룸 프라이즈' 수상작, 션 레이의 '덴마크 왕자 햄릿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누군가 사진에 담고 있다. /정상혁 기자

마침 전역에서 ‘시드니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었다. 비엔날레가 대개 그렇듯 의미만 거창한 재미없는 전시가 태반인지라 별 기대는 없었다. 그러나 ‘뉴사우스웨일스 미술관’은 예상 밖의 즐거움이었다. 이를테면 아직 호주에는 국가가 인증하는 현대 미술 등용문, 일종의 국전(國典)이 존재한다. 올해의 수상작 전시가 미술관 유일의 유료 전시였다. 수상작은 당연히 저명 심사위원이 선발하지만 그중 특별한 눈길을 끄는 ‘특별상’이 있다. 그림을 접수·운반하고 포장을 풀어 벽에 거는 직원들이 최고로 꼽은 그림(Packing Room Prize)이다. 그들이야말로 최초의 관람객이기 때문이다.

뉴사우스웨일스 미술관 신관에서 8월까지 열리는 이색 전시. 전시라기보다는 맘껏 뛰노는 놀이터다. /정상혁 기자

2년 전 완공한 신관 지하 4층에 독특한 공간이 있다. 옛 기름 저장소를 개조한 전시장이다. 들어서자마자 애들이 뛰노는 난리통에 어리둥절했다. 그네·DJ 부스·샤워기·사우나 등이 설치돼 있고, 젖을 것에 대비해 갈아입을 옷까지 준다. 부모들은 집에서 빨랫감을 가져와 전시장에 놓인 세탁기를 돌릴 수도 있다. 작품 훼손에 전전긍긍하는 대신 예술과 생활의 경계를 허무는 공공 미술 프로젝트. “진정 포용적인 미술관은 어떤 모습일지 질문을 던진다”고 했다. 한국인 꼬마도 있었다. 홀딱 젖은 채로 처음 만난 필리핀 꼬마와 뭐라 뭐라 얘기를 나눴다. 서로 주눅 들지 않고 논다. 포용의 참모습이 이와 같을 것이다.


비 온 직후, 저녁 무렵의 '엘리자베스 서점' 풍경. 바깥에 '블라인드 북'이 놓여있다. 무슨 책인지는 느낌으로 골라야 한다. /정상혁 기자

한 도시를 아름다움만으로 포장할 수는 없다. 이곳에도 그늘은 있다. 시드니대학교가 있는 뉴타운을 거니는 중이었다. ‘뉴’와는 반대에 가까운 빈티지 타운, 휴대폰으로 지도를 보며 걷는데 발끝에서 물컹한 감각이 느껴졌다. 깔려 죽은 쥐였다. 차이나타운 근처 햄버거 가게 ‘헝그리 잭스’에서는 노숙자가 들어와 점원에게 먹을 것을 구걸했다. 소셜미디어를 도배하는 유명 여행지도 결국 삶의 공간일 뿐. 그러나 놀라움은 계속된다. 점원은 노숙자를 쫓아내는 대신 갓 구운 햄버거를 건넸다.

헌책방 ‘엘리자베스 서점’에서 책을 한 권 골랐다. ‘블라인드 책 데이트’로 유명한 곳이다. 표지가 보이지 않게 종이로 꽁꽁 싸매 놓고 그 위에 책과 관련된 키워드만 적어놨다. 운명적 만남의 기대감을 선물하는 것이다. 뭐가 나올지 까보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것, 두 글자로 줄이면 여행이 될 것이다. 그러니 계속 읽을 수밖에. 다음 날 시드니 교외로 향했다. 녀석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차창 밖 들판에서 야생 캥거루 두 마리가 서로 치받고 있었다.



高原의 포도밭에서, 게으른 캥거루처럼

[전원 휴양지 서던 하일랜드]

시드니 근교 ‘심비오 와일드 라이프 파크’에서 한 아이가 캥거루와 왈라비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정상혁 기자

시드니가 있는 뉴사우스웨일스주(州)는 호주에서 인구도 볼거리도 제일 많은 동네다. 여행지 오스트레일리안 트래블러가 선정한 ‘2026년 호주 최고의 도시 100곳’ 중 최다인 25곳이 이 구역에 포진했다.

이를테면 남쪽으로 1시간 반쯤 달리면 닿는 서던 하일랜드(Southern Highlands)에는 고풍스러운 전원 휴양지가 즐비하다. 남부 고원의 여유는 서늘한 바람과 창백한 햇빛, 거기서 느리게 익어가는 와인으로 대표된다. 보우럴(Bowral) 지역의 최대 규모 와이너리 ‘센테니얼 포도밭’은 낮은 기온 덕에 특유의 단맛으로 유명한데, 특히 스파클링 레드 와인은 기대치를 훌쩍 뛰어넘었다.

서점과 레스토랑을 합친 이색 식당 '북반'. /정상혁 기자

인근 베리마(Berrima) 지역에는 ‘벤둘리 에스테이트’ 와이너리가 존재감이 크다. 내부의 독특한 레스토랑 ‘북반’(Book Barn)이 한몫했다. 이름처럼 희귀 고서 등의 책더미로 둘러싸인 식당, 6대에 걸쳐 서점을 운영 중인 이곳 가문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울런공 항만의 90년 된 등대 앞에서 관광객들이 볕을 쬐고 있다. 온통 푸른빛이다. /정상혁 기자

울런공(Wollongong)은 ‘바다 소리’라는 뜻의 해안 마을이다. 거대한 흰 등대를 향해 뻗은 고요한 백사장을 거닐다 보면 이곳이 시드니 사람들의 휴양지로 사랑받는 까닭을 이해하게 된다. 이제는 인사를 할 때가 됐다. ‘심비오 와일드 라이프 파크’로 갔다. 교감형 동물원. 아기 코알라와 얼굴을 맞대고 셀카를 찍는 영광을 누린 뒤, 드디어 녀석들과 조우했다. 동부 회색 캥거루. 먹이를 쥐고 다가가자 십여 마리가 금세 주변을 에워쌌다. 그들과 풀밭에 누워 한참을 뒹굴었다. 드라이브 코스 ‘캥거루 밸리’를 지나 다시 시드니로 향하는 여정, 미안한 말이지만 캥거루 육포는 의외로 맛이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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