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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수박 말고 ‘블랙위너’ 주세요”

2026.06.27 00:34

[아무튼, 주말]
산미∙식감까지 따진다
과일 품종 전성시대

지난 22일 롯데마트 서울역점 과일 코너에 여러 종류의 수박이 쌓여 있는 모습.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22일 낮 12시, 서울 중구 대형마트 서울역점의 과일 코너. 진열대 한쪽을 빼곡히 채운 토마토 매대에는 찰토마토를 비롯해 캄파리·흑대추방울·스윗탱고 등 10여 가지 종류의 토마토가 진열돼 있었다. 다른 과일 매대도 상황이 비슷했다. 포도는 캠벨·델라웨어·거봉 등으로 분리돼 박스에 담겨 있었고, 수박은 ‘아삭한 식감의 블랙위너수박’, ‘속이 노란 블랙미니수박’ 등의 설명이 붙은 채 팔리고 있었다.

토마토 매대 앞에 있던 여성이 고민 끝에 검붉은색의 ‘흑대추방울토마토’와 선명한 붉은색의 ‘스윗탱고토마토’를 한 팩씩 집어 들었다. 그는 “단단한 흑대추방울토마토는 샐러드용으로 쓰고, 당도가 높은 스윗탱고는 후식용으로 먹을 것”이라며 “용도와 선호하는 맛에 따라 종류를 따로 골라 산다”고 했다.

‘크고 잘 익은 것’이 선택의 기준이었던 과일 소비 패턴이 달라지고 있다. 단일 품목의 크기와 당도뿐 아니라 품종 고유의 맛과 식감, 요리 목적에 따른 용도까지 따져 과일을 고르는 이른바 ‘품종 소비’가 시장의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동안 과일 시장을 지배한 기준은 ‘브릭스(Brix·당도)’였다. 일반 상품보다 당도 기준을 1브릭스 이상 높인 ‘고당도 과일’이나 인공지능(AI) 기술을 접목한 ‘AI 당도 선별 과일’이 시장을 점령하기도 했다. 수치화된 당도와 외형의 균일함이 상품 가치의 척도가 됐던 셈이다.

최근에는 과일 쇼핑 패턴이 더욱 정교해지고 있다. 단순히 당도만 보는 것이 아니라 품종에 따라 달라지는 과육의 식감과 향, 산미 등을 따진다. 직장인 이모(38)씨는 최근 과일 전단지에 적힌 12종의 복숭아를 보고 놀랐다. 오월도·신비·신선·대극천·스위트퀸·옐로드림·엘바트 등의 복숭아 품종이 수확 시기별로 적혀 있었다. 이씨는 “복숭아 종류는 황도와 백도뿐인 줄 알았는데 품종마다 맛과 식감이 다르다고 하더라”며 “산미가 적고 단맛이 강하다는 신비 복숭아를 주문해 먹어보니 정말 달콤한 맛이어서 놀랐다”고 했다.

복숭아는 품종별 개성이 뚜렷해 소비자가 차이를 체감하기 쉬운 과일로 꼽힌다. 예를 들어 마도카 복숭아는 수확 직후 비교적 단단하지만 이틀 정도 후숙하면 과육이 조밀해지며 쫀득한 식감으로 변한다. 신선 복숭아는 비교적 산미가 있는 반면, 대극천 복숭아는 산미가 적고 단맛이 강하다. 옐로드림은 황도 특유의 진한 단맛과 향을 내세우고 스위트퀸은 이름처럼 당도가 높고 과즙이 풍부하다.

용도를 따지기도 한다. 단일 생과(生果)로 먹는 것을 넘어 샐러드·주스·베이킹 등 조리 방식에 최적화된 품종을 골라 사는 식이다. 특히 채소류인 토마토는 조리용이나 요리 부재료로 활용되는 스펙트럼이 일반 과일보다 넓어 요리 방식에 따라 최적화된 품종을 따져 사는 경우가 많다. 불에 가열해 소스를 만들거나 파스타에 넣을 때는 가열 후에도 형태가 잘 유지되고 맛이 진하게 농축되는 품종을 찾는다. 샐러드에는 겉이 단단하고 아삭한 식감의 품종을, 간식용으로는 당도가 높은 품종을 고른다.

포도는 시장 전체의 품종 판도를 바꾼 과일로 꼽힌다. 씨가 없고 껍질째 먹는 샤인머스캣의 유행은 ‘과일도 품종을 보고 골라 먹는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최근에는 길쭉한 원통형 모양 때문에 ‘가지포도’로 불리는 블랙사파이어, 껍질이 자주색에 가까운 레드샤인머스캣 등으로 취향이 다변화되고 있다. 부드러운 과육과 진한 향이 특징인 설향, 일반 딸기보다 알이 큰 킹스베리, 새콤한 맛의 비타베리 같은 딸기 품종 이름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대형마트나 백화점 식품관 매대는 과일명 중심이 아닌 세부 품종 중심 진열로 바뀌고 있다. 단일 과일명 대신 품종명을 내세우고, 품종별 특징을 소개하는 안내문을 비치하는 식이다. 과일 포장 용기에 ‘샐러드용’ ‘피자 토핑용’ ‘마리네이드용’처럼 용도 설명을 붙이기도 한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품종을 지정해 찾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매대 전면에 품종 이름과 함께 ‘아삭함’ ‘쫀득함’ 같은 식감 그래프나 추천 조리법을 적어두기도 한다”고 했다.



변화의 배경에는 달라진 인구 구조가 있다. 1~2인 가구가 보편화되면서 박스 단위로 과일을 쌓아두고 먹는 ‘대량 소비’ 대신, 한 입을 먹더라도 제대로 된 상품을 사겠다는 ‘양보다 질’의 소비 경향이 정착했다. 그러면서 과일이 일종의 ‘작은 사치품’이 됐다. 고가의 명품은 사지 못하더라도 귀한 품종이라는 과일 한 팩에 기꺼이 2만~3만원을 지불하며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지금 이 계절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한정판 품종”이라는 식의 ‘제철 한정 마케팅’ 역시 영향을 미쳤다.

소비 수준의 ‘파인화(Fine化·고급화 및 세분화)’ 역시 이 같은 흐름이 확산하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쌀을 고를 때 고시히카리·삼광·오대쌀·수향미 등 세부 품종과 단백질 함량을 따져 사거나 커피 마실 때 원두 산지와 품종을 비교하던 소비 행태가 과일 영역으로 옮겨붙은 것”이라며 “눈이 높아진 소비자들이 과일에서도 ‘감별하고 고르는 재미’를 찾기 시작했다”고 했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좋은 과일과 그렇지 않은 과일을 구분하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좋은 과일 중에서도 어떤 품종을 선택할지를 고민하는 단계로 소비자 눈높이가 올라갔다”고 했다.

소비자가 체감하는 미세한 차이가 곧 경쟁력이 되면서 품종 개발도 활발하다. 국립종자원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새로 등록된 국내 토마토 품종은 25종, 복숭아 품종은 15종에 이른다. 수박(14종)과 딸기(10종)도 각각 두 자릿수에 이르는 품종이 새로 등록됐다. 권정윤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연구관은 “특히 복숭아는 저장성이 약해 한 품종이 시장에 머무는 기간이 짧은 만큼, 소비자 요구에 맞춰 수확 시기가 조금 다른 것만으로도 시장에서 새로운 품종으로서의 가치가 크다”고 했다. 한 농업 전문가는 “최근 신품종 상당수는 단순히 당도 수치를 높이는 전통적인 개발 방식을 넘어 특정 식감이나 향 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했다.


지자체의 지역 특산물 마케팅 공식도 바뀌는 추세다. 과거에는 ‘논산 딸기’나 ‘성주 참외’처럼 지역 이름에 단일 과일명을 조합하는 식이었지만, 이제는 지역명 뒤에 세부 품종까지 명시하는 ‘품종 브랜딩’을 한다. 충남 논산이 대표적이다. 논산시는 단순히 논산 딸기를 홍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내 딸기 시장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대표 품종인 ‘설향’ 주산지임을 전면에 내세운다. 경북 청도는 ‘복숭아 산지’보다 ‘신비 복숭아’의 고장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한다. ‘김천 샤인머스캣’, ‘상주 샤인머스캣’ 명칭도 사람들에게 익숙하다.

개별 농가 입장에서도 품종 다양화는 고부가가치를 노리는 생존 전략이다. 기후 변화로 전국적인 수확기가 맞물리는 현상이 잦아지고 값싼 수입 과일까지 쏟아져 들어오며 기존의 흔한 범용 품종을 대량 생산하는 것만으로는 차별화를 이루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국립특작과학원 관계자는 “다양한 품종을 개발하고 재배하는 것은 경쟁력을 확보하고 병해충 피해 등에도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소비가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본다.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과거에는 국내산인지 수입산인지를 따졌고, 이후에는 산지와 친환경 인증 여부를 비교했다면 이제는 품종까지 따져 구매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며 “원산지와 재배 방식에 이어 품종까지 선택 기준이 되는 것은 선진국형 소비의 특징으로 농산물을 고르는 기준이 앞으로 더욱 까다로워질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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