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의 상황에서 살아온 사람들, 마지막 사람을 눈여겨 봐주세요
2026.06.26 06:46
오는 6월 29일은 '광부의 날'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그런 날이 있었냐"고 할 것이다. 맞다. 지금까지 그런 날은 없었다. '광부의 날'은 지난해 제정되어 올해부터 처음 시행되는 법정기념일이다.
아무도 모르는 '광부의 날'
지난해 12월 30일 '폐광지역 개발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석탄산업전환지역 개발 지원에 관한 특별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탄광 폐쇄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환기하지만 다소 부정적인 어감을 지녔던 "폐광지역"이라는 명칭을, 좀 더 미래 지향적인 관점에서 석탄산업의 '공정한 전환'을 지향하는 "석탄산업전환지역"으로 변경한 것이다.
개정 특별법은 이와 함께 6월 29일을 '광부의 날'로 지정하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기념 행사를 실시할 수 있도록 했다. 6월 29일은 1951년 대한민국 최초의 광업법이 제정·공포되어 국내 광업의 제도적 기반이 마련된 날이다.
제11조의6(광부의 날) ① 석탄산업에 종사하였거나 종사하는 과정에서 안전사고나 직업병 등으로 목숨을 잃은 광부의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매년 6월 29일을 광부의 날로 정한다. - 석탄산업전환지역 개발 지원에 관한 특별법 중
법률상 광부의 날 제정 취지는 광부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수많은 광부들이 광업에 종사했던 시기, 그들의 일터는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공간이었다. 갱도의 입구에는 "아빠 오늘도 무사히"라는 섬뜩한 문구가 그저 무심히 붙어 있었다. '출근길이 지옥길'이라는 푸념은 대도시 직장인에게는 교통 체증에 대한 수사일지 모르지만, 광산촌 광부들에게는 아무런 과장도 없는 말 그대로의 현실이었다.
탄광 노동은 강도가 가장 높았을 뿐만 아니라 사망 재해율도 가장 높았다. 광부들의 재해율은 일반 제조업 노동자의 거의 10배에 달했다. 광부들이 일하는 현장에는 낙반, 붕락, 출수, 가스 누출, 운반 사고 등 목숨을 위협하는 각종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 ▲ 영화 <1980 사북> 스틸컷 |
| ⓒ 엣나인필름 |
1970년 12월 10일 도계 흥국탄광에서 갱내 화재로 8명 소사
1971년 2월 15일 황지읍 혈암 탄광 광차 104미터 낭떠러지로 추락 12명 사망
1972년 2월 28일 문경군 단봉광업소 일산화탄소 누출로 8명 질식사
1973년 5월 5일 황지읍 혈암탄광 광차 전복사고로 19명 사망, 16명 부상
1973년 11월 23일 정선군 고한 동고광업소 폭발사고 17명 사망
1974년 1월 15일 황지읍 어룡광업소 갱내 출수 사고로 12 명 사망
1974년 5월 28일 정선군 고한 삼척탄좌 정암광업소 갱 붕락으로 18명 사망
1977년 11월 16일 도계 장성탄광 화재, 402명 매몰 9명 사망
1978년 11월 10일 도계 장성광업소 승강기 추락 12명 사망
1979년 4월 14일 정선군 함백광업소 화약폭발사고로 광부 26명 사망, 34명 부상
1979년 10월 27일 문경 은성광업소 지하 화재로 42명 사망
1980년 5월 20일 충남 보령군 덕수탄광 갱 붕락으로 5명 사망
1981년 1월 6일 경북 문경 은성광업소 갱 붕락으로 8명 사망
1981년 7월 1일 정선군 고한 정동광업소 폭발 사고로 7명 사망, 28명 부상
1970년대 내내 매년 평균 200명에 가까운 광부들이 일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체 산업 노동자 6백만 명 중 광부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1.5% 이하였지만, 재해 사망자 비율은 평균 14%를 넘었다(고용노동부, "산업재해현황분석"). 1983년 ILO 보고서는 한국의 탄광 노동자 사망재해 도수율이 일본의 10배, 필리핀의 5배라고 밝힌 바 있다.
폐광 이후 광산 재해 건수는 크게 줄었지만, 1988년 이후에는 진폐 사망자가 재해 사망자 수를 추월했다. 과거 탄광이 번성했던 강원도 4개 시군(태백·정선·삼척·영월 등)에 가장 많은 진폐 재해자가 밀집해 있다.
강원 지역 진폐 재해자 수는 2017년 3677명 수준이었으나, 잠복기를 거친 퇴직 광부들의 노령화와 함께 2021년 5029명, 2022년 5272명으로 매년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고용노동부 및 질병관리청 국가건강정보포털에 따르면 과거 1971년부터 2004년까지 34년간 광업에 종사하다 산재를 당한 근로자는 총 20여만 명이고, 진폐 관련 환자는 그 중의 20%인 약 4만 명에 달한다.
석탄 증산에만 몰두하던 당시 국가와 탄광 기업주에게 광부의 안전은 뒷전이었다. '선 생산, 후 안보'라는 노골적인 생산 독려 구호는 광부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근대화의 험악한 얼굴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매일같이 연탄 불씨를 꺼트리지 않기 위해 애썼지만, 그 탄을 캐낸 사람들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광부들의 이야기는 이따금 전해지는 탄광 붕괴 매몰 사고 소식뿐이었다. 광부들의 목숨과 그 가족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열악한 노동환경은 매몰 현장에서 살아나오는 영웅적인 생존기에 묻혔다.
사라진 탄광
이제 대한민국에서 탄광은 찾아 보기 힘들게 되었다. 몇 개 남지 않았던 대한석탄공사 산하의 핵심 국영 탄광들이 몇 년 전부터 차례로 문을 닫았다. 2023년 6월에 우리나라 최초의 탄광이었던 전남 화순광업소가 폐광 되었고, 2024년 6월에는 강원 태백의 장성 광업소가 문을 닫았다. 2025년 6월 30일에는 마지막 국영 탄광으로 남아 있던 삼척 도계 광업소가 89년 만에 폐광해 우리나라에서 국가 차원의 석탄 산업은 공식 종료되었다. 이와 함께 1950년 대한민국 1호 공기업으로 설립되어 우리나라의 산업화를 이끌었던 대한석탄공사도 75년 만에 완전히 청산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민영 탄광은 삼척시 도계읍에 있는 경동 상덕광업소 단 한 곳 뿐이다. 상덕광업소 역시 최근 노사 합의에 따라 폐광 시점을 내년 6월로 대폭 앞당겼다. 이제 대한민국은 석탄 산업과의 완전한 이별을 눈 앞에 두고 있다.
탄광이 없는 나라, 광부가 없는 세상에서 '광부의 날'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광부의 날'에 사람들이 떠올릴 광부의 이름이 하나라도 있을까?
광부 김창선
아마도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광부의 이름은 '양창선'일 것이다. 그는 1967년 8월 22일에 발생한 충남 청양군 구봉광산 매몰 사고에서 15일(총 368시간)만에 살아 돌아온 사람으로 본명은 '김창선'이다. 1960년대 대한민국에서 광부가 유명해질 일은 사고밖에 없었다.
매몰 10일째 되던 날, 그는 암흑 속에서 갱도 내 부서져 있던 인터폰(자석식 전화기) 선을 더듬어 찾아내 직접 연결했다. 지상으로 "나 살아있다"라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포기 하려던 구조 작업은 급반전을 맞이했다.
1967년 5월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 박정희는 비서관을 현장으로 급파해 구조를 독려했고, 라디오와 TV로 구출 장면을 전국에 생중계 했다. 당시는 대통령 3선을 허용하기 위한 개헌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여당에서 온갖 부정을 감행했던 이른바 '6·8 부정선거' 파동 시기로, 정권에 대한 민심이 상당히 악화되어 있던 시기였다. 박정희 정권은 광부 김창선의 범국가적인 구출 작전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민심을 돌리는데 성공했다.
| ▲ 광부 김창선 구조될 당시의 김창선 씨 모습. 대한뉴스 영상 갈무리. |
| ⓒ 영상역사관 |
광부 김창선은 황해도 출신의 월남민이자 6.25 전쟁 부상 군인이었다. 군 복무 당시 행정 착오로 본래 성인 '김(金)'이 아니라 '양(梁)'씨로 등록되었고, 이 상태로 광산에서 사고를 당해 온 나라에 '양창선'으로 알려졌다. 구출 당시 현장에 온 청와대 관계자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여 본래 성씨를 찾았으나, 언론에는 '철인 양창선'으로 각인되어 자기 이름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관련기사: '15일 8시간', 최장생존시간 기록한 전역 해병대원).
광부 박정하
그로부터 55년만인 2022년,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언론의 관심을 받은 광부 김창선은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해에 또 다른 광부가 같은 이유로 언론에 이름을 올렸다. 그의 이름은 박정하다. 그는 2022년 10월 26일 경북 봉화군 아연 광산 매몰 사고 당시, 지하 190m 막장에 갇혔다가 거의 열흘 만에 기적처럼 구출된 광부다. 반세기가 지나도록 여전히 광부가 언론의 관심을 받을 일은 사고밖에는 없다는 것이 씁쓸하다.
전북 남원 출신인 그는 1980년 사북에 둥지를 틀었다. 광부였던 장인과 함께 1982년 사북 동원탄좌에서 탄광 일을 배운 후 줄곧 광부의 길을 걸었다. 2004년 11월 동원탄좌가 문을 닫은 뒤 고한에서 살다가 2017년 말에 다시 봉화 광산으로 가서 일하고 있었던 베테랑 광부다. 그는 요즘 사람들에게 '믹스커피'로 열흘을 버틴 가장 유명한 광부로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다.
| ▲ 경북 봉화군 아연 채굴 광산 매몰사고로 고립됐다가 221시간 만에 구조된 작업반장 박정하(62)씨가 지난 11월 11일 오전 안동병원에서 퇴원 기자회견을 마친 뒤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
| ⓒ 연합뉴스 |
광부 이원갑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광부의 이름이 하나 더 있다면 1980년 사북 사건의 이원갑이다. 광부로서 동시대의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이름을 알린 박정하와 이원갑은 공교롭게도 모두 사북 동원탄좌 출신이다.
그러나 광부 이원갑은 광산 사고가 아니라 이른바 '광부 소요 사태'로 이름을 알렸다. 1980년 사북에서 엄청난 소식이 들려왔을 때, 사람들은 광산의 떼죽음이나 매몰 광부의 생존 서사가 아닌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광부들의 놀라운 모습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이원갑은 1980년 사북 사건의 핵심 인물이자 탄광 노동자의 인권과 명예 회복을 위해 평생을 몸 바친 운동가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사북 사건의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해 애써온 그의 이야기는 영화 <1980사북>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 ▲ 박봉남 감독의 영화 <1980사북> 홍보 포스터 1980년 40세의 광부 이원갑과 이제 80 노인이 된 오늘의 이원갑을 대비시킨 영화 <1980사북>의 포스터 |
| ⓒ 영화사느티 |
이원갑은 사북 사건 발생 이전에는 광부들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노조 개혁 운동에 나섰고, 항쟁 당시에는 광부 대표로 사태 수습과 노사정 합의를 위해 애썼다. 그러나 1980년 5월 노사정 합의를 배반한 신군부의 함정인 줄도 모르고 가짜 수습 대책 회의에 나갔다가 보안사 합동수사반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신체 일부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다.
이원갑은 사북 사건 이후 사회적 냉대 속에 거의 20년간 숨죽여 살다가, 2000년 민주화관련법 제정을 계기로 명예 회복 운동에 나서 사북항쟁동지회를 만들고 다시 20년 동안 이 모임을 이끌어왔다. 지난 2015년 2월 재심을 통해 동료 광부 신경과 함께 무죄 판결을 받은 이후에도, 그는 다른 사북 사건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과 재심 등 피해 구제를 위해 힘써 왔다.
2025년 영화 <1980사북>의 개봉 이후에, 그는 전국의 영화 상영 현장을 누비며 국가 사과의 이행을 촉구하는 한편, 사건 관련자 사이의 화해와 치유를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노조 지부장 부인 린치 사건과 경찰 사망 사건이 벌어질 당시 이원갑은 경찰에 연금 되어 있었으므로 두 사건의 직접 당사자는 아니지만, 항쟁을 이끌었던 주역으로 노조지부장 가족에게 진솔한 사과 편지를 썼다. 또한 진압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경찰들을 먼저 위로하고 화해를 청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국가 폭력의 핵심 당사자인 정부의 공식 사과와 고문 경관 등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도 분명히 촉구하고 있다.
광부의 날에 생각하는 빚
1980년 사북 사건 이래로 전국의 광부들은 매년 대통령 하사품을 선물로 받았다. 하사품이라는 권위주의 시대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문민정부였던 1990년대에도 광부들은 매년 대통령 선물을 받았다(관련기사: "대통령 하사품까지 내려왔지만, 실상은..."). 대통령이 직접 광부들을 챙기던 시대는 아쉽게도 그때까지였다. 아름다운 사회, 살기 좋은 체제는 고마운 사람을 먼저 챙기고 예우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얼마 전 박종철기념사업회는 제22회 박종철인권상 수상자로 이원갑 사북항쟁동지회 명예회장을 선정했다. 지난 19일 열린 시상식에서 심사위원장 한상희 교수는 "박종철인권상은 1987년 열사가 겪었던 남영동에서의 고통이 선생님과 사북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과 맞닿아 있음을 기록하며, 선생님과 그 동료들의 40여 년을 이 시대에 뚜렷한 인권의 역사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고 말했다(관련 기사 : 사북항쟁 주역이 국가에 남긴 소원... "여생 다하기 전에 사과 있기를").
| ▲ 1980년 사북항쟁을 이끌었던 이원갑 사북항쟁동지회 명예회장이 19일 오후 서울 용산구 롯데시네마 용산에서 열린 제22회 박종철 인권상 시상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 ⓒ 유성호 |
지난해 박종철인권상을 대리 수상한 '광장의 시민' 이주리씨는 광부 이원갑에게 인권상이 수여된다는 소식을 듣고 긴 격려사를 썼다.
"오늘 이 상은 선생님 개인에게 드리는 상이기도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사북의 역사와 그 세월을 견뎌온 모든 분들에게 보내는 우리 사회의 감사이기도 합니다. 그 용기가 있었기에 사북의 역사는 과거의 상처를 넘어 오늘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국가는 충분히 응답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은 사북항쟁을 잘 알지 못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만큼은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박종철인권상은 선생님의 공로를 평가하는 상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너무 늦게나마 보내는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주리, 25년 광장의시민들 대리수상자, 제22회 박종철인권상 시상식 격려사 중에서
시민 이주리의 "우리 사회가 너무 늦게 나마 보내는 응답"이라는 말은 2025년 광장에 선 사람들이 1980년의 사북 광부를 잊지 않겠다는 헌사일 것이다. 사북 사건 관련자들은 이 젊은이에게 사북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으니, 그는 사북 광부 이원갑의 박종철인권상 수상이라는 단 한 번의 소식에 응답한 셈이다.
그러나 국가는 46년이 지나는 동안 피해자들 사이의 손가락질을 부추기고 방관했을 뿐, 단 한 번이라도 그들의 눈물을 닦아준 적이 없다. 재심 법정의 재판장이 국가를 대신해서 사과하는 동안, 진실화해위원회가 16년 동안 두 번이나 국가 사과를 권고하는 동안, 사북항쟁 46주년을 맞아 MBC PD수첩이 <1980사북> 특집을 방영하고, 대한민국 국회가 여야 의원 73명의 공동 발의로 사북사건에 대한 국가 사과 이행을 촉구하는 동안, 이 나라의 국정을 책임진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사북과 관련한 아무런 언급을 내놓지 않았다.
영화인들과 시민들의 협력으로 '1980사북시민상영위원회'가 만들어져 국내외 33개 도시에서 100회가 넘는 상영회가 이어지는 동안, 전국 90개 시민사회 단체가 국가 사과 이행과 함께 정중히 요청한 것과는 다르게 정부의 고위급 인사나 핵심 당국자들이 이 영화를 보았다는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사북 사건은 반드시 우리 민주주의 체제가 기억하고 경계해야 할 역사적 사건이다. 국가 폭력이 한 개인의 삶을 무너뜨리는 것을 넘어, 어떻게 한 가정을 파괴하고 나아가 선량한 공동체마저 붕괴 시키며, 수십 년 동안 증오와 원망의 응어리 속에 갇히게 만들 수 있는지 사북사건의 피해자들의 삶이 아프게 증언하고 있다. 이원갑을 비롯한 사북의 광부들은 엄혹한 계엄령 치하에서도 부당한 탄압에 맞서 일어섬으로써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노동 인권의 신장에 커다란 기여했지만, 46년 동안 철저하게 외면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은 광부들에게 빚이 있다. 오늘의 민주주의는 1980년의 사북에 빚이 있다. 청구서를 자꾸 들이민다는 것은 채무자가 자기가 진 빚을 잊었거나, 빚이 없다고 우기는 경우 뿐이다. 채무는 너무 늦기 전에 채무자가 먼저 갚아야 한다.
사북 광부들의 이름을 온전히 불러주는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사북 사건 피해자들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위태롭다. 법정기념일인 '광부의 날'에도 '1980 사북의 광부들'이 외면 당한다면, 우리는 정말로 치유 사회로 가는 중요한 이정표를 잃게 될 것이다. 처음 맞는 '광부의 날'에 따뜻한 국가의 위로가 전해지기를 기대하며, 박종철인권상 수상 소감에 비친 '사북사람들'의 마음을 대신 전한다.
"그동안 억울하다고, 너무 하다고 소리도 많이 질러봤지만 광부들의 목소리는 저 밑바닥에서 나와서 그런지 암만 크게 질러도 허공 중에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사북의 오래된 아픔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손도 여러 번 내밀어 봤지만, 광부들의 손은 새까매서 그런지 아무리 손짓을 해 봐도 잡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많은 시민들의 응원이 '늦은 메아리'로 되돌아오고, 이렇게 따뜻이 손 내밀어주시는 분들을 만나게 되니, 진짜 희망은 어디에서 오는지 깨닫게 됩니다. 감히 '박종철'과 '인권'이라는 숭고한 이름이 붙은 상을 받을 자격이 저에게 있다고 생각하셨다면, 그것은 하루 빨리 덜어내야 할 사북사건 피해자들의 아픔과 고난의 무게를 헤아려주신 덕분으로 알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국가를 대신하여 사북의 늙은 광부들에게 시민들이 먼저 내밀어주시는 따뜻한 손으로 여기겠습니다. 잊혀진 사북의 이름 없는 광부를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6년 6월 사북 사람 이원갑
| ▲ 사북항쟁 시기 국가폭력에 대한 공식 사과 이행 촉구 사북사건 피해자 및 유가족 기자회견 사북항쟁 제46주년을 1주일 앞둔 지난 4월 14일 오전 사북민주항쟁동지회 주최로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에서 '사북항쟁 시기 국가폭력에 대한 공식 사과 이행을 촉구하는 사북사건 피해자 및 유가족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
| ⓒ 이정민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선지역사회연구소의 1980사북 특별페이지(www.jcrc.kr)에도 실립니다.저자는 정선지역사회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사북항쟁과 국가폭력>(지식공작소, 2021)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저작권 보호를 위해 본문의 일부만 표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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