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간 전
북한판 ‘클레르퐁텐’ 평양국제축구학교, 북한 축구 비밀병기 양성소 [김수한의 북한이야기]
2026.06.25 08:32
물밑서 축구학교 설립·프로팀 양성
핵무기 만들 듯 축구비밀병기 키워
여자팀 ‘내고향’ 아시아 제패 성과
CNN “2027년 女월드컵, 北돌풍”
수년내 남자팀 국제무대 성과 전망
[헤럴드경제=김수한 기자] “경평(서울·평양) 축구보다는 농구부터 교류를 시작하지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의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이런 제안을 했다.
그는 “세계 최장신 리명훈 선수가 있을 때만 해도 북조선 농구가 강했는데 리명훈이 은퇴한 뒤 약해졌다”면서 “이제 남한에 상대가 안 될 것 같다. 남한에는 2m 넘는 선수들이 많지 않느냐”라고 물었다.
정상회담 중 남북 스포츠 교류 관련 안건에서 경평축구대회 부활이 거론된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 발언에서 북한이 조금이라도 상대적 우위에 있는 종목, 자신이 선호하는 종목으로 승부하려는 의중이 엿보인다. 1990년대 스위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김 위원장은 미국 프로농구(NBA)의 광팬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NBA 스타 데니스 로드맨이 여러 차례 방북해 김 위원장을 만난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작용했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비롯해 2012년 런던올림픽 축구 동메달, 2026년 월드컵 본선 11회 연속 진출이라는 기록을 세우는 등 전세계 축구팬들에게 아시아 축구의 대표주자로 각인되고 있다. 축구 실력상 누가 봐도 한 수 아래인 북한으로선 남북 축구 대결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 위원장이 북한 축구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었다.
▶김정은 집권 직후 개교…북한 내 최고 환경 자랑=2013년 5월 31일 평양국제축구학교가 ‘체육강국 건설’을 목표로 한 김정은의 지시로 개교했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사망하고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한 뒤 1년 반이 지난 시점이다. 국가 지도자로서 임기 초반부터 북한 축구 부활을 주요 과제로 여겼다는 얘기다. 북한 당국은 김정은 위원장이 이 학교의 이름을 직접 정했으며, 설립과 관련한 구체적인 부분까지 직접 지시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평양국제축구학교는 평양시 릉라도(綾羅島)의 1만2200㎡ 규모 부지에 건립됐다. 현대적 설비와 후생시설을 갖췄으며, 7개의 축구장과 실내 훈련장 등 축구실력 배양을 위한 북한 내 최고의 환경을 자랑한다.
유럽 최고의 축구 교육시설로 꼽히는 프랑스의 국립 축구센터 클레르퐁텐에 비견돼 ‘북한판 클레르퐁텐’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다만 클레르퐁텐은 ‘최저 학력을 충족해야 한다’는 조건에 따라 교육생들을 인근 학교에 통학시키지만, 평양국제축구학교는 아예 일반 학과 교육까지 병행해 통학의 번거로움까지 덜었다. 이런 면에서 평양국제축구학교가 클레르퐁텐보다 더 강도 높은 축구선수 집중양성소라고 할 수 있다.
평양 릉라도는 서울로 치면 여의도에 해당된다. 평양 중심을 가로지르는 대동강의 퇴적물로 조성된 하중도다. ‘비단 릉(綾)’, ‘그물 라(羅)’의 이름이 말해주듯, 대동강 맑은 물 위에 비단 그물을 풀어놓은 듯 아름다운 섬이라는 의미로 명명되었다. 둘레 6㎞, 길이 2.7㎞, 면적 1.3㎢(약 130만㎡·40만평) 규모의 이 섬에는 평양국제축구학교 외에 대규모 테마파크 ‘릉라인민유원지’, 11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 두 번째 규모 다목적 경기장 ‘릉라도 5월 1일 경기장’이 조성돼 있다.
릉라도 한 가운데에 5월 1일 경기장이 위치하고, 경기장 서쪽에는 릉라인민유원지, 동쪽으로 평양국제축구학교가 조성돼 있다.
5월 1일 경기장은 김정은 집권 전부터 있었던 오래된 시설이다. 1989년 국제 노동절(5월 1일) 완공됐다고 해서 5월 1일 경기장으로 명명됐다. 완공 직후인 8월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이곳에서 열렸다. 이 행사에 참가하고자 당시 한국외대 불어과에 재학 중이던 임수경씨가 남측 대표로 방북하는 ‘사건’이 벌어졌던 현장이기도 하다. 임씨는 정부 허가 없이 방북했다가 판문점으로 도보 귀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국내외에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방북했다가 10만명이 넘는 북한 군중들에게 연설한 곳도 이곳이다. 이 경기장은 애초 15만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다목적 경기장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문 대통령이 15만명 군중에 연설한 것으로 보도됐다. 하지만, 이 경기장은 2014년 수용 인원 11만명 규모로 재건축됐다. 이에 따라 당시 모인 군중도 최대 11만명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아울러 이 경기장의 수용 규모가 11만명으로 감소하면서 13만2000명 수용 가능한 인도 나렌드라 모디 스타디움이 세계 최대 규모의 다목적 경기장이 됐다. 이 경기장 또한 기존 경기장을 철거한 뒤 2020년 재완공된 것이다.
▶김정은의 릉라도 개발에 숨겨진 2가지 통치 ‘코드’=릉라인민유원지 역시 김정은 집권 직후인 2012년 7월 25일 준공됐다. 김정일 집권기 키워드가 ‘선군’(군대 우선)이었다면, 김정은은 후계자 시절부터 ‘인민생활 개선’을 강조했고, 집권 초기부터 ‘인민 생활수준 향상’을 국가적 목표로 격상시켰다. 김정일의 선군 노선이 김정은 대에 와서 ‘선민’(인민 우선) 노선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김정일의 릉라도 개발은 그러한 노선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릉라인민유원지에는 1460석 규모의 돌고래 공연장 ‘곱등어관’, 회전목마와 회전비행기 등의 놀이기구가 설치된 유희장, 물놀이장, 실내 오락장 등이 1단계로 조성됐다. 이어 2단계로 삭도(케이블카)와 수족관, 미니골프장과 4D영화관, 미로유희시설 등이 추가로 건설됐다고 한다.
정리하면, 김정은 집권 후 본격화된 릉라도 개발은 큰 틀에서 김정은의 두 가지 통치 ‘코드’를 보여준다. 하나는 국가적 목표인 ‘인민 생활수준 향상’을 위한 릉라도 인민유원지 건설, 다른 하나는 북한의 글로벌 축구 경쟁력 강화를 위한 북한판 클레르퐁텐(평양국제축구학교) 건설이다.
김 위원장이 2018년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경평축구가 아닌 경평농구를 언급한 것은 평양국제축구학교를 설립한 지 5년이 지난 시점이다. 물밑으로 북한 축구 경쟁력 강화를 위한 장기 플랜을 분주히 가동하고 있는 와중에 ‘포커 페이스’를 유지한 셈이다. 대외적으로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며 핵개발에 매진해 마침내 세계에 핵무력 완성을 선포한 김 위원장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핵무력 완성’ 수준은 아니지만, 북한 축구계에도 서서히 투자한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북한 내고향여자축구단은 5월 23일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열린 2025-2026시즌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챔피언스리그(AWCL) 결승전에서 일본의 도쿄 베르디 벨레자를 꺾고 아시아 여자 클럽축구 챔피언에 올랐다.
▶물밑 양성한 축구 비밀병기들, 국제 무대 ‘폭격’=AFC의 AWCL은 아시아 지역 여자 프로축구팀 중 최강자를 가리는 대회다. 한국 수원의 수원FC위민, 북한 평양의 내고향여자축구단, 일본 도쿄 베르디 벨레자, 호주 멜버른시티가 4강에 올랐고 수원과 평양, 도쿄와 멜버른의 준결승을 거쳐 각각 평양과 도쿄를 연고로 하는 두 팀이 결승에서 만나 평양팀이 승리했다.
내고향은 결승전에서 전반 44분 주장 김경영이 결승골을 터트려 도쿄 베르디에 1대0으로 이겼다. 이로써 내고향은 전신인 AFC 여자 클럽 챔피언십을 포함해 이 대회에서 북한 팀으로는 처음으로 정상에 올랐다. 우승 상금 100만달러(약 15억원)도 챙겼다.
아울러 내고향은 국제축구연맹(FIFA) 여자 챔피언스컵에 아시아 대표로 참가하게 됐다. FIFA 여자 챔피언스컵은 연맹별 클럽대회에서 우승한 6개 팀이 나와 세계 최고 클럽팀을 가리는 대회다.
북한 여자 축구는 이번 대회 외에도 2024년 U-20 월드컵 우승, 2024년과 2025년 U-17 월드컵 우승, 올해 U-17 아시안컵 우승 등 세계적 경쟁력을 보이고 있다. CNN은 “2027년 브라질에서 열리는 여자 월드컵에서 북한이 돌풍을 일으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CNN은 북한 여자 축구의 글로벌 경쟁력에 대해 체계적인 유소년(Youth) 육성 시스템에 주목했다. 평양 내고향팀의 주장이자 대회 MVP로 뽑힌 김경영 선수는 북한의 차세대 육성 시스템이 배출한 대표적 스타다. 10세에 축구를 시작해 연령별 대표팀을 거쳤고, 현재 소속팀과 국가대표 주전 공격수를 맡고 있다.
▶인재 육성 시스템의 시작, 평양국제축구학교=북한의 축구 인재 육성 시스템의 출발점은 릉라도 소재 평양국제축구학교다. 개교 당시 정원은 80명으로 알려졌으나, 현재 7~17세 수백여명이 재학 중이다.
이들은 전국의 청소년체육학교 축구소조원(축구부) 등에서 기량이 뛰어난 선수를 언제든 선발해 편입 또는 입학시키는 방식으로 충원한다.
북한은 의무교육 12년제에 따라 유치원 높은반 1년, 소학교 5년, 초급중학교 3년, 고급중학교 3년 등 총 12년간 의무교육을 받는다. 평양국제축구학교 학생들 역시 소학교반, 초급중학교반, 고급중학교반으로 나눠 국어, 수학, 물리 등 일반 과목과 축구 교육을 함께 받는다.
축구 교원들 또한 축구선수 생활을 마치고 대학을 졸업한 이들로 구성하고 있으며, 일반 교원도 실력있고 축구에도 조예가 깊은 인원을 선발해서 배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자 축구뿐 아니라 남자 축구에서도 이미 상당한 성과를 보고 있다. 유럽 5대 리그 중 하나인 이탈리아 세리에A 유벤투스에 입단했던 한광성, 오스트리아 SKN 장크트푈텐의 박광룡 등이 평양국제축구학교가 배출한 인물이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에 따르면 평양국제축구학교는 개교 이후 10년간 국제대회에서 우승 7회, 6명의 MVP를 배출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이 학교에 대해 “개교한 때로부터 학교에서는 교육과 훈련 방법을 끊임없이 혁신하면서 전도유망한 축구선수 후비(앞날을 대비해 준비하는 사람)들로 키우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졸업생들 가운데는 지금 국내에서 진행되는 여러 경기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선수들이 적지 않다”고 강조했다.
북한 선전매체들은 특히 학교가 첨단 기술을 활용해 새 시대에 걸맞은 선수들을 키워내고 있다고 자랑했다. 대외용 라디오매체인 평양방송은 이 학교가 최근 ”훈련의 과학화, 정보화 수준을 높이는데 주된 힘을 넣고 있다“며 각종 기계 장비나 연구 성과들이 도입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선전매체 ‘내나라’도 “(평양국제축구)학교는 학생들을 지능형, 창조형의 선수들로 키우는데 훈련의 중점을 두고 있다”며 “수시로 변하는 경기 정황에 대처하기 위한 능력, 전술 의식 능력을 제고하는데 모를 박고(힘을 기울이고) 있다”고 전했다.
개교 당시 입학한 10대 학생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성인 대표팀에 합류하고 있는 만큼, 향후 수년내 국제 무대에서 북한 여자팀에 이어 남자팀도 성과를 보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오늘날 북한 축구의 시작엔 그의 입김이 있다=북한 여자 프로축구 리그의 내고향팀은 담배, 식품, 스포츠용품, 전자제품 등을 생산, 판매하는 북한 평양의 국영기업 ‘내고향무역회사’를 모기업으로 한다. 북한의 대기업 격인 이 회사 또한 김정은의 ‘지도’에 따라 지금의 위치에 도달했다.
김 위원장은 집권 직후인 2012년 국가적으로 체육사업을 지도하는 ‘국가체육지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초대 국가체육지도위원장을 맡은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이 설립한 ‘내고향합작회사’가 이 회사의 시작이다.
처음엔 담배를 생산하다 중국과 합작으로 스포츠용품 생산 독점 권한을 갖게 된 이 기업 산하에 여자축구단이 창설됐고 지금의 내고향여자축구단이 됐다. 장성택이 2013년 12월 숙청되면서 내고향무역회사로 이름을 바꿨으며, 산하에 담배, 식품, 스포츠용품, 전자제품 등을 취급하는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2016년 북한의 대외선전용 매체 ‘조선의 오늘’에 따르면, ‘내고향’ 브랜드는 아디다스, 푸마 등 글로벌 스포츠용품 업체와 경쟁하는 업체로 성장했다.
스포츠용품 외 담배도 이 회사의 주력 업종이다. 스위스 유학 시절부터 담배를 피운 것으로 알려진 김정은은 최근 이 회사가 만든 담배 브랜드 ‘고향’, ‘강선’, ‘천지’, ‘아침’ ‘7·27’ 중 ‘아침’, ‘7·27’ 등과 대성담배공장에서 만든 담배 ‘건설’ 등을 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4년 이 회사는 ‘내고향’이라는 브랜드로 러시아에서 담배, 주류, 식품, 스포츠용품 등에 대한 상표를 등록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이 회사에 대해 “담배 제조사로 시작해 지금은 소주, 위생용품, 스포츠용품, 전자제품 등 서로 관련이 없는 여러 제품을 생산하는 회사로, 북한의 대기업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북한의 축구 선수 육성, 북한 프로축구팀의 창단 등 오늘날 북한 축구의 발전 뒤에는 모두 김정은의 ‘지도’가 결정적으로 작용한 셈이다.
김수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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