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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의 정글에 갇힌 현대인, 불안 이기는 ‘마음 맷집’ 키워야” [건강한겨레]

2026.06.25 05:02

세계인지행동치료학회에서 기조강연 맡은 메타연구소장 최영희 박사 인터뷰
국내 인지행동치료(CBT)의 권위자인 최영희 메타연구소장은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고통에 대응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최승식 기획위원

“내 인생이 왜 니 마음에 들어야 하는데요?”

얼마 전 종영한 화제의 드라마 속 대사다. 타인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이 외침은 신선한 ‘도발’로 회자됐다. 그만큼 정작 많은 이들이 자기 삶의 가치를 스스로 정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통계도 이를 증명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국내 불안장애 환자는 2020년 74만5198명에서 2024년 89만6256명으로 20.3% 증가했다. 특히 10대 환자는 같은 기간 2만838명에서 3만6097명으로 73.2%나 급증했다.

우리는 왜 이토록 불안한가. 1990년부터 36년간 정신건강의학 최전선을 지켜온 국내 인지행동치료(CBT: Cognitive Behavior Therapy)의 권위자, 메타연구소장 최영희 박사에게 한국 사회를 잠식한 불안의 뿌리와 해법을 물었다. 인지행동치료 창시자 에런 벡이 설립한 국제인지치료아카데미(ACT)의 펠로이자, 아시아 최초의 국제심리도식치료협회(ISST) 인증 심리도식 치료자(Schema Therapist)인 최 박사는 6월2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제11차 세계인지행동치료학회(WCCBT)에서 전통적 인지행동치료에 심리도식 치료와 수용전념 치료(ACT: Acceptance & Committment Therapy)를 통합한 ‘통합 인지행동치료’를 주제로 기조강연(Keynote)을 맡은 세계적 석학이다.

맹수는 사라졌지만, ‘입시와 비교’가 남았다
최 박사는 불안장애 증가의 원인을 인류의 진화적 배경과 한국 사회의 압박 구조에서 찾는다. 생존을 위해 발달한 인류 고유의 불안 감지 장치가 현대 사회의 과도한 경쟁과 만나 오작동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인간은 위험으로부터 살아남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두고 진화했습니다. 원시 시대의 위험은 굶주림이나 맹수의 습격처럼 명확했지요. 하지만 오늘날은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온갖 것이 위협이 됐습니다. 맹수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대학 입시, 시험, 성과, 사회적 지위가 들어선 것입니다.”

내 삶의 평가권을 타인과 외부 기준에 맡기는 순간 불안은 숙명이 된다. 최 박사는 “순위의 꼭대기에 서야만 가치를 인정받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경쟁에서 밀리면 생존이 어려워진다’는 무의식적 틀을 갖게 된다”고 짚었다. 결국 현대인은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가만히 있으면 뒤처지는 것 같고, 쉬고 있으면 죄책감이 밀려온다. 불안이 개인의 성격 결함이 아니라, 사회 구조가 생산하는 정서가 된 셈이다.

인지행동치료…사건이 아니라 ‘해석’을 바꾼다
그렇다면 이 굴레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최 박사는 “일부에선 정신질환을 약물로만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스스로 생각과 해석 방식을 바꾸는 인지행동치료야말로 전세계에서 효과가 가장 철저하게 검증된 해법”이라고 강조한다.

최 박사가 청년 전문의였던 1990년대 초, 국내에서 정신과 치료의 축은 프로이트식 정신역동 치료와 약물치료뿐이었다. 무의식을 깊이 탐색하는 정신분석은 모든 환자가 다 대상이 되지도 못하고 치료에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렸고, 약물치료는 증상을 임시로 가라앉힐 뿐 환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틀을 바꾸진 못했다.

1950년대 미국에서 등장한 인지행동치료는 이런 한계를 깨기 위해 등장했다. 창시자인 에런 벡 전 펜실베이니아대학 정신과 명예교수는 우울과 불안이 심한 사람들에게서 공통된 사고 습관인 ‘인지오류’(Cognitive Error)를 발견했다. 고통의 원인은 외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환자의 독특한 ‘해석’에 있다는 통찰이었다.

인간의 뇌는 불안에 빠지면 상황을 극단적인 흑백논리로 보거나, 최악의 상황만 가정하는 ‘재앙화’에 빠진다. 시험 한 번 망쳤다고 “내 인생은 끝났다”며 무너지고, 타인의 무덤덤한 표정만 보고 “나를 싫어한다”고 독심술을 부리는 식이다.

“인지오류를 찾아내 해석의 틀을 바꾸면, 상황은 그대로여도 감정과 결과가 달라집니다. 인지행동치료는 전세계 수천 가지 심리치료 중 과학적 연구와 임상 논문으로 효과가 가장 명확히 검증된 치료법입니다.”

더 깊은 마음의 설계도 ‘심리도식’
그러나 모든 환자가 전통적 인지행동치료만으로 호전되진 않았다. 최 박사는 그 너머의 답을 ‘심리도식 치료’에서 찾았다. 심리도식이란 자신과 타인, 세상과 미래를 바라보는 깊고 단단한 인지적 틀이다. 성장 과정에서 비난과 방임 속에 자란 사람은 무의식 깊은 곳에 “나는 사랑받을 수 없다” “세상은 위험하다”는 심리도식을 새긴다.

심리도식 치료의 창시자인 제프리 영 박사가 개발한 18가지 심리도식 중 버림받음, 불신, 결함감, 의존성 등은 불안과 직결된다. 가령 ‘버림받음 심리도식’을 가진 사람은 상대와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불안해하며, 연락이 조금만 안 돼도 관계가 끝날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다.

“심리도식은 청소년기 후반이면 완성됩니다. 어릴 때는 밀가루 반죽처럼 부드럽지만, 성인이 되면 대리석처럼 굳어버리죠.”

더 큰 문제는 이 심리도식이 세대를 넘어 대물림된다는 점이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자녀에게 그대로 투사하거나, 반대로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며 완벽주의적 양육으로 자녀를 숨 막히게 하는 경우 모두 심리도식의 대물림이다. 최 박사가 소아·청소년 치료 시 부모 치료를 필수로 묶는 이유다.

마음챙김…‘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힘
최근 세계 헬스케어 분야의 화두인 마음챙김(Mindfulness)과 수용전념치료(ACT)는 바꿀 수 없는 불가피한 고통을 다루는 무기다. 최 박사는 전통적 인지행동치료와 심리도식치료에 이어 동양의 명상과 서양의 과학적 인지치료를 결합한 존 카밧진 박사의 ‘마음챙김에 근거한 스트레스 완화’(MBSR) 프로그램을 치료에 적극 도입했다. 자식을 비극적으로 잃은 어머니의 사례처럼,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거대한 상실 앞에서는 인지 수정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 박사는 국내에 퍼진 ‘마음챙김’이라는 번역의 오해부터 짚었다. 마음챙김의 어원은 불교성전어 ‘사띠’(Sati)로, 한자로는 ‘염’(念·지금 이 순간의 마음)이라 쓴다.

“인간 고통의 대부분은 이미 지나간 과거를 되새김질하거나, 오지 않은 미래의 불안을 가불해 전전긍긍하는 데서 옵니다. 현재 행하는 일에 온전히 몰입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런 여러 치료법을 통해 최 박사가 지향하는 치료의 종착지는 환자를 병원에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을 돌보는 ‘자가치료자’(Self-Therapist)로 키워내는 것이다. 그는 이를 ‘수영 강습’에 비유했다.

“환자에게 약을 주는 것은 물에 빠진 사람에게 고무 튜브를 던져주는 것과 같습니다. 당장은 살 수 있지만, 평생 튜브만 붙잡고 살 수는 없지요. 치료자는 수영 코치처럼 환자가 스스로 물을 헤치고 나아갈 수 있도록 기술을 가르쳐야 합니다.”

치료는 “내가 왜 그랬는지 알겠다”는 통찰에서 시작하지만 완성은 훈련에 있다. 대리석처럼 굳어진 오랜 습관은 반복을 통해서만 깨지기 때문이다. 다르게 해석하는 연습, 현재로 돌아오는 연습이 쌓여 뇌에 새로운 길을 낼 수 있다고 최 박사는 설명했다.

“이 세상에 고통과 상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통을 견디는 맷집을 키우고, 그것을 유연하게 다루는 기술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훈련이 축적될 때 우리는 비로소 ‘건강한 어른’이 되어 불안의 시대를 건널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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