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골키퍼들을 응원한다 [뉴스룸에서]
2026.06.25 05:02
서정민 | 문화스포츠부장
2026 북중미 월드컵에서 월드컵 통산 최다 골 기록을 새로 쓴 리오넬 메시(24일 현재 18골) 못지않게 큰 환호를 받은 이는 골키퍼, 그것도 이름도 낯선 작은 섬나라의 문지기들이다. 인구 52만명의 서아프리카 섬나라 카보베르데가 강력한 우승 후보 스페인과 0 대 0으로 비기며 대이변을 일으킨 데는 골키퍼 보지냐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그는 유효 슈팅 7개를 막아내며 경기 최우수 선수로 뽑혔다. 2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 비자 문제로 아들 경기에 오지 못한 어머니의 사연까지 알려지며 더욱 화제를 모았다. 경기 전 5만명이던 인스타그램 팔로어는 24일 기준 1570만명 넘게 치솟았다. 카보베르데는 우루과이와의 조별리그 2차전도 무승부(2-2)로 마치면서 32강 진출까지 바라보고 있다. 인구 15만명의 카리브해 섬나라 퀴라소도 골키퍼 엘로이 롬의 신들린 선방 덕에 에콰도르와 0 대 0으로 비기며 역사적인 월드컵 본선 첫 승점을 땄다. 롬은 무려 15개의 유효 슈팅을 막아내며 월드컵 역사상 정규 시간 최다 선방이라는 진기록까지 세웠다.
이들 두 사례가 극적인 건 지극히 예외적이어서다. 통상 골키퍼는 역설적이게도 임무에 실패했을 때 더 큰 환호를 듣는다. 골을 막았을 때 들리는 함성 크기는 골이 터졌을 때 함성 크기에 비할 바 못 된다. 2002년 당시 50대 중반 나이에 한겨레 사회부 기자로 들어온 소설가 김훈은 한·일 월드컵 개막을 닷새 앞두고 펼쳐진 한국과 프랑스의 평가전을 현장에서 보고 ‘함성 때마다 문지기는 외로워’란 제목의 칼럼을 썼다. “축구 경기장에서 가장 외롭고 참혹해 보이는 개별적인 인간은 문지기다. 26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골문 앞에 선 한국의 김병지나, 프랑스의 바르테즈의 모습도 그렇게 외로워 보였다. (…) 모든 골에는 함성이 일었고, 그때마다 문지기들은 무너졌다. 김병지도 무너졌고, 바르테즈도 무너졌다. 문지기들은 자신의 참패에 열광하는 관중의 함성을 들으면서 어떤 마음이 되는 것일까.”
김훈이 “미드필드에서부터 아군 진영이 뚫려서 수많은 적들이 골문으로 몰려들 때” 골문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김병지를 두고 “마치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를 홀몸으로 막아내는 인간과도 같았다”고 표현한 것처럼, 골키퍼는 홀로 외로이 버텨내는 존재다. 28년간 세계 정상급 수문장으로 활약한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골키퍼 잔루이지 부폰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는 최근 국내 발간한 자서전에서 “(홀로 골문 앞에 선) 골키퍼는 언제나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직접적으로 팬들의 표적이 되는 존재”라며 “모두가 나를 적대하는 것처럼 느껴져 외로울 때” “내 장갑, 축구화, 심지어 골대와도 대화를 나누곤 했다”고 털어놨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리기 쉽다는 것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페터 한트케의 소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은 전직 골키퍼인 주인공 요제프 블로흐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인이 겪는 소외와 불안을 그린다. 살인 용의자로 쫓기던 블로흐는 마지막 장면에서 축구 경기장을 찾는다. 관중석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에게 블로흐는 묻는다. 공격수나 공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골키퍼만 바라본 적이 있냐고. “골키퍼가 공도 없이, 그러나 공을 기다리면서 이리저리 뛰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면서도 블로흐는 골키퍼를 봐야 한다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누가 봐주지 않아도 홀로 분투하는 골키퍼와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골키퍼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결국 또 일어나야 한다. 부폰은 “넘어지고 난 뒤 빨리 일어나거나, 다치지 않고 넘어지는 법을 아는 것, 빠르게 다시 일어나 준비하는 법을 아는 것”을 골키퍼의 핵심 가치로 꼽았다. 우리네 삶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25일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조별리그 최종 3차전을 치른다. 이 경기 결과에 따라 32강 진출 여부가 갈린다. 체코와의 1차전에서 선방했던 골키퍼 김승규는 멕시코와의 2차전에서 우리 팀 수비수와 충돌하며 잡았던 공을 놓쳐 결승골을 내줬다. 그는 “더 집중했어야 했는데…”라며 자책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랬듯 또다시 일어나 골문을 지킬 것이다. 김승규와 조현우를 비롯해 세상의 모든 골키퍼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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