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재인 (14) ‘독립운동가 후예’ 목회자 가정 문인에 주례 부탁
2026.06.25 03:09
사측에 ‘학교 출석 해결’ 다짐 후 입사
부천 신혼집서 경인선 타고 출퇴근하다
기독교방송의 한용상 선생과 인연
내가 데면데면 인사를 나눈 소설가 박영준 교수님께 결혼 주례를 부탁하기로 한 이면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때는 세상에서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존경받는 목사나 존경하는 교수여야만 한다고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박 교수님 아버지는 박석훈 목사님으로 독립운동가로 순교하시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으신 분이었다. 이런 분을 배경으로 박 교수님은 술이나 담배를 전혀 하지 않으셨다. 문인이신 데다 돈독한 신앙까지 갖춘 분이라면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주례 선생님이었다.
나름대로 또렷한 주관을 가지고 박 교수님께 나로서는 정중히 예를 갖추고 부탁해야만 했다. 당시 1000원쯤 하는 와이셔츠 한 벌을 사 들고 선생님 자택이었던 기와집으로 갔다. 짜장면 한 그릇에 50원씩 하던 때이니 학생으로는 나름 거금을 썼던 게다. 교수님 기와집 대문 왼쪽에는 조산원 간판이 달려 있었다. 그곳이 아마도 북아현동 1-153번지로 기억하고 있다. 북아현동은 과거 정지용 윤동주 등 한국 문학계 거장들이 모여 살던 문인촌(文人村)이었다.
“교수님께서 주례를 잘 서주셔서 행복하게 살게 해주십사….”
그렇게 박 교수님의 주례로 나는 1969년 대학 졸업식 전 결혼식을 치렀다.
신부를 모셔왔으니 같이 살아야 했다. 생계를 책임지겠다 큰소리 뻥뻥치던 나는 그날로부터 가장이 됐다.
어느 날인가 신문에 ‘기자 모집’이라는 광고를 봤다. 광고에는 서류 전형 후 면접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이 내 생계를 책임져주실 하나님의 뜻이로구나 싶어 나는 거기에 지원했고 어찌어찌해 수습기자가 됐다.
그런데 문제는 졸업 전이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4학년 2학기는 돼야 한다는 원칙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나는 편집 주간에게 솔직하게 취직처가 있어야 밥을 먹을 수 있는 내 처지를 소상히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학교를 출석하지 아니하고 출근하면 어찌 되겠느냐고 물으셨다.
“취직을 허락해 주신다면 학교 출석은 제가 책임지고 해결할 터이니 기자로 뽑아주십시오.”
편집·취재로 학보사 기자 출신임을 이력서에 밝혀뒀던 것이 수습기자 선발로 연결됐다.
“학교 출석쯤 단숨에 해결하겠다”고 말했지만 내게 별다른 방도는 없었다. 다만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배포는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교수님을 찾아가 내 전후 사정을 피력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불출석을 출석으로 만들었고 학점은 A+가 나와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일에 대한 열정이 있어 부지런히 행동했다. 출근도 남들보다 1시간 먼저 했다. 셋방을 경기도 부천에 얻었기에 경인선으로 출퇴근을 했다. 그때 우연히 만나게 된 출퇴근 동기가 있었으니 기독교방송 CBS의 한용상 선생이었다. 오가며 눈인사를 나눈 것이 인연이 돼 4~5년간 출퇴근길에 마음을 나눈 친구가 됐다. 그분은 후에 ‘예수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책을 집필한, 훌륭하면서도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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