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 전
[오은의 뭐 어때요] 여름, 하면 떠오르는
2026.06.24 05:01
해수욕장·수박·얇은 이불 등
저마다의 풍경·기억으로 남아
제철 만난 오이 잔뜩 쟁여두고
눈과 입으로 부담없이 즐기면
이제 나만의 행복한 여름 시작
어린 시절 내게 여름은 해수욕장의 계절이었다. 내륙 지방에 살아서 여름철이 아니면 바닷가에 갈 기회가 없었다. 여름방학이 되면 해수욕장에 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맞벌이였던 부모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군말 없이 심부름도 하고 더운 것을 표현하려고 연신 손부채를 부쳤다. 해수욕장에 가는 날이면 여름이 갑자기 좋아졌다. 더위에 취약해서 골골대기 일쑤였지만, 튜브를 끼고 바닷물에 몸을 담그면 그제야 이 계절을 받아들이게 된 듯싶었다. 여름,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자라나며 달라졌다. 십대에는 수박이, 이십대에는 선크림이, 삼십대에는 휴가가 가장 먼저 연상됐다. 덥고 습하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기운이 빠지는데도 여름이 가져다주는 어떤 활력이 있었다. 나무들이 짙푸르러지는 것을 보며 여름은 숨구멍이 열리는 계절, 자라나는 계절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언젠가 중학교 강연을 마치고 아이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여러분은 언제부터 여름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먼저 손을 번쩍 든 친구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6월의 첫날”이라고 말했다. “엄마가 이불을 얇은 걸로 바꿔주는 날부터요!” “가만있어도 땀이 흐르는 날이요!” “학원 끝나고 집에 갈 때 아직 밝으면요!” “초파리가 지치지도 않고 날아다니면요!” 그럴싸한 답변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매미가 울기 시작하면, 아이스크림이 금세 녹기 시작하면, 아침에 일어났는데 이불을 덮지 않고 있다면, 아빠가 집에서 러닝셔츠만 입고 있으면, 시장이나 마트에 수박이 보이면…. 아이들의 답변을 듣는 동안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다 같이 여름을 살면서도 각자 다른 여름을 살고 있었다.
사십대에 들어서고 나니 내게 여름은 오이의 계절이 됐다. 정확히 말하면 백오이의 계절. 조선오이나 다다기오이로도 불리는 백오이가 30개·50개씩 정갈하게 포장된 채 놓여 있는 것을 보면 심장이 뛴다. 깨끗한 물에 씻어서 얼른 한입 베어 물고 싶다. 연녹색의 껍질이 나를 유혹한다. ‘나는 아삭아삭해, 쓴맛도 거의 없단다, 수분이 97%나 함유돼 있어, 먹자마자 온몸이 상큼해질 거야, 집에서 먹고 등산 갈 때 먹고 외출하기 전에 먹고 그냥 먹고 냉국으로 만들어 먹고 무쳐 먹고 샐러드로 먹고 그래도 남으면 소박이를 담그면 되지!’ 나는 30개짜리 백오이 묶음을 집어 든다. 가격이 저렴해서 부담 없지만 이걸 언제 다 먹지 하는 걱정도 생겨난다. 그러나 냉장고에 오이가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한 것을 보면 사지 않을 수 없다. 오이를 품에 안고 낑낑대며 집 안에 들어선다. 비로소 올여름이 시작됐다.
당신의 여름은 언제 시작되는가. 여름, 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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