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폐간으로 미완 소설…‘산중 눈보라’ 46년 만에 책으로
2026.06.23 19:35
- 연재하던 장편소설 미완성 증발
- 간행위 집념 3년간 600쪽 펴내
- 결말 없어도 깊은 주제의식 빛나
‘하근찬 문학전집’ 간행위원회(이중기 송주현 오창은 이정숙 장수희)는 장편소설 ‘산중 눈보라’를 ‘하근찬 전집’ 제22권으로 올해 4월 부산의 산지니출판사를 통해 펴냈다. ‘산중 눈보라’는 그 자체가 미완성인 작품이어서 이번에 나온 585쪽 분량의 책 또한 당연하게 결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산중 눈보라’는 왜 결론이 없고, ‘잊히기 힘든 아픔’으로 각인된 작품일까? 그 사연을 알아보려면,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압살된 1980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증발된 소설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동아대학교 토목과를 중퇴한 하근찬은 195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수난이대’가 뽑히며 등단한 뒤 전업 작가의 길을 걸으며 한국 문학 최전선에 있었다. 국제신문이 강제 폐간된 날은 1980년 11월 25일.
당시 국제신문의 ‘마지막’ 연재소설이 바로 하근찬의 ‘산중 눈보라’(그림 김정명)였다. 강제 폐간 당일 문화면에는 ‘산중(山中) 눈보라 제277회’라고 선명히 나와 있다.
독재 정권이 군사작전 펴듯 득달같이 강행한 언론 통폐합으로 신문이 사라져 버렸으니, 연재소설도 결말에 이르지 못하고 갑자기 중단돼 버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등단 23년 된 중요한 소설가가 심혈을 기울이던 작품이자 문화 자산은 증발했고, 이후 기억되지 못했다. 오랜 기간 전집 발간을 이끄는 ‘농부 시인’ 이중기 간행위원(경북 영천시)은 “육필 원고 몇 장 정도를 제외하면 하근찬 작가는 작품과 관련한 어떤 자료도 남겨둔 게 없다”며 “특히 ‘산중 눈보라’는 전집을 내며 가장 고생했고, 동시에 많은 이의 도움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중기 시인에게서 들은 ‘산중 눈보라’ 책 발간 과정은 간행위원들의 정성과 영천 사람들의 노력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국제신문과 부산시립도서관에서 실물 신문을 복사하거나 촬영하는 일부터 시작해 결락된 부분 찾기, 원본 확인과 활자 판독, 타이핑과 교정 등 공정이 많았습니다. 국제신문 디지털 자료에서 큰 도움을 받았고요. ‘산중 눈보라’를 책으로 완성하는 데 3년이 걸렸습니다.”
▮절묘한 대중성, 깊은 주제의식
‘산중 눈보라’는 어떤 소설일까. 한마디로 깊은 주제의식을 신문 연재 대중소설로 탁월하고 절묘하게 뽑아낸 작품이다. 이야기를 장악하고, 대중과 호흡을 유지하며, 흥미진진하게 주제를 펼쳐가는 작가의 역량이 뚜렷하다. 6·25 전쟁이 터지기 직전, 지리산 근처 산골 학교에서 교장을 하던 아버지가 공비의 총에 맞아 죽는다. 공비는 아버지가 교장이던 학교의 젊은 소사였다.
세월이 흘러 옛 기억도 아득해진 듯한 어느 날, 대형 병원 원장으로 성공한 주인공은 기묘한 사연을 통해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만나게 된다. 어떻게 할 것인가? 복수할 것인가? 한다면 어떻게? 그 사이 일은 기상천외하게 꼬여 간다.
이 책에 해설 ‘산중 눈보라’의 위치: 역사의 흔적과 대중성의 접합’을 쓴 송주현 문학평론가(한신대학교 교수)는 이렇게 평했다. “그의 서사는 전쟁을 과거의 시선으로 고정시키지 않고 현재 속에서 계속해서 의미를 생성하는 ‘살아 있는 역사’로 전환시키며, 이를 통해 문학이 역사와 맺을 수 있는 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중기 시인은 이렇게 짚었다. “작가 하근찬은 많은 작품에서 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는 ‘산중 눈보라’에도 해당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 방식이 그 전까지와 완연히 다르다.”
그는 “이 책의 끝 대목 ‘5월의 눈보라’는 80년 광주를 떠올리게 해 의미심장하다”고 덧붙였다. 하근찬을 기리는 연구자와 고향 사람의 노력도 눈길을 끈다. 이중기 시인은 “하근찬 문학전집 발행 필요성을 느끼고 2016년부터 자료를 모으다가 많은 분의 도움으로 간행위원회를 꾸렸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영천시·영천시민 성금·유족의 희사 등에 힘입었다”고 설명했다. 2021년부터 나온 ‘하근찬 전집’은 2027년 제17권 ‘제국의 칼’(전 3권)과 제24권 산문집 ‘내 안에 내가 있다’를 내면 전체 24권으로 완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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