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실미도 사형집행 지휘관, 공작원 4명의 최후 순간을 말하다
2026.06.22 05:02
비밀 샐까 두려워한 국방부의 이중플레이
베트남전 파병 명령 하달해 상고 포기 유도
국가의 기만행위…유족에게는 위로의 말 전해
사형 직감했는지 트럭서 내린 뒤 “대한독립만세”
“김일성 목구멍에 총구멍 못 내 한” 유언 남겨
“매장지는 대방동 아닌 오류동으로 생각”
실미도 부대는 온통 기만이었다. 장교 임관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으로 꾀었지만 거짓말이었다. 대북 응징을 위해 외딴섬에서 극한의 훈련을 했으나 북파는 없었다. 처우도 형편없어, 굶주리다 못해 뱀까지 잡아먹는 처지가 됐다. 규율을 어긴 동료들은 맞아 죽은 뒤 주검이 드럼통에서 불태워졌다. 비밀 유지를 위해 사라져줘야 할 존재가 되고 있다는 위협을 자각한 이들은 기간병을 살해하고 섬을 탈출했으나 대부분 죽고 4명이 생존했다. 이들도 끝까지 기만을 당하다 눈을 감았다.
공군고등군법회의 검찰관(검찰부장, 대위)으로서 1972년 3월10일 서울 오류동 옛 공군정보부대 사격장에서 실미도 공작원 4명(임성빈·이서천·김창구·김병염)의 사형집행을 지휘한 김중권 변호사(87)가 입을 열었다. 그는 “국방부가 사형집행 대상 공작원에 대한 베트남전 파병 명령을 헌병대에 하달해 상고를 포기하게 한 뒤 곧바로 사형집행 명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4명의 공작원에 대한 베트남전 파병을 미끼로 한 상고 미제기 회유 의혹은 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제기된 바 있고, 김중권 변호사도 2020년 언론 인터뷰에서 비슷한 내용을 밝힌 적 있다. 하지만 국방부가 이와 같은 내용의 공식 명령을 하달했다는 증언이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비밀이 드러나는 걸 두려워한 국방부가 공작원들을 기만했다”고 덧붙였다.
한겨레는 지난 18일 김중권 변호사를 서울 마포구 합정역 인근 그의 개인 사무실에서 만나 사형집행 공작원의 마지막 순간과 이들에 대한 상고 미제기 회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는 지난 5월과 6월 국방부가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난 벽제와 오류동에서의 사형집행 공작원 유해발굴과 관련해 매장지 정보를 전화로 문의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2020년 11월 중앙일보는 “김중권 변호사가 ‘사형집행 공작원 매장지는 대방동’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한 적 있다. 하지만 김 변호사는 “언론이 내 말을 와전한 것”이라며 “대방동에 매장했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 분명히 못 박았다. 그는 “사형집행 후 업무는 헌병대 소관이었다. 내 느낌으론 오류동에 묻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본인이 공군 검찰부장으로서 헌병대장(중령)에게 집행을 명령한 사형의 시작부터 끝까지 설명했는데, 실미도 사형집행 공작원의 최후 순간에 대해 이렇게 자세한 증언이 나온 것도 처음이다. 사형집행 현장에서 생존 공작원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김일성 목구멍에 총구멍을 내지 못해 한스럽다”는 유언을 남긴 것은 서글프고 기묘한 현대사의 한 장면으로 기록될 만하다.
실미도 부대는 1968년 1월21일 김신조 등 북한 무장공작원 31명이 청와대를 공격하기 위해 북한산을 통해 서울로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맞대응하려 같은 해 4월 똑같은 31명의 숫자로 만든 ‘김일성 암살’ 특수부대였다. 정확한 명칭은 공군 제2325부대 209파견대(중앙유격사령부 684특공교육대)로, 인천 중구 무의동의 무인도 실미도에 세웠다. 하지만 1971년 8월23일 공작원들이 기간병을 살해하고 섬을 탈출해 버스를 탈취한 뒤 서울로 향하다 자폭하면서 거창한 북파 계획은 허망한 파국과 비극으로 마감됐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4명의 공작원은 1971년 12월6일 1심에서 초병살해 혐의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2주 만인 12월21일 항소심에서 항소가 기각됐으며 공작원들이 상고를 포기하면서 12월30일 사형이 확정됐다. 사형이 집행된 것은 그로부터 두 달이 조금 지난 뒤였다. 다음은 일문일답.
“대방동이라고 말한 적 없다. 그건 기자가 잘못 이해했다. 대방동엔 (사람 묻을) 산도 없다. 시신 처리에 관한 행정절차를 밟아야 해서 대방동사무소를 두 번인가 간 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와전된 것 같다. 사형집행 공작원들이 공군본부에 구금돼 그들의 주소지가 공군본부 대방동으로 돼 있었다. 시신을 처리하려면 관할 동장의 허가가 있어야 했다. 대방동에 묻기 위해 동사무소에 매장 허가를 받은 게 아니었다.”
― 그럼 어디에 묻었나.
“모른다. 나는 사형집행 지휘관으로서 집행하고 임무가 끝나버린 거지. 나머지 집행 이후 처리는 헌병대가 했다. 1972년 3월10일에 사형집행 했는데, 나는 두 달 뒤인 5월에 예편했다. 다만 느낌으로는 (사형 집행한) 그 지역 근방에서 처리하지 않았나 싶다. 벽제와 오류동 이야기가 나오는데, 내 느낌은 오류동 쪽이다.”
― 사형집행일의 기억에 관해 이야기해달라.
“사형집행 대상 공작원이 4명이었다. 헌병대에서는 사형집행일 아침에 이들에게 ‘다른 교도소로 이감한다’고 얘기한 것으로 안다. 공군본부 구치감에 구류돼 있었는데 타 교도소로 보낸다고 한 거지. 그렇게 말하고 포장된 군 트럭( 군용 천막 트럭)에 태우면서 전부 검은색 눈가리개를 차게 했다. 감이라는 게 있잖은가. 다른 교도소로 이감하는 게 아니라고 느꼈을 거다. 난 미리 지프 타고 오류동 뒷산 사형집행장에 올라와 대기하고 있었다. 트럭이 오더라고. 정차한 뒤 트럭 천막을 벗기니까 한 사람이 뛰어내렸는데 ‘대한독립만세’라고 고함을 외쳤다. ‘대한민국 만세’가 아니라 ‘대한독립만세’였다.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아마 ‘여기가 사형집행 장소구나’ 하는 느낌이 왔던 모양이다. 이미 현장에는 4명의 사형집행을 위한 포스트 4개가 박혀있었다. 헌병들이 공작원 한 사람씩 포스트 앞에 세우고 손을 뒤로 맸다.”
“당시 헌병대장이 와서 사형집행을 어떻게 하는지를 미리 보고할 거 아닌가. 사형수 한 사람당 3명, 총 12명의 사수가 쏘는 거였다. 총기 종류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에 없다.(카빈총이라는 증언이 있다.) 헌병대장이 총탄을 (헌병들에게) 한발씩 주면서 ‘1발은 공포탄’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셋 중 한 명에게는 공포탄이 갈 수 있다고 해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거였다. 실제로는 공포탄이 아니고 전부 실탄이었다.”
―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한 보고서를 보면 당시 사형집행 현장에는 공군고등군법회의 검찰부 검찰관(김중권 대위)과 함께 검찰 서기, 항공의학연구원 군의관, 군종 감실 군종장교(목사), 공군 8020부대 교도소장이 참여했다고 나와있다.
“군종장교는 사형집행 전 기도를 했고, 군의관은 공작원들의 가슴에 사격 표적지를 달았다. 표적지 보고 쏘라는 거지. 내가 ‘집행’이라고 말하면 헌병대장이 ‘집행’이라고 반복을 했고, 그다음에 사격했다. 한꺼번에 12발이 날아가는 거지. (사격)교육받은 사람이라도 사람을 쏜다는 게 얼마나 힘든가. 당시 4명 중 3명은 총격 직후 바로 절명을 했다.”
― 기억에 남는 다른 장면은 없나.
“지금도 늘 생각하는 것은 공작원 한 명의 유언이다. 사형집행 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하라고 했다. 한 명이, 좀 특이한 성이었는데….”
“그 사람 이름은 임성빈이다. 눈이 가려진 상태에서 물어봤는데, ‘검찰관님’ 하고 나를 부르더라. 장시간 동안 수사를 받으면서 내 음성을 기억한 거지. 그래서 ‘말해봐’ 그랬더니 ‘김일성 목구멍에 총구멍을 내지 못하고 가는 신세가 한탄스럽다’고 했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자기 가족을 걱정하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임성빈은 실제 유언장에 이렇게 적었다. “너무나도 억울합니다. 검찰관님 너무나도 억울합니다. 제가 하고 싶다는 말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웠습니다. 만 3년6개월 동안 추우나 더우나 쌓은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이 아까우며 후배나 동료를 위해 못다 하고, 김일성의 목을 베지 못하고 죽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 사형집행 공작원들이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선 항소를 했는데, 2심에서 같은 판결을 받고 상고를 안 했다. 이와 관련 베트남전에 파병할 것처럼 말해 상고하지 말라고 회유했다는 의혹이 있다.
“맞다. 국방부가 베트남 파병하겠다는 의사를 명령으로 하달해왔다.” (1964년부터 1972년까지 한국 정부는 베트남전에 32만여명의 병력을 파병했다. 1972년 파병된 병력은 3만7438명이었다)
― 국방부가 공작원들의 베트남전 파병 의사를 공식 명령으로 전달한 건가. “국방부에서 헌병대에 하달한 것으로 안다. 당시 공군본부 구치감에서 사형집행 공작원을 수용했고, 이를 관할하는 게 헌병대였다. 상고 포기하면 월남전에 파병시키겠다고 가느다란 희망을 준 거지. 그리고 조금 있다가 그들이 상고 포기를 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 상고 포기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형 집행 명령이 곧장 내려왔다.”
“이중플레이한 거다. 보통군법회의와 고등군법회의로 이어지는 군법회의 1심과 2심은 군에서 하는 거라 외부에 알려질 일이 없다. 그런데 상고를 해서 민간법원인 대법원으로 가면 재판 서류가 낱낱이 공개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 사람들 소위로 임관해주겠다고 속여 모집한 것부터 부실한 처우와 중간에 착복한 것, 북한 침투훈련까지 비밀이 다 노출될 수밖에 없다. 국방부에서 그것을 두려워한 것 같다. 그래서 상고 포기를 하게 한 거겠지.”
― 베트남전에 파병할 것처럼 해서 상고 포기해 놓고 사형집행을 한 것은 국가의 기만행위 아닌가.
“적절한 행정 행위가 아니다. 상고 포기를 해서 베트남전에 활용할 수 있다면 활용을 해야 하는데, 그걸 안 하고 결국은 집행명령을 내렸으니까. 기만한 게 맞다. 물론 그들이 사형수, 범법자라 하더라도.”
― 국가가 사과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필요하다. 그 점에 대해선 정부가 잘못한 거다. 사형수이긴 하지만 정부가 약속을 어긴 것은 국가 책임이고, 이건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사건이 터지고 공군 참모총장(김두만)이 현장을 확보하라고 했다. 그래서 그날 헬기로 (실미도에) 갔다. 사건 당일은 정말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실미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기간병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했으니까. 그냥 뭐 유혈이 낭자하고, 시신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진짜 무서웠다. 그렇게 증거 수집을 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수사하면서 이들(공작원)이 받은 처우 문제를 알게 됐다. 특수부대 요원이니까 정부의 예산도 특별했을 것 아닌가. 그런데 중간에서 자꾸 떼먹은 거지. 그리고 실미도 공작원들을 지휘한 상사가 있었다. 공작원들에게 소위로 임관시켜준다고 해놓고 자기가 상사 계급장을 달고 있으면 말이 안 되니까 대위 계급장을 (가짜로) 달고 있었다. 이 사람이 아주 무서운 사람인데, 현장에서 죽었다.”
(대위로 위장했던 그 상사는 영화 ‘실미도’에서 안성기가 연기한 실미도 부대 교육대장 김순웅이다. 그는 1971년 8월23일 오전 6시께 가장 먼저 공작원 장성관에 피살됐다. 이후 다른 기간병들도 피격됐다.)
― 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보나.
“공작원들을 북한에 침투시키려고 1968년 모집한 건데,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으로 남북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서 애초 계획이 무산됐다. 그게 제일 큰 원인이다. 정말 여러 일이 있었다. 훈련받던 공작원 3명이 인근 무의도로 건너가 주민을 겁탈했는데, 군법회의에 넘긴 게 아니라 현장 지휘자가 즉결처분(*실제로는 다른 공작원을 통해 살해하거나 부상한 뒤 방치돼 죽음)을 했다. 부대 이탈한 공작원 2명도 다른 공작원이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그 시신을 불태웠다. 잘못하면 모두 이리될 수 있다고 겁을 준 거지. 여러 불만이 겹쳐서 사건이 터진 거다. 이 기회를 통해서 사형 집행당한 이들이 자기들이 한 일에 대해서도 문책받아야 하는 거고, 또 정부가 이들을 처리하면서 어떤 위법을 했다고 그러면 또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거다. 서로 간에 한 번 반성해 볼 필요가 있는 거다. 상고 포기도 마찬가지고.”
“그 사람들도 국가를 위해서 몸을 바치겠다 생각하고 투신을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비극으로 끝나게 돼서 안타깝다. 원래 정부가 계획한 대로 그 일이 잘 진행됐으면 참 좋을 뻔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해서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또 유족들의 경우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당했다고 느낄 거다. 그분들께는 위로의 말씀도 드린다.”
― 혹시 미안한 마음은 없나.
“미안한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저지른 일이 너무 쇼크를 준 큰일이었잖은가. 물론 자기들 나름대로 억울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겠지만…. 억울함을 그렇게 해소해서는 안 되지.”
― 사형집행 후 주검을 가족에게 인도했어야 하지 않나.
“꼭 그렇지는 않을 건데…. 수사와 재판 과정은 법적으로 문제없었다고 본다. 해당 법규에 따라 다 진행했다. 다만 공작원들은 군인이 아니었다. 소위로 임관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군인 역할을 했지만 실제로는 군번도 부여하지 않았으니까. 법률상으로 굳이 말한다면 사적 계약 관계와 비슷한 거라고. 그러면 민간인을 왜 군에서 총살했느냐, 그거는 군 형법상으로 볼 때는 초병 살해의 경우 민간인도 군법회의 대상이 되니까 거기에 해당될 수 있다고 본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6년 발표한 실미도 사건 조사결과 보고서에서 “군행형법 및 시행령에서는 사형집행 사실의 통지 및 시체의 인도를 강제하고 있는데 국가가 실미도 사건 실체의 은폐를 위해 이를 이행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라고 밝혔다)
저작권 보호를 위해 본문의 일부만 표시됩니다.
원문 보기 →댓글 (0)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베트남의 다른 소식
모든 소식을 불러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