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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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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가·알약으로 시대 위로한 배영환 작가 별세

2026.06.21 21:03

유행가·술병·알약 재료로 위로
시대정신을 서정적 감수성으로 치환
노숙자 프로젝트, 농·맹학교 벽화 등
‘포스트 민중미술’ 대표작가 타계
현대미술가 배영환 /사진제공 BB&M
“언젠간 가겠지 / 푸르른 이 청춘 /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하략)”

밴드 산울림의 김창완이 부른 노래 ‘청춘’의 노랫말을 배영환(1969~2026)은 알약과 약솜으로 써내려갔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Ⅱ’에서 만날 수 있는 그의 1999년작 ‘청춘’이다. 배영환의 1997년 첫 번째 개인전 제목은 ‘유행가’, 1999년 두 번째 개인전 제목도 ‘유행가2’였다. 민주화운동의 시대, 외환위기의 시절을 보낸 그는 우리 사회의 불안과 상실감을 ‘유행가’로 풀었다. 유행가 노랫말은 대중의 마음에 위안을 주었고, 작품의 재료가 된 위장약·두통약 같은 알약과 약솜, 소독약 등은 잠시나마 고통을 잊게하는 신속한 일상 의료용품이었다.

그렇게 상처받은 시대를 위로하고, 저항의 감수성을 표현해 온 현대미술가 배영환이 19일 별세했다. 향년 57세.

배영환 1999년작 ‘청춘’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상설전에서 만날 수 있다. /사진출처 국립현대미술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난 배영환은 홍익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그는 공사 현장에 버려진 나무, 깨진 병, 알약, 솜, 대중가요의 가사 등 일상에서 발견되는 평범한 재료와 이미지를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아왔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인 2006년작 ‘유행가-크레이지 러브’는 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나무판에 흰색 바탕칠을 한 후 오선지를 긋고, 갈색 맥주병과 녹색 소주병으로 악보를 그린 작품이다. 노랫말은 1980년대 유행한 팝송을 한글 발음으로 적어 대중의 감성과 소통하고자 했다. 고통과 울분을 품고도 보석처럼 반짝이는 술병 조각이 역설적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이처럼 거리에서 마주한 소외계층의 고통을 담아낸 배영환은 1970년대 ‘단색화’ 같은 주류 모더니즘의 물성을 강조한 수행적 어법을 빌려와 패러디한 동시에 1980년대 민중미술의 이념적 경직성을 대중의 공감으로 끌어내며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시대상을 관통하는 ‘포스트 민중미술’의 대표작가로 불렸다.

배영환의 2006년작 ‘유행가-크레이지 러브’ /사진출처 국립현대미술관
배영환 ‘유행가-크레이지 러브’ 세부 /사진출처 국립현대미술관
2002년 제4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유행가3:광주 상무대’는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곳에서 1980년대 민주화 항쟁의 주요 내용을 당시의 금지곡·대중가요와 병치시킨 뮤직비디오형식의 영상작업을 상영하는 프로젝트였다. 이 작품으로 배영환은 ‘광주비엔날레 현장상’을 받았다. 2004년에는 정부가 동시대 가장 주목할 만한 작가에게 수여하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다. 2005년에는 제51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배영환은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공공미술에서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2000년 무렵, 김광석의 노래 ‘거리에서’를 듣고 영감을 얻은 그는 직접 노숙자 생활을 한 후 노숙자 지원시설과 무료급식소·화장실·병원·고물상 지도까지 꼼꼼하게 기록한 ‘노숙자 수첩’을 발간했다. 2009년에는 버려진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해 농어촌 등 문화 소외 지역에 작은 도서관을 보급한 ‘도서관 프로젝트-내일(來日)’을 시작했고, 이 작업으로 2013년 대한민국 공공디자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강원도 철원에 위치한 배영환의 공공미술 설치작품 ‘빛의 사원’ /사진출처 공공미술포털
서울 종로구 신교동 국립서울농학교와 국서울맹학교 담장도 그의 작품이다. 인근에 작업실을 두고 있던 작가가 2007년 서울농학교 학생 180명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그림이나 글로 써서 벽화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작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을 도자 타일로 구워 높이 1.2m, 폭 32.1m짜리 벽화‘수화-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로 만들었다. 서울맹학교 외벽에는 전교생 173명이 각자의 소원을 21×21㎝ 도자판에 점자로 새기고 자신의 핸드프린팅을 찍은, 총 길이 14m의 벽화가 있다. 맹학교 학생들과 일일이 석고 뜨는 작업을 배 작가가 직접 진행했다. 2009년 완성된 벽화 제목은 ‘점자-만지는 글, 아름다운 기억’이다. 그렇게 들리지 않는 이야기, 보이지 않는 꿈에 혼신을 담았다.

강원도 철원 노동당사 앞에 설치된 공공미술 ‘빛의 사원’은 비무장지대(DMZ) 접경 지역의 역사적 상흔을 현재적 맥락으로 재구성한 기록관이자 전시관이다. 이 작품은 2015년 대한민국 공공디자인 대상 최우수상을 받았다.

작가의 전속화랑인 BB&M은 20일 보도자료를 통해 “일상에서 발견되는 평범한 재료들은 그의 작업 안에서 단순한 사물이 아닌 감각과 기억, 사회적 경험이 축적된 매개체로 전환되며, 개인의 삶과 동시대 사회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드러냈다”면서 “그의 작업 세계는 한국 현대미술사 속에서 사물, 감각, 사회적 경험이 교차하는 조형 언어를 확장한 중요한 궤적으로 남을 것이다”는 말로 고인의 예술적 여정에 애도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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