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간 전
1시간만 오르면 가슴이 뻥, 땀이 한 순간 멎는 곳
2026.06.21 19:46
백아산(白鵝山, 756m)은 백아면의 영혼이자 육체다. '흰 거위 무리가 모여 앉아 있는 형상'을 뜻하는 이름처럼, 아스라한 능선 위로 솟구친 하얀 석회암 바위들은 푸른 여름날의 숲 위로 돛을 올린 흰 배처럼 눈부셨다. 6년 전, 북면이라 불리던 이 고즈넉한 산촌은, 면을 병풍처럼 둘러싼 이 산의 이름을 따 백아면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흰 거위의 날개를 타고 날아오르는 듯
| ▲ 백아산 하늘다리 마당바위에서 바라 본 모습. 다리 건너편이 절터바위다. |
| ⓒ 김재근 |
산행의 들머리로 잡은 관광 목장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차 문을 열자 훅 끼쳐오는 짙은 흙 내음과 풀 비린내, 그리고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도화지처럼 맑고 깨끗했다.
초입 갈림길 이정표, 왼쪽 길은 가까우나 경사가 급하고 오른쪽 길은 돌아가나 완만하다. 급한 길로 오르고 완만한 길로 내려오기로 했다. 등반 거리가 5km 남짓, 멀지 않아 운동 효과를 높이되 무릎 부담은 줄이기 위해서다.
초반은 소나무 숲길이다. 진한 솔향이 온몸을 감싼다. 솔가지 사이를 비집고 내리는 햇살이 어깨 위로 내려선다. 초입에서 마주했던 분들은 모두 오른쪽 길을 택했다. 홀로 걷는 내 발소리와 숨소리가 유일한 소음이 되어 고요를 깨운다. 기분 좋은 적막감이다. 한 시간 남짓, 적당히 숨이 차오르고 땀방울이 등허리로 흐를 즈음, 시야가 탁 트인다. 절터 바위다.
시원한 조망이 가슴을 후련하게 뚫어준다. 땀이 한순간에 멎는다. 눈부시게 푸르른 하늘엔 솜사탕 같은 구름이 두둥실. 대기가 투명하여, 푸른 잉크를 풀어놓은 듯 첩첩이 겹치는 산줄기들이 온전히 눈에 들어온다. 멀리 능선을 그리는 무등산이 부드럽게 와닿고, 발 아래로 논밭이 모자이크처럼 펼쳐진다.
산의 자랑인 '백아산 하늘다리'가 허공을 가로지른다. 건너편 마당바위를 잇는 연장 66미터, 폭 1.2미터의 산악 현수교. 흰 거위의 날개를 타고 푸른 허공을 날아오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중앙의 투명한 강화유리 조망창 아래로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아찔하다. 바람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목적지인 마당바위(해발 756m)에 올랐다. 사방이 깎아지는 듯한 절벽, 헬기장으로 쓰이는 넓은 바위 평전, 탁 트인 시야, 우뚝 솟은 섬 같다. 천혜의 요새다. 6.25 전쟁 당시 빨치산의 전라남도 총사령부가 자리 잡았다. 토벌대와 빨치산 간의 피비린내 나는 격전이 끊이지 않았다. 역사의 무게감에 마음이 가라앉는다.
전투로 죽어 하늘로 간 이들의 영혼이 머무는 곳이라 하여 '하늘다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평화롭기만 한 푸른 숲과 하얀 바위, 그 위를 스쳐 가는 싱그러운 여름 바람 속에서, 한때 이 땅을 붉게 물들였을 동족상잔의 아픔을 가늠해 본다.
노란 보리밭을 지나 시간이 느리게 걷는 거리로
| ▲ 백아산 가든 하나뿐인 식당이다. 중심 상권인 듯 백아산가든과 백아산식품과 아산중기가 모여있다. |
| ⓒ 김재근 |
원점 회귀했다. 등산로 초입 베이커리 카페, 뼛속까지 얼려버릴 듯한 시원한 것이 유혹한다. 달콤한 것도. 잠시 갈등 했다. 밥이 먼저다. 면 소재지인 이천리로 향했다. 오를 때 보지 못했던 보리밭이 펼쳐진다. 노랗게 익었다. 콤바인 홀로 너른 밭을 오간다. 어린 시절 보리 베다가 입었던 손가락 흉터를 만져본다. 낫으로 베고 지게로 짊어졌던 일은 이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었다.
내비게이션은 이천리라고 안내하는데, 삼거리 머릿돌은 학천마을이라고 했다. 이곳이 중심인듯 했다. 행정복지센터, 우체국, 치안센터, 소방서 지구대, 초등학교가 길 따라 어깨동무하듯 옹기종기 붙었다. 앞쪽으로 식당이 우측으로 미용실이 있고, 길 아래로 복지회관이 마당처럼 너른 잔디광장을 갖추었다. 평소에는 파크골프장으로 이용하다가 행사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는 듯했다. 그 건너로 보건지소와 농협과 중학교가 있다. 한눈에 쏙 들어온다.
거리는 시간이 아주 느린 걸음으로 걷거나, 혹은 어느 한 시절에 아예 멈추어 선 것만 같은 착각을 준다. 한낮의 열기 아래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다. 선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알리듯 길가에 가득한 당선 인사와 축하 펼침막이 인적없는 길가에 쓸쓸했다. 마치 축제가 끝나고 사람이 모두 떠난 것처럼.
'백아산가든'으로 들어섰다. 유일한 식당이다. 홀은 넓지 않았다. 소박한 공간에 반 넘게 찬 테이블 사이로 나지막한 대화가 흘렀다. 혼자 먹을 수 있는 메뉴는 많지 않았다.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창문 너머로 백아산이 보인다. 묵은지가 입맛을 당긴다. 직접 만든다는 두부를 주문했다. 냄비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김치찌개 국물 한 숟가락, 짜릿하다. 산행의 피로가 풀린다.
식당을 나와 학천길을 걷는다. 카페도 편의점도 보이지 않는다. 햇살은 정수리 위에서 수직으로 쏟아진다. 바람도 멈추었다. 완벽한 고요다. 모여있는 백아산가든과 백아산식품, 아산중기 간판과 달리, 거리의 고요처럼 한적하게 보이는 '숙이 미용실'. 꾸밈 없는 간판이 제 소임을 다하고 있다. 등받이 벤치와 잡초 무성한 꽃양귀비 화분이 가게 앞을 지킨다. 동네 어머니들의 해묵은 소문들이 문틈 사이로 삐져나올 것 같다. 닫힌 유리문에 얼굴을 대고 안을 들여다본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다. 머리를 만져보았다. 자를 때가 되었는데.
| ▲ 아산초등학교 104세가 되었다. 텅빈 운동장에 햇살이 머물렀다. 나무 그늘 아래 그네 의자가 아주 운치가 좋다. |
| ⓒ 김재근 |
우체국과 치안센터와 소방서 지구대를 지나 초등학교에 들어섰다. 아산초등학교 100주년 기념비가 먼저 반긴다. 1922년에 세웠다 하니 104살이 되었다. 학교만큼 나이 먹은 벚나무가 운동장 가로 늘어섰다. 그늘 아래 그네 의자에 앉았다. 오랫동안 흔들 흔들 흔들. 잔디 깔린 운동장 축구 골대 찢긴 망 위로 한낮의 햇살이 사정 없이 내리쬔다. 교사 앞 화단 철쭉은 시들어 마지막 꽃잎을 간신히 붙들고 있다. 우측으로 백아산이 선명하다. 커피 생각이 났다. 아까 보았던 그 카페도. 뒤늦은 후회다.
2억만 년 전의 흔적이 박제된 시간 무덤
운동장을 돌았다. 세종대왕도 이순신 장군도 학교처럼 나이를 먹었다. 교실을 기웃거렸다. 적막함 속에 따스한 서정이 흐른다. 이 작은 학교의 교실 안에서 꿈을 키웠을 아이들은 지금 쯤 어디서 늙어가고 있을까. 인구 감소로 이 고요함마저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교정에 내려앉은 유월의 햇살이 애틋했다. 변해가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위로처럼.
학교에서 나와 원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백아산에 발원한 동복천을 만났다. 동복댐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내려간다. 길가로 제법 너른 농지가 펼쳐진다. 단풍나무 가로수길이 아름답다. 담양군으로 들어가는 갈림길을 지나 조금 더 가니 영겁의 시간 속으로 안내하는 이정표가 나온다. 천연기념물 제487호인 '화순 서유리 공룡 발자국 화석 산지'다.
중생대, 대략 2억만 년 전의 흔적이 고스란히 박제된 시간 무덤이자 지질학 박물관이다. 52m에 이르는 육식공룡(수각류) 보행렬, 대형과 중형 두 유형의 육식공룡과 초식공룡(용각류, 조각류) 발자국이 1500여 점 이상 혼재한다.
| ▲ 화순 서유리 공룡 발자국 화석 산지 지붕이 설치되어 있어 쾌적하고 시원했다. 데크를 따라 한 바퀴 돌며 관람할 수 있다. 건물을 지으려고 바위를 깨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
| ⓒ 김재근 |
당시는 호숫가였고, 공룡들이 물을 마시기 위해 드나들던 삶의 터전이었다. 안내판을 보며 지층의 단면을 살핀다. 흐릿했던 발자국들이 점차 선명해진다. 길게 이어진 보행렬과 큼직한 발자국들, 공룡의 그림자가 푸른 여름 하늘 위로 겹칠 것만 같다.
지층의 질감이 신기했다. 진흙이 바짝 말라서 바닥이 갈라진 그대로 굳어버린 '건열', 호수 물결이 빈틈을 모래로 덮어 갈라진 모습 그대로 바위가 되었다. 빛이 표면에 음영을 드리우며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규모와 보존 상태가 뛰어나 세계적으로 높게 평가 받는다고 한다.
지붕 보호막이 설치되어 여름날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시원하고 쾌적했다. 뜨거운 햇살 속으로 나서기가 무서웠다. 홀로 있는 공간, 발자국에 눈길을 던져두고 조용히 음악을 듣는다. 시간이 무겁게 와 닿는다. 장구한 지구의 역사 속에서 100년 안팎의 생이 미미한 점처럼 여겨진다. 겸손한 사유의 시간이 무심히 흐른다.
오래된 지층에서 나와 오늘의 시간으로 복귀했다. 쉼표를 찍은 곳은 화석지 바로 옆 온천 리조트. 주차장을 둘러싸고 하늘을 찌를 듯 곧게 뻗은 메타세쿼이아가 초록의 지붕을 이룬다. 공룡시대 나무라던데. 바늘 같은 햇살도 잎사귀들이 촘촘히 짜낸 그늘을 완전히 뚫지 못했다. 차가운 캔 커피 한 모금이 생명수 같다. 바람 한 줄기 이마를 어루만지며 지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화순매일신문 에도 실립니다.개인 블로그에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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