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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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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처럼 들어맞은 서문 “험하게 살아가는 나를 보아야 하리라” [.txt]

2026.06.21 06:02

나의 첫 책│안도현 시인의 ‘서울로 가는 전봉준’
민음사 주간 황지우 시인 제안으로 출간
역사와 현실, 결의 모두 담고자 욕심
역사 전공 ‘여친’ 덕에 전봉준 행적 좇아
1989년 전교조 탈퇴각서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해직 됐던 안도현 시인은 ‘거리의 교사’로 집회·시위에 많이 참여했다. ⓒ이대원

스물다섯살에 첫 시집을 냈다. 세상이 무엇인지 모를 때였다. 그럼에도 마치 세상을 다 안다는 듯이, 역사와 현실을 잇는 거대한 사업에 종사하는 듯이, 낙동강과 백두산과 전봉준과 발해를 겁 없이 호출했다. “1980년부터 지금까지 씌어진 것들을 한권의 시집으로 묶는다. 젊은 나이에 책을 내는 마음은 즐거우면서도 매우 쑥스럽다”고 서문에 썼다. 1985년, 초짜 중학교 교사로 세상에 첫발을 들여놓은 해였다.

글쓰기를 도와주는 컴퓨터나 타자기가 있을 리 없었다. 펜으로 빈 연습장이나 노트에 시를 썼고 완성한 원고는 원고지에다 정리했다. 그 무렵, 시를 쓰려고 볼펜을 잡으면 ‘꽃 피는 봄’ 대신에 ‘사나운 눈 내리는 겨울’이 먼저 떠올랐다. 들판을 태우며 가는 들불의 이미지, 새벽밥을 먹고 일하러 나가는 사람들의 일상, 휴전선을 가운데 둔 이쪽과 저쪽의 시간들, 미래에 대한 뜨거운 결의와 다짐을 모두 시의 안쪽으로 끌어들이고자 욕심을 부렸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 l 안도현 지음, 문학동네(2021 개정판, 초판은 1985년 민음사)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100쪽이 되지 않는다. 원고의 누적량이 빈약했기 때문이다.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이후 어느 날 황지우 시인한테서 편지가 왔다. 민음사에서 제작한 원고지에 만년필로 쓴 그의 필체는 유려했다. 불쑥, 시집을 내자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 민음사 주간으로 일하고 있었다. ‘오늘의 시인총서’ 30번째로 이미 순서를 정해 두었으니 시를 모아 보라고 했다. 민음사의 이 시리즈는 김수영, 김춘수에서 시작해서 고은, 박용래, 황동규로 이어지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나에게 엄정한 문학 교과서로 깊숙이 들어앉아 있던 바로 그 시리즈. 나는 머뭇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출내기로서의 두려움이나 겸손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발표한 시들을 긁어모아 보니 마흔편을 채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 첫 시집의 앞부분 절반 정도는 열아홉살 혹은 스무살 때 쓴 습작기의 시편들이다. 어설프고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첫 책.

‘서울로 가는 전봉준’ 덕분에 지금은 작고한 전주의 박봉우 시인은 나를 만날 때마다, 어이 전봉준, 나 술값 이천원만 주라, 하면서 애칭으로 나를 ‘전봉준’으로 불렀다. 불우한 생을 술로 버티며 살던 시인의 눈에는 전봉준 어쩌고 하면서 문단에 머리를 내민 나이 어린 후배가 기특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사실은 국사교육과를 다니던 여자 친구 덕분에 전봉준을 만났다. 나는 닥치는 대로 그녀의 전공 관련 책을 빌려 읽었는데, 재일사학자 강재언이 쓴 ‘한국근대사’의 뒤표지에 한장의 조그마한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 사진을 설명하는 짤막한 한마디,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 그것을 내 노트 한쪽에 적어 두었다. 그러고는 전봉준의 행적과 동학농민혁명의 기록을 따라다녔다. 서울로 압송되는 음력 정월에 만경 들판을 건너는 그가 보였고, 눈이 내렸고, 발설해서는 안 되는 광주의 5월이 겹쳐 보였다.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를 얻은 건 행운이었지만 “이름 없는 들꽃”이라는 비유는 지금 봐도 궁색하기 그지없다.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황지우의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김정환의 ‘좋은 꽃’, 곽재구의 ‘전장포 아리랑’과 같은 날 출간되었다. 출판사 민음사의 건물은 종각역에 있었고, 2층 계단을 걸어 올라가 박맹호 사장께 인사를 드렸고, 봉투에 든 현금으로 인세를 받았다. 처음이었다. 밝은 녹색 바탕의 시집 표지에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내가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기왕에 멋들어지게 한마당 놀다 가려면, 앞으로 더 험하게 살아가는 나를 보아야 하리라”라고 쓴 서문은 이후 내 젊은 시절의 예언처럼 들어맞았다. 보증을 잘못 선 탓에 빚이 쌓여갔고, 1989년 전교조 탈퇴각서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해직이 되었다. 거리의 교사로 집회와 시위에 수없이 참여했고, ‘펜은 무기다’라는 문장이 적힌 티셔츠를 입고 돌아다녔다. 시 한편을 쓰기 위해 골방에서 파지를 사오십장 넘게 내던 문학주의자는 광장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안도현 시인

그리고 다음 책들

■ 연어

‘연어’를 쓰면서 연어에게 배운 게 많다. 서른여섯살 때였다. 출간한 지 딱 30년이 되어 올해 개정판을 냈다. 1판 162쇄를 찍고, 열몇개 나라에 번역 출판까지 했으니 글 쓰는 자로서는 과분한 복을 받았다. 연어의 모천회귀라는 서사는 이제 낯설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형식을 택한 것은 아이와 어른이 누구라도 읽을 수 있는 이야기였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이 낯선 형식을 기꺼이, 오래 받아준 독자들께 감사를 드린다. 이 책에서 제일 힘주어 말하고 싶었던 문장이 있다. “그래.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나 아닌 것들의 배경이 된다는 뜻이지.”

문학동네(1996, 30주년 기념 개정판 2026)


■ 그리운 여우

1994년 3월, 오랜 해직 교사 생활이 끝났다. 나는 시골에 있는 한 작은 고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산서고등학교. 나는 자취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면사무소 앞에 있는 우리 반 학생 집 아래채에다 한달에 3만원을 내는 방을 하나 얻었다. 슬레이트 지붕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면 연탄아궁이가 딸린 부엌이 나오고, 방문을 열면 라면 상자만 한 창이 달린 방이 하나 있었다. 마당의 수도꼭지 앞에 쪼그려 앉아 쌀을 씻고, 걸레를 빨았다. 그리고 시를 썼다. 시집 ‘그리운 여우’에 들어가 있는 대부분의 시는 그 집의, 그 방에서 엎드려 쓴 것들이다.

창비(1997)


■ 백석 평전

이십대 초반부터 백석의 시를 낡은 잡지에서 만날 때마다 노트에 필사했다. 그 당시만 해도 공개적으로 그의 시를 논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를 베낄 때면 묘한 흥분과 감격에 휩싸이곤 했다. 무엇보다 기존의 우리 시에 없는 말투가 나를 사로잡았다. 백석이 나의 사부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그가 과연 바람둥이였는지, 식민지 청년 시인으로서 현실을 어떻게 타개해 나갔는지 궁금해서 평전을 쓰기로 했다. 숨겨진 퍼즐 맞추듯 원고를 쓰는 내내 행복했다. 북한 양강도 삼수에서의 마지막 행적을 완벽하게 담지 못했으므로 아직까지는 미완성이다.

다산백방(2014)


■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

열두번째 시집이다. 시라는 어떤 규격 속에 언어를 욱여넣지 말자, 언어가 가리키는 대로 따라가 보자는 심사로 쓴 시들이다. 시인의 세계관이 언어를 낳지 않는다는 것. 언어는 시인이 목적한 바대로 이끌려 가지 않는다는 것. 시를 창작하는 그 어떤 원칙도 창작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세상과 사물과 타자가 불러주는 언어를 받아 적어야겠다고 마음먹으니까 내가 한없이 자유로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인은 의미를 규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의미의 감각을 질문하는 사람이라는 생각. 의미의 울타리에 갇히기 직전의 어떤 감각적인 상태를 바라보았더니, 그때 언어가 밀려왔다.

문학동네(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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