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의 여행에서 통곡한 아빠, 카메라에 찍힌 그날의 진실
2026.06.20 19:51
열한 살이 됐을 때 내가 이미 다 컸다고 생각했다. 가족 여행에 더는 따라가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엄마의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지 않았으며, 부모님과 공유하지 않는 혼자만의 세계가 점점 커져갔다.
그 무렵부터 부모님이 어떤 사람인지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왜 나한테는 이렇게 하라 그러고 본인은 저렇게 하는 거지?' '엄마 아빠는 어른인데 왜 어른답게 행동하지 않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아이는 부모라는 세계를 배반하면서 자란다.
임신한 몸으로 읽었던 책 <케빈의 대하여>에는 화자인 에바가 자신의 엄마에 대해 했던 "야만스런 분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엄마는 가식적이지 않아? 엄마 코는 너무 크지 않아? 엄마가 착취하고 있는 여행가이드들은 너어무 지이루해. 심각한 사실은, 자식의 부모 흠잡기가 치명적일 정도로 정확하다는 거야. 부모는 항상 자식 가까이 있고, 자식을 믿고, 기꺼이 자식에게 자신을 드러내니까. 그래서 자식이 부모한테 이중 배신을 할 수 있는 거야." 47쪽
시간이 흘러 에바는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아이, 엄마를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아이 케빈의 엄마가 된다. 책을 읽으면서 언젠가 내 아이도 어린 시절의 나처럼 될까 두려웠다.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엄마를 지켜보며 엄마를 신랄하게 평가하는 사람이 될까 봐.
소설 속 에바의 말처럼 자식은 부모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열한 살의 나 역시 내 부모가 갖고 있는 모순과 결함을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다고 믿었다. 영화 <애프터썬>을 보면서 깨달았다. 내가 알고 있던 부모의 모습은 아주 일부에 불과했다는 것을.
어른의 세계가 궁금한 딸, 미끄러지는 아빠
| ▲ 소피는 자신이 더는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아이다. |
| ⓒ 그린나래미디어 |
<애프터썬>에서 어른이 된 소피는 20년 전 아빠와 함께 떠났던 여행을 떠올린다. 열한 살 소피(프랭키 코리오)는 엄마와 스코틀랜드에, 아빠 캘럼(폴 메스칼)은 런던에 따로 살고 있다.
소피와 아빠 캘럼은 여름 방학을 맞아 튀르키예에서 만난다. 한밤중에 도착한 호텔 프론트에는 아무도 없고, 침대 두 개를 요청한 방에는 침대 하나만 놓여 있다. 오른팔에 깁스를 한 아빠는 당황한 기색이지만 소피는 아무렇지 않은 듯 쿨하게 말한다.
"난 괜찮아."
설상가상으로 호텔 야외 수영장은 공사가 진행 중이라 시끄럽고 어수선하다. 아빠는 딸을 이런 곳에 데리고 온 것이 마음에 걸린다.
아빠의 나이는 서른하나. 사람들은 캘럼을 소피의 아빠가 아닌 오빠로 착각한다. 아빠는 소피의 등에 선크림을 꼼꼼하게 발라주면서 수영장에 있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라고 말한다. 그러자 소피는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쟤넨 어린애들이잖아."
열한 살은 어른의 눈에는 여전히 돌봄이 필요해 보이지만 스스로는 다 컸다고 생각하는 나이다. 소피는 또래보다는 더 나이가 많은 아이들에게 시선이 간다. 소피는 화장실에서 여자아이들이 나누는 성적인 대화를 유심히 엿듣고, 10대 청소년들이 수영장에서 거침없이 키스하고 스킨십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정작 이들은 소피를 그저 어린아이로 여기지만(10대 아이들 사이에서는 한두 살 차이는 큰 격차다) 소피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자꾸만 주변을 맴돈다. 과거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소피는 자신이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며 '알 건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피는 어른의 세계가 궁금하다.
밝고 씩씩해 보이는 소피와 달리 아빠는 우울하고 어딘가 위태로워 보인다. 그는 소피에게 이전에 하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구상하고 있다고, 집을 구하면 소피의 방도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말한다. 희망적으로 들리는 말과 달리 아빠는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지 못한 듯하다. 부러져버린 팔처럼 캘럼은 어른의 세계에서 자꾸만 미끄러진다.
튀르키예에 도착한 첫날 밤, 곯아떨어진 소피를 챙기고 잠자리를 정돈한 아빠는 소피를 방에 두고 호텔 베란다로 나간다. 아빠는 담배를 피우면서 춤인지 무술인지 알 수 없는 동작을 한다. 혼자가 된 그의 뒷모습은 홀가분해 보이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그러다 아빠는 고개를 돌려 소피가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한다. 아빠는 혼자인 순간에도 온전히 혼자일 수 없다.
카메라는 베란다에 있는 캘럼의 뒷모습을 비추고, 캄캄한 방 안에는 소피의 숨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소리가 어떤 소리인지 잘 안다. 헌 공기를 내보내고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시듯 일정하고도 힘찬 숨소리.
아이는 어찌나 잠을 푹 자는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새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잠들어 있는 아이를 바라보면 어쩜 이리 예쁠까 싶다가도 훌쩍 커버린 모습에 겁이 덜컥 나곤 했다. 아이는 쑥쑥 자라는데 나만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았다. 삶이란 매일 풀어야 하는 숙제 같아서 제자리를 지키는 데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과연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쉽게 답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무는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이 앞에서는 나의 불안과 두려움을 감추려 했다. 아이는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르겠지만.
캘럼과 소피는 마치 친구처럼 물놀이를 하고 농담을 던지고 캠코더로 영상을 찍으면서 여유로운 휴가를 보낸다. 두 사람은 배를 타고 스쿠버 다이빙을 하러 간다. 계절마다 여행을 다니다가 고향에 정착했고 곧 아이도 태어난다는 스쿠버 다이빙 강사는 자신이 아빠가 되는 일은 40살은 넘어야 가능할 줄 알았다고 말한다. 그러자 캘럼은 공감한다는 눈빛으로 답한다.
"난 40살의 내 모습이 상상조차 안 돼요. 30살이 됐을 때도 깜짝 놀랐고요."
뒷모습을 상상하는 일
| ▲ 아빠 캘럼은 우울하고 어딘가 위태로워 보인다. |
| ⓒ 그린나래미디어 |
내가 정말로 어른이 됐구나 실감한 순간은 결혼을 했을 때도, 엄마가 됐을 때도 아니었다. 여행을 마치고 한밤중에 집에 돌아와 차에서 잠든 아이를 데리고 계단을 올라갈 때였다. 나도 너무 피곤하고 어서 침대에 눕고 싶지만, 아이를 재우고 다시 일어나 짐을 정리하고 또 다른 내일을 준비해야 할 때. 이제 나는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사람이 됐음을 깨달았다. 돌봄을 받기만 하던 시절은 끝났다는 것을.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유년 시절을 다시 살아가는 일이자,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부모의 모습을 상상하는 일이기도 하다. 졸려서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서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오랜 시간 운전해 집에 도착한 뒤 잠든 나와 동생을 데리고 계단을 올랐을 엄마와 아빠의 모습을 상상한다. 지금의 나보다 더 어렸던 그들의 뒷모습을.
<애프터썬>에는 여행지에 함께 있으면서도 소피는 보지 못했던 아빠의 모습이 나온다. 소피가 호텔방에서 잡지를 보며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동안 아빠는 화장실에서 홀로 깁스를 자른다. 가위가 빗나가 팔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도 소피가 알아챌까 봐 아무렇지 않은 척 딸의 말에 계속 맞장구를 친다.
가끔씩 캘럼은 다른 시공간을 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문양마다 수많은 사연이 담겨 있는 튀르키예 카펫 더미에 멍하니 기대어 앉아 있기도 하고, 호텔 베란다 난간 위에 올라 위태롭게 중심을 잡기도 한다. 부모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며 부모 역시 흔들리고 방황한다. 캘럼은 자신의 한계 안에서 소피에게 든든한 아빠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때로는 무너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소피와 캘럼이 머물렀던 리조트 호텔에서는 밤마다 투숙객을 위한 행사가 열린다. 소피는 아빠와 함께 장기 자랑 무대에 나가겠다고 신청하지만 캘럼은 정색하며 거절한다. 결국 소피 혼자 무대 위에 올라가 음정도 박자도 맞지 않는 노래를 부른다. 소피가 무대로 올라오라고 연신 손짓하지만 캘럼은 굳은 얼굴로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무대에서 내려온 소피에게 아빠는 농담처럼 말을 건넨다. "노래 배우고 싶으면 학원에 보내줄게"라고. 평소에는 농담으로 받아쳤을 소피는 이번에는 정색하며 말한다.
"돈 없는 거 알아."
영화를 볼 때 누구에게 이입하느냐는 내가 지금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를 보여준다. 캘럼에게만 시선이 쏠려 있느라 놓치고 있었다. 즐거운 여행을 위해 노력한 사람은 아빠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소피 역시 아빠의 불안정한 상황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상처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애써왔다. 유난히 밝고 씩씩한 모습은 소피의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모든 관계는 상호적이며 부모와 자식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날 만큼은 소피는 아빠를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돈 이야기를 꺼낸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자는 캘럼의 말에 소피는 혼자 더 있다 가겠다고 한다. 결국 두 사람은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 ▲ 영화는 소피는 알지 못했던 아빠의 뒷모습을 가만히 비춘다. |
| ⓒ 그린나래미디어 |
소피는 오토바이 게임을 하다가 만난 마이클과 키스를 나누고, 캘럼은 까만 바다를 향해 홀로 걸어간다. 그날 밤 서로의 마음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두 사람은 알지 못할 것이다. 부모와 자식은 어쩌면 너무 가깝기에 서로를 더 잘 모르는 관계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너무 가깝기 때문에 자신을 다 드러내지 못하고 숨기는 관계.
내게 힘든 일이 있을 때 가장 나중에 알리고 싶은 사람은 부모님 그리고 아이다. 나의 아픔이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만약 부모와 아이에게 힘든 일이 생겼는데 내가 알지 못한다면 그보다 슬픈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캘럼의 뒷모습을 소피가 볼 수 없었던 것처럼 나 역시 엄마와 아빠의 뒷모습을 모두 알지 못한다. 아마 내 아이에게 나도 그런 존재일 것이다. 사랑이란 상대를 뼛속까지 다 아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너무 사랑하기에 끝내 독해될 수 없는 공백을 남겨 놓는다. 그리고 나는 그 공백마저도 인정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는 어른이 된 소피가 젊은 아빠를 꼭 끌어안아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 시절 아빠와 비슷한 나이가 된 소피는 갓난 아기를 키우는 엄마가 되었다.
다시 20년 전으로 돌아가, 소피와 다시 헤어질 날을 앞두고 아빠는 호텔방에서 홀로 운다. 그냥 우는 게 아니라 어깨를 들썩이며 통곡한다. 카메라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비추다가 캘럼이 소피에게 남긴 엽서로 시선을 옮긴다. 햇살이 비치는 엽서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소피, 정말 사랑해. 그건 절대 잊지마.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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