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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가 데뷔한 현대차 사장…“시속100km의 삶 접자 내가 보였죠”

2026.06.20 08:42

‘74세에 첫 개인전’ 정순원 전 사장
CEO·금융통화위원까지 쉼없이 달려
은퇴후 나를 찾으며 비로소 세상보여


74세에 첫 개인전 연 정순원 전 현대차 사장 [한주형 기자]
“먹은 한번 지나가면 다시 고칠 수 없습니다. 서양화는 덧칠할 수 있지만 동양화는 그렇지 않아요. 한번 그은 선은 그대로 남습니다.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한번 지나가면 역사로 남는 것이죠.”

현대자동차 사장, 현대로템 부회장, 삼천리 대표,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정순원 작가의 이름 앞에는 오랫동안 기업인, 경제학자, 정책가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그런 그가 74세에 처음 문인화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 제목은 ‘떨감’이다.

최근 서울 인사동 무우수갤러리에서 만난 정 작가는 전시 제목에 대해 “감이 먹을 만한데 아직은 떫다는 뜻도 있고, 예술적으로 미성숙하다는 뜻도 담았다”며 웃었다. 그는 “찬 서리를 맞아야 홍시가 달짝지근해진다”며 “삶도 예술도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 작가는 지난 40여 년간의 직장 생활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라고 돌아봤다. 그는 “이력만 놓고 보면 화려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시절 정말 앞만 보고 달렸다”며 “달리다 뜻하지 않게 발목을 잡히기도 했고, 모함을 당한 적도 있었고, 좌절했다가 다시 일어선 순간도 많았다”고 했다.

은퇴 후에는 전혀 다른 시간이 찾아왔다. 정 작가는 이를 ‘고속도로에서 시속 100㎞로 달리던 차가 갑자기 시골길로 접어든 것’에 비유했다. 그는 “속도가 40㎞, 30㎞로 줄어드니 그제야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며 “내가 너무 바쁘게 살았구나, 나 자신을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가 수묵화를 시작한 것은 금통위원 임기를 마친 뒤였다. 금통위원에 이어 고문직을 맡았지만 막상 할 일은 많지 않았다. 그는 “매일 골프만 칠 수도 없고, 등산만 갈 수도 없었다”고 했다. 서양화는 집에서 그리기 어렵다고 느꼈고, 동양화라면 시작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집 근처 문화센터의 동양화 프로그램을 알게 됐다. 미술 수업은 학창 시절 가장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그는 붓을 잡기 시작했다.

정 작가는 “처음부터 재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며 “그냥 계속 그렸다. 직장 생활하듯이 끊임없이 열심히 했더니 되더라”고 말했다.

74세에 첫 개인전 연 정순원 전 현대차 사장 [한주형 기자]
그가 가장 아끼는 작품은 갯벌을 그린 수묵화다. 물이 빠진 갯벌 위에 사람들이 나가 일하고, 그들이 타고 온 배는 한쪽에 놓여 있다. 해는 지고 있고 물은 곧 다시 차오른다. 그는 이 장면에서 인생을 봤다고 했다.

정 작가는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살지만 일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며 “조금 있으면 물이 들어오고 그러면 배를 타고 떠나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 인생과 비슷하다”며 “누구든 자라고, 배우고, 일하고, 늙어서 자연 속으로 돌아간다. 삶은 그렇게 순환하는 것”이고 말했다.

직장 생활을 하며 여러 굴곡을 겪었지만 그에게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장면은 현대그룹 ‘왕자의 난’이었다. 2000년 현대그룹 경영권을 둘러싸고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회장 측이 갈등하던 당시 현대차 부사장이었던 그는 정몽구 회장을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정 작가는 “심적으로는 엄청 힘들었지만 그 길이 바른길이라고 생각했다”며 “그때 그 선택이 있었기에 오늘의 현대차그룹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금통위원으로 일한 시간은 그에게 ‘한국 경제를 가장 깊이 들여다본 시기’였다. 정 작가는 금리 결정에 대해 “모든 것을 종합해 판단해야 하는 종합예술에 가깝다”며 “경제를 다룰 때도 때로는 이론만이 아니라 감성으로 접근해야 하고 사람들과 많이 소통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한국 경제에 대해서는 “허물을 벗어야 하는 시기”라고 진단했다. 그동안 한국 경제는 정해진 길을 빠르게 따라가고 표준화된 제품을 싸고 빠르게 만드는 힘으로 성장했다.

정 작가는 “싸게, 빠르게, 남이 만든 길을 잘 따라가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며 “중국이 그 역할을 훨씬 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는 제품 안에 기술뿐 아니라 문화와 감성, 생활에 대한 이해를 담아야 한다”며 “제조업도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산업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반도체 호황기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반도체 빅사이클이 끝나면 시련이 닥칠 수 있다”며 “기회가 있을 때 빨리 탈바꿈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 작가는 은퇴를 앞둔 기업인과 직장인에게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준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은퇴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그는 50·60대가 되면 은퇴 이후 삶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설계해야 하며 준비 과정만 10년 정도가 걸릴 수 있다고 했다.

여행도 도움이 되지만 여행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고 했다. 여러 곳에 가보고 느끼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때 의미가 있다는 설명이다. 정 작가는 “바쁜 직장 생활로 여유가 없더라도 반드시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며 “인문학 책이나 고전을 가끔 읽어보길 권한다. 어떤 책이든 그 속에는 배울 것이 있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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